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 이제현 선생 약사(益齋李齊賢先生略史)

야촌(1) 2016. 5. 2. 20:13

■  익재 이제현선생약사(益齋 李齊賢先生略史)

 

[생졸년] 1287년(충렬왕 13)∼1367년(공민왕 16)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신축방(辛丑榜) 병과(丙科) 1위(4/33)

[고려사마]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2위(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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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신. 학자·, 문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 동암공(東菴公) 진(瑱)은 고려건국의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금서(金書)의 후예로, 신흥관료로 크게 출세하여 재상 급의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을 역임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작되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그는 관료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으며, 안향(安珦) 문하의 육군자(六君子)의 한사람으로 백가에 박통하고 시(詩)에 능했다. 이제현은 ‘자주성을 잃은 고려’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민족수난기에 일곱 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여섯 왕을 모시고, 네 번이나 시중(侍中=政丞)을 지낸 경륜의 정치외교가였다.

 

고려 역사의 특유한 ‘원 간섭기(元干涉期)’가 있었다. 한족[宋]·거란[遼]·여진[金]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균형을 이루며 강성했던 고려는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으로 국운이 쇠약해졌다. 고려가 대몽항쟁 끝에 강화를 성립시킨 1259년(고종 46)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한 1356년(공민왕 5) 까지 97년 동안을 ‘원간섭기’라 부른다.

 

이제현은 1301년(충렬왕 27)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같은 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1303년(충렬왕 29)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 벼슬의 관직생활을 시작으로, 1308년(충렬왕 34)에는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 이어서 전교시승· 삼사판관·서해도안렴사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이 당시 벌써 이제현은 “학문과 문장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부(權溥)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쿠빌라이 칸의외손자로서 몽골정치에도 참여한 제26대충선왕「忠宣王,1275~1325),제위 1308~1313)」은 고려왕위에 복위했지만 곧 아들 충숙왕(忠肅王)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북경)에 머물렀다.

 

그곳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재를 짓고 중국의 유명한 성리학자들을 초빙하여 서사(書史)를 즐겼다.

충선왕은 이때 원나라를 대표하는 조맹부(趙孟頫)·요수(姚绶)·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 등 학자·문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약관 28세의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후 충선왕이 세력을 잃고 유배되자, 고려 간신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 등은 원(元)나라에 청하여 고려의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매국적인 ‘입성책동(立省策動)’을 제기했다.

 

이에 원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들의 청을 받아들여 저들의 정동행성(征東行星)을 고려에 두고 국호를 아예 폐하려 하였는데, 이에 이제현은 1323년 원에 들어가 중서성(中書省)에 ‘나라는 그 나라요, 

 

사람은 그 사람(國其國, 人其人)’의 대의(大義)를 들어 고려의 주권을 역설하고 그 불가론을 대문장으로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왕약(王約)·회회(回回) 등을 설득 감탄케 하여 고려가 중국의 속국이 되는 입성책동을 일세의 문필로 막아낸 이가 바로 익재 이제현 이다.

 

만일 그 때 이제현이 없었다면 고려의 국호는 없어지고, 주권을 잃은 망국의 역사로 길이 남았을 것이다. 대문장가란 이렇게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고 시대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 즉위하자, 이제현은 65세에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공민왕의 정치가 충목왕대 개혁의 연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정승(政丞)이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제현은 1357년(공민왕 6) 71세로 치사(致仕-은퇴)한 후, 1367년(공민왕 16) 81세를 일기로 ‘고종명(考終命)’했다. 고려의 대표 문인 이색(李穡)은 해동(海東)의 석학이었고 대정치가였던 이제현의 묘지명에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새겼다.

 

또한 조선의 명재상 유성룡(柳成龍)도 “이제현은 덕(德)·공(功)·언(言)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적(儒家的) 인물이며, 고려 5백년을 통틀어 이제현 만한 인물이 없다”고 평했다.

 

이제현은 ‘조선3천년의 대가(大家)’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역대의 수많은 시화집에 거론되었다. 《동문선》에 최다수의 작품이 실린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았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현이 쓴 책들 중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보물 제1892호》 10권과 《역옹패설-보물 제1893호》4권, 습유(拾遺, 빠진 글을 보충한 것) 1권이 있으며, 이것을 합쳐서 흔히 《익재집(益齋集》 이라고 한다.

 

이제현은 젊어서는 개혁군주 충선왕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다. 장년에는 어린 충목왕의 개혁방향을 제시했다. 노년에는 공민왕의 초기개혁을 진두지휘해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현은 충렬왕시대에 태어나 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까지 6대를 내리섬기며 각 왕들이 원나라 내부의 간신배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몸을 던져 보호했다.

 

고려를 홀로 지켜낸 이제현의 사상은 제자 이색에 고스란히 전수되어 조선의 국가 이념이 되는 성리학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고. 그 후 이색의 문인인 정몽주·정도전·권근과 그들의 학문을 이은 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현은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학사상은 최승로·최충(崔沖,984∼1068)·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사학사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고려사》에는 그의 《국사》에 실린 사론(史論)이 종종 인용되고 있다. 이 글들은 당대사의 기술과 왕조사를 정리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철저하게 객관적이면서 대의명분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냉철한 필치를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목은고(牧隱藁)』

「익재(益齋) 소락부(小樂府)와 고려가요(高麗歌謠)」(서수생,『동양문화연구』11, 1984)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정치활동(政治活動)」(민현구,『진단학보』51, 1981)

「이제현(李齊賢)의 역사의식(歷史意識)」(정구복, 『진단학보』51, 1981)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설치경위(設置經緯)」(민현구,『국민대학논문집』11, 1977)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사학(史學)에 대하여」(김철준, 『동방학지』8, 1967)

「이제현(李齊賢)」(고병익, 『인물한국사』Ⅱ, 1965)

「이익재(李益齋)의 재원생애(在元生涯)에 대하여」(김상기, 『대동문화연구』1, 1964)

 

 

↑고려 말 익재 이제현 선생 영정

 

2016. 05. 01

執筆 :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