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현와 이도선생 유허비명(弦窩 李蒤先生遺墟碑銘)

야촌(1) 2016. 3. 14. 00:47

■ 현와 이도선생 유허바명(弦窩 李蒤先生遺墟碑銘)

   (四友齋 경내에 있는 유허비)

 

곽면우 찬(郭俛宇 撰/구한말 영남 유학자요. 독립운동가)

 

필부(匹夫)의 지절(志節-지조와 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세상의 일을 일시(一時)에 바로 잡아 회복(回復)시킬 수는 없지만, 족히 만고(萬古) 불변(不變)의 진리(眞理)인 강상(綱常)을 지탱시킬 수 있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옥누屋陋)에서 도(道)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을 남들은 미처 볼 수 없으나, 천지신명(天地神明)에 근간(根幹)을 두고 해와 별(星)을 짝 할 수 있는 사람 여기 있으니, 세속(世俗)에서는 이를 미미(微微)한 사람으로 아나, 군자(君子)는 이것을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니, 비록 인(仁)을 얻어 후회(後悔)함이 없이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은거함을 달게 여기지만 끝내 그 실상(實像)을 가릴 수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 있으니, 이는 현명한 사람(知者)과 함께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령읍(高靈邑)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물이 깊지 않으나 맑게 이어지고, 산이 높지 않으나 아름답고 그윽한데, 여기에 대대로 상전(相傳)해 내려오는 서재동(書齋洞)이라는 곳이 있으니, 옛날 현와 이도(弦窩 李蒤,1593~1668)선생이 사우재(四友齋)를 지어 노년(老年)을 보냈던 바로 그 곳이다.

 

대체로 일찍이 덧건데,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태종대왕)에게 원자(元子) 양년대군(讓寧大君)이 있었는데, 이 분은 주(周)나라 태백(太伯)과 송(宋)나라 원좌(元佐)의 지덕(至德-공자께서 이 분들을 지덕이라 함)과 고행(高行)을 몸소 실천하여 성조(聖朝)의 무궁(無窮)한 아름다움을 열었다.

 

종적(宗籍)에서 차차 멀어지고 작질(爵秩)이 점점 미약(微弱)해저도, 오히려 후손들은 선조(先祖)의 그 어진 법상(法象)을 본받아 관직(官職)에 나아감을 극히 사양하였는데, 6대를 지나 공(公)에 이른 즉, 더욱 경술문장(經術文章)과 충의절조(忠義節操)로서 우뚝이 종실(宗室)의 의범(儀範)이 되고 현사대부(賢士大夫)들이 앙망(仰望)하는 바 되었으니, 아아 세상(世上)에 드문 일이로다.

 

공은 어린나이에 성균관(成均舘=太學)에서 공부하여 아름다운 명예(名譽)을 크게 떨 첫 지만, 혼조(昏朝-光海朝)에서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을 만난 즉, 드디어 기미(幾味)를 밝게 보고 남으로 은둔(隱遯)하였다.

 

팔계(八溪=합천초계)에서 장인(丈人)인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1551~1628)선생을 따라 날로 강론(講論)하고 질정(質正)하였는데, 고요히 즐기는 바가 내면(內面)에 있었지, 조금도 외물(外物-벼슬 따위)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공이 함께 사우(師友)한 이들로는 문간공 정동계文簡公 鄭桐溪), 문정공허미수(文正公 許 眉叟)와 학사김응조(鶴沙 金應祖), 조은 한몽참(釣隱 韓夢參),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기옹 박공구(畸翁 朴羾衢), 락수 곽위국(洛叟 郭衛國), 국포 이문룡(菊圃 李文龍)과 그의 사위 태허 곽홍지(太虛 郭弘址)등이니, 혹은 도의(道義)로 혹은 문학풍채(文學風采-글로 사귀는 풍모)로 사귀는 가운데 보고 느껴서 서로 왕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즉, 그 이룬 것이 방정(方正)함과 실천한 것이 확고함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의병진영(義兵陣營)에서 충간공 사서 전식忠簡公沙西全湜,1563~1642)을 따라 방법(方法)과 책략(策略)을 계획했는데, 조령(鳥嶺-경북문경시와 충북괴산군사이의 고개)을 넘기 전에 강화(講和)가 이루어지니, 이로 인하여 통곡(痛哭)하고 파하였다.

