■ 보학/선현들의 묘.

제봉 고경명선생묘역과 신도비

야촌(1) 2016. 4. 25. 22:11

■ 고경명(高敬命)선생의 묘역과 제실 제봉각(霽峰閣)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 430-2에 소재하는 ‘고경명신도비'가 전라남도 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신도비는 마을의 입구에 있는데, 신도비를 지나 조금만 더 마을 쪽으로 가다 보면 산 아래 재실이 보이는데 바로 고경명을 기리는 제실 제봉각(霽峯閣)이고 그 뒤쪽에 그의 가족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선생의 묘역이 조성된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겠으나, 묘역 뒤편의 산 이름이 장군의 호를 딴 제봉산이다. 그런데 고경명은 문관이었는데도 무슨 이유로 흔히 장군이라 할까?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조선중기 선조 때의 문인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임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까지 동래부사로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곧바로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직접 의병을 지휘하여 금산(錦山)에 이르렀다.

 

왜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두 아들을 비롯하여 선생의 가노(家奴)까지도 의병이 되어 왜병들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문신이었으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목숨을 던진 의로운 분이어서 문신으로보다는 의병장으로 더 널리 알려진 것이다.

 

장군의 묘는 순국한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전라남도 화순군의 흑토평에 모셨으나, 1609년(광해 원년) 3월에 묘소를 지금의 장성부(長城府) 오동리(梧桐里) 오좌원으로 이장했다. 전에 모신 흑토평은 터가 좋지 않아 일찍부터 이장하려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 해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쌍분으로 모신 것이다.

 

 

↑고경명선생 묘/ http://blog.daum.net/life112

 

↑측면에서 비라본 고경명선생 묘의  전경 / http://blog.daum.net/life112

 

↑고경명선생 묘의 후경 / 치숙당(癡叔堂)

 

↑고경명선생 신도비  /  1800년 초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