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牛峰桃李村 선대묘소 답사 자료 - 귤산 이유원

야촌(1) 2016. 5. 8. 00:27

■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 선대묘소 답사 자료 - 귤산 이유원

 

[1] 34世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1814년(순조 14) ~ 1888년(고종 25)」 壽 75歲 25世 백사 항복(白沙 恒福)

      의 九代孫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동천(桐泉) 계조『啓朝 : 1793년(정조 17) ~ 1856년(철종 7)』의 아들

      다.

 

[2] 우봉 도리촌의 지명 변화

    ◇고려시대 : 우봉현 도리촌(牛峰縣 桃李村)

    ◇1945년 11월 이전 : 황해도 금천군 소남면 지금리 도리촌(黃海道 金川郡 小南面 知琴里 院村)

    ◇일명 :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

    ◇1954년 :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黃海北道 張豐郡 十灘里 院村)

    ◇1960년 : 개성직할시 장풍군 십탄리(開城直割市 張豐郡 十灘里 院村)

    ◇1967년 일부지역의 편입 분리에 따라 다시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黃海北道 張豐郡 十灘里 書

        村)으로 리어진다.

 

● 17世 익재 이재현(益齋 李齋賢) 선생의 묘소(墓所)와 그의 자제 밀직사密直使 : 중추원의 從 2품 벼슬』창

     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마을 가운데 있어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왔다.

 

1) 16世 동암공 이진(東菴公 李瑱) 묘소(墓所)는 계좌(癸坐).

    ◇1244년(고종 31) ~ 1321년(충숙왕 8)

 

2) 17世 익재공(益齋公)의 묘소(墓所)는 자좌(子坐).

    ◇1287(충렬 13) ~ 1367(공민왕 16)

 

3) 18世 밀직공 창로(密直公 彰路)의 묘소(墓所)는 계좌(癸坐)

 

4) 30世 통덕랑 인식(通德郞 寅烒)의 묘소(墓所)는 익재공 묘소 외록(外麓) 건좌(乾坐)로, 만정당(晩靜堂) 서종

     태「1652년(효종 3) ~ 1719년(숙종 45)」선생이 찬(撰)한 묘지명(墓誌銘)과 비석(墓表陰記)이 있음.

   ◇31世 인천부사(仁川府使) 성곤(成坤 : 통덕랑 인식의 長子).

   ◇통덕랑 인식(通德郞 寅烒)의 아들. 성곤(成坤)-태곤(泰坤)-원곤(元坤)-진곤(震坤)-춘곤(春坤)-경곤(敬坤)

 

[3]그 위에 선조의 묘소라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1) 족보에 태복야 열헌공 핵(太僕射 悅軒公 翮) 15世

    2) 동암공 진(東菴公 瑱-익재공의 父) 16世

    3) 송암공 세기(松岩公 世基) 16世

        ◇長子 : 국당공 천((菊堂公 蒨)

        ◇次子 : 부정공(副政公 邁)

        ◇三子 : 상서공 과(尙書公 薖

    4) 상서공 과(尙書公 薖 : 송암공의 3男) 17世

 

[4]관직해설

     중추원(中樞院) : 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出納)·군기(軍機)·숙위(宿衛)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성종 10년(991)에 설치한 것으로, 뒤에 추밀원·밀직사 등으로 여러 차례 고쳤다.

 

    ◇태복야(太僕射) : 고려·조선 시대에,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명칭이 사복시(司

        寺)와 번갈아 여러 번 바뀌었다.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 명예정승직

    ◇밀직사(密直使) : 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出納)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

        아. 충렬왕 1년(1275)에 추밀원을 고친 것으로, 공민왕 5년(1356)에는 다시 추밀원으로 바꾸었다가 뒤에 또

        이이름으로 고쳤다.

 

   ◇부정(副正) : 고려 때 종4품 벼슬 : 전의시(典醫寺), 내알시(內謁寺). 전농시(典農寺), 사복시(司僕寺) 등. 司

        와 寺가 붙는 관청에 소속 하였다.

 

[5]나 유원이 익재 묘소를 성묘하고 두루 두루 여러 선대의 묘소를 찾아보았더니, 익재 묘소위에 무덤이 둘있고, 밀

     직사(密直使) 묘소위에 또 큰 무덤이 둘 있었다.

 

[6]무진(戊辰) 1868년 봄.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 비 건립(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建立)에 함께 도모한 사람.

     ◇국당공파(菊堂公波) : 판서 이현직(判書 李顯稷), 승지 이학영(承旨 李鶴榮), 부총관 이용상(副總管 李容

        象),

     ◇상서공파(尙書公派) : 좌의정 이유원(左議政 李裕元), 참판 이유응(參判 李裕應), 응교 이유승(應敎 李裕

         承), 이상 6명이 감독 하였고...

 

    ◇익재공파(益齋公派) : 익재(益齋) 후손 정언 이용우(正言 李龍雨)는 맏파로서 실상 주관 하였다.

        무진(戊辰) 1868년 봄 후손(後孫) 유원(裕元)이 묘단 비(墓壇碑)에 기록하였다.

 

[7]뒤이어 족질(族姪) 이민영(李民榮)으로 하여금 다시 파서 징험하여 보았더니, 밀직공(密直公) 묘소위의 첫 분

     묘(墳墓 : 무덤)에 다만, 유기(鍮器 : 놋쇠) 수저하나와 쇠못 4개가 나왔는데, 너덧 댓 치 되었다.

 

   ◇훗날 밝혀진 내용으로는 동암공 산소임. 제일 위의 분묘에는 석곽(石槨: 돌로 만든 곽) 앞에 조그만 한 돌이 하

       나 서 있었는데, 길이가 몇 자 되었다. 또 석곽 위에는 큰 돌을 세 개 얹어 놓았는데, 천판(天板) 같았다.

 

      밑에 돌이 이지러진 데가 있어서 십여 명이 조금열고 살펴보았더니, 황토(黃土)만 가득 차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었다. 곧 개봉하여 전과 같이 하여 가토(加土) 하고 나무뿌리와 풀 덩 쿨을 제거한 후, 익재공 묘직(墓直)

      에게 수호하였다.

 

     고려 때는 관에다 쇠못을 사용하고 밥 수저를 넣어주었다. 예장에는 석곽을 사용 하였고 한 반석(限半石 : 대문

     역활하는 조그만 돌)을 넣었다. 따라서 밀직공 위의 첫 무덤은 예장(禮葬)인 것을 가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