 

이 때 부터 더욱 당세에 뜻이 없었으나, 특별히 이름이 종적(宗籍-종실)에 있었기 때문에 임자(任子의 은명(恩命)에 감히 드러나게 속마음을 다 표현(表顯)하지 못하고 부지런히 명을 쫒아 세 차례 잔폐(殘廢)한 역(驛)의 찰방(察訪)을 맡았으나 낮게 여기지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는 곧 사양하고 돌아와 누항(陋巷-한적한 마을의 누추한 집)에서 지내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는데, 려여(藜糲-비름나물 죽과 살 겨죽)도 넉넉지 못했으나 더욱 세한(歲寒-변함 없는 지조)의 뜻을 굳히지 않고 위로 고인중(古人中)에서 상우(尙友)를 구하여 주(周)나라에서 노중련(魯仲連), 진(晋)나라에서 도원량(陶元亮), 송(宋)나라에서 호방형(胡邦衡)을 얻고,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을 얻었으니, 이것이 사우재(四友齋)를 짓게 된 연유(緣由)였다.

 

대개 진(秦)를 황제(皇帝)의 나라로 받들기를 수치로 생각하여 가서 신원연(新垣衍)을 꺾으려 함과, 무도한 금(金-청 태종)나라에 절하기를 거부하고, 왕륜(王倫)과 진회(秦檜)를 벨 것을 청함이 공의 뜻이었으나, 땅이 막혀 서로 미치지 못한 즉, 차라리 도연명(陶淵明)처럼 국화(菊花)에 취(醉)하여 회포(懷抱)를 붙이고, 백결선생(百結先生)과 같이 거문고를 타며 가난을 즐겼음은 또한 마지못했던 것이다.

 

공은 일찍이 제문(祭文)를 지어 문간공 정동계(文簡公 鄭桐溪) 선생에 대하여 곡(哭)하기를

 

만첩산중(萬疊山中) 한 초당(草堂)에

삼백년(三百年) 강상(綱常)을 유지(維持)했네.

 

슬피 울며 흐르는 수송대(愁送臺) 앞 물이여

청음(淸陰)과 함께 심양(瀋陽)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恨歎)했네.

라고 했는데, 일시에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널리 불리어 짐)되었다.

 

성주(星州)에 한 졸병(卒兵)이 죽어 애도(哀悼)한 시(詩)에

네(자네, 이녁)가 글을 익혔다면 조정(朝廷)의 반열(班列)에 올랐을 터,

의담(義膽)은 정동계(鄭桐溪) 못지않았네.

 

아아! 네가 죽어 진정한 남자(男子) 없으니

여진의 참군(參軍)이 모두 홀(笏)을 잡아 버렸네.

라고 하였다.

 

감우십일편(感遇十一篇) 또한 모두 격울분타(激鬱噴咤-답답한 가슴을 치고 침을 벹 아 꾸짖음)함과 륜균엄억(輪囷掩抑-높고 큰 이상이 가리고 억눌림)하여 구슬프게 서리풍천(黍離風泉-나라가 망한 빈 터에 기장 밀만 무성함-곧 나라 망한 슬픔)의 감회(感懷)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초검시(招劍詩-星州卒詩)를 읊고 출사(出師-전쟁터에 나감)를 노래하고 싶게 한다.

 

이것은 동계선생(桐溪先生)이 강화문서(講和文書)를 찢고 칼로 배를 찌르고서 모리(某里)로 돌아가 고요히 은거(隱居)했던 일과 실로 만난 것은 다르나 향하는 뜻은 같음이 명백하여, 마음은 합하나 자취가 민멸(泯滅)되어 세상에 칭송(稱頌)됨이 드무니, 현명한 사람들은 문장(文章)과 행의(行儀)가 있는 노사표(老師表)라 할 것이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러나기를 즐겨 고상하게 노니는 은군자(隱君子)라 할 것이다.

 

아아! 이것은 아마 앞에서 이른바 지덕고행(至德高行-양녕대군의 高行)의 유업(遺業)이리라.

公이 돌아가신지 지금 이미 230여년이 지났으나 조정(朝廷)에서 증직(贈職)으로 포상(褒賞)함이 없고, 고을에서 사당(祠堂)을 지어 향사(享祀)함이 받들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세도(世道-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는 유감(有感)이 될 것 같으나, 공에게 있어서인 즉 무슨 원망(怨望)과 후회(後悔)가 있겠는가?

 

지금 천하(天下)의 변고가 없는 곳이 없는데, 공과 사우(四友)는 이미 모두가 다시 살아 일어날 수 없으나, 서재동(書齋洞)의 이름은 장차 천지(天地)와 함께 무궁(無窮)하여 우듬지로 남을 것이다.

 

족히 사람의 기강(紀綱)을 세우고 무너진 풍속(風俗)을 가다듬을 수 있다. 이에 공의 풍모(風貌)를 상상(想像)하고 분발함에 중화(中華)가 길이 이적(夷狄)에 빠지지 않고 인류(人類)가 끝내 금수(禽獸)와 동화(同化)되지 않을 것인 즉, 그 실상(實像)을 들어 밝혀 후인(後人)들의 본보기로 삼지 않을 수 없다.

 

후손(後孫)들이 비석을 다듬어 유허(遺墟)에 세우기를 의논하여 원상(遠祥), 상선(相善) 두 군자를 다전(茶田)의 협곡(峽谷-빗집을 세운곳>인조 임금께서 삼전도에서 머리를 숙인 곳)에 보내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니, 사양(辭讓)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드디어 개연(慨然-뜻을 펴 탄식함)히 여겨 아래와 같이 명(銘)을 붙인다.

 

璿潢之別至德以闡 / 종실에서 나온 계통, 지덕에서 드러났네.

怡讓靖夷世篤闕善 / 고요히 양보하고 물러나, 대대로 그 善을 돈독히 하였네.

 

有産斯珍可璜可璉 / 여기에 보배가 나니, 서옥과 호련이였네.

宜實于廷蒲穀其琢 / 조정에서 쓰이기에 마땅했으니, 男爵과 子爵을 새길만 하였네.

 

識微遐翹若塗于冕 / 기미를 알아 멀리 떠나서, 헌면을 하잕은 것으로 여겼네.

雪壑氷淸抽啓關鍵 / 설학이 빙청이니, 학문의 관건을 열었네.

 

郁郁英豪南土之選 영호의 자질 빛나니, 남녁의 더러난 인물로 뽑혔네.

載翶載翩熏炙涵演 / 한가히 노닐며, 사우들 사이에 가르침을 몸에 익혔네.

 

學修行立所樂匪淺 / 학문이 닥이고 행실이 섬에, 즐거운 바가 얕지 않았네.

有曀陰羶于薄京輦 / 오랑캐의 변고가 어둡게 닥치자 임금계신 대궐까지 이르렀네.

 

桓桓全公忠義胥勉 / 씩씩한 전공(忠簡公 全湜) 충의로서 서로 권면하였네.

我執其籌狐兎于獮 / 내가 그 주책을 잡으니 저 오랑캐를 잡았도다.

 

彼鄙肉食謀國何舛 / 저 비루한 관리들이여 국사를 도모함에 어찌 그리 어긋났던고?

人彛倒懸神惋鬼㥏 / 인륜이 거꾸로 매달리니 귀신이 한탄하고 부끄럽게 여겼네.

 

大地無天有脚何踐 / 대지에 하늘이 없으니 발이 있은들 어디를 밟을 것인가.

高陽有區澄川翠巘 / 고령의 한 구역에 물이 맑고 산이 푸르렀네.

 

縛茅苑貞四友其扁 / 띠집을 짓고 은거하여 곧게 지내니 그 편액 四友齋였네.

有沸于衷轅檜叱衍 / 충의에 들끓는 義가 있으니 倫檜를 찧어 죽이고 新垣衍을 질타하였네.

 

潯龍莫鶱碓樂自遣 / 심룡(陶淵明)이 날지 못하니 대악을 즐기며 나날을 보냈네.

鳩巢某山有老謇謇 / 某山에 비둘기집 지어 거처를 정하니 늙은 사람(정동계) 있어 곧은 말 드높혔네.

 

禹顔道同寤寐纏繯 / 禹임금과 顔回의 道가 같은 것을 자나 깨나 마음에 잊지 않았네.

呌嘑發聲激昻挫轉 / 부르짖으며 소리를 발하니 격앙되어 꺽이고 굴렀네.

 

虜肝堪嚌釰虯蜿蟺 / 오랑캐의 간담을 씹을 것 같으니 노둔한 규룡이 꿈틀거렸네.

翳然蓬蒿知德者鮮 / 오두막 한 가운데 어둡게 가려 있으니 덕을 아는 사람 드물었네.

 

有燀其光於乎不顯 / 빛 나는 그 광채여, 아아! 더러나지 않은가?

撑穹拄坤匪席可卷 / 하늘을 떠 받치고 땅을 비끄러 매니 작은 돗자리라도 걷어 붙일 수 없었네.

 

不有斯人吾其蝡蝡 / 이 사람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아마 꿈틀거리는 벌레가 되고 말았으리라.

高山日月愈仰愈緬 / 높은 산과 해와 별처럼 우르럴수록 더욱 아득히 생각나네.

 

凡今之民視此銘碝 / 무릇 오늘날 사람들이여 이 옥돌에 새긴 글 볼지어다.

百世是師勅我天典 / 누대로 師表되어 우리들의 천전(綱常)을 바로 잡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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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遺墟碑文

 

匹夫之執有不能挽回一時而足撑拄乎百古之綱常 屋漏之守人不及窺而有可以質神明而儷日星世俗之微而君子以爲莫大焉 雖得仁不怨自甘湮晦而終有不可得以掩其實 愈久而益彰者是則可與知者道者乎 由高靈治而西厪十里所水不深而淸而迤山不高而麗以幽於是而得相傳書齋洞者 昔弦窩先生李公諱蒤之築四友齋以老焉則其地也 盖嘗聞我 恭定大王 有元子曰 讓寧大君躬行周太伯宋元佐之至德高行 啓聖朝無疆之休 曁屬籍 寢疎爵秩寢微而猶法象其賢克讓於進取 歷六世而至公則 又以經術文章忠義節操卓然 爲 宗室之儀而士大夫之望 於乎希矣 公蚤歲遊庠英譽大噪而値昏朝之不可以自見也則 遂炳幾南遯從外舅李雪壑于八溪 日有講質囂囂然所樂之在內而不以一毫外 至上心其所與師友之者 若桐溪鄭文簡公眉叟許文正公 及金學沙應祖 韓釣隱夢參 曺梧溪挺立 朴畸翁羾衢 郭洛叟衛國 李菊圃文龍 及其壻郭太虛弘址 或以道義或以文學風采得觀感徵逐而不倦則 其所就之正所履之確 槩可想矣 丙子之亂從沙西全忠簡公于義陣爲規劃方畧 未踰嶺而和事成因痛哭而罷 自是益無當世意 特以名係 宗籍任子有恩不敢灼然爲表襮乃黽勉就 命三閱殘郵而不以卑旋 卽謝歸杜門陋巷藜糲不給而彌堅歲寒之志求尙友於古人 而於周得魯仲連 晉得陶元亮 宋得胡邦衡 東方則得百結先生 此四友齋之所由築也 盖耻帝秦往折新垣咈拜犬請斬倫檜 公之志也 而乃地格而不相及則 寧醉菊以寓懷鼓琴以娛貧其亦不得已也

 

公嘗有詩哭鄭文簡先生曰

萬疊山中一草堂 維持三百載綱常

膾炙於一時 其哀星州卒詩曰

爾如解文朝班隮 義膽不下鄭桐溪

吁嗟爾死無男子 女眞參軍皆執珪

 

其感遇十一篇又皆激鬱噴吒 輪囷揜抑 凄然其黍離風泉之感而令人欲誦招劍而歌出師 此其與裂紙剚刃歸靖某里 實爲異値而同趨者無疑矣 而心融跡泯世罕得以稱焉 知之者以爲是有文有行之老師表 不知者以爲是怡退高尙之隱君子哉 噫斯其爲至德高行之遺者乎 公之沒已二百三十年餘于今 而褒贈不擧于 朝俎豆 不崇於鄕 玆若爲世道之憾而在公則何怨悔焉 今天下之變又無所不有矣 公與四友者旣皆不可作矣 而書齋洞之名其將與天壞俱敝 有足標幟乎 人紀砥礪乎頹風得想像奮發而中華不永淪於夷狄 民類不終化爲鱗介者則 是不容不揭其實而表顯之俾來者有所式也 裔孫某某議伐石以殿其墟走 遠祥相善二君子于茶田之峽命不佞以鏤其陰者辭不獲遂慨然爲之銘曰

璿潢之別至德以闡怡讓靖夷世篤闕善有産斯珍可璜可璉宜實于廷蒲穀其琢識微遐翹若塗于冕雪壑氷淸抽啓關鍵郁郁英豪南土之選載翶載翩熏炙涵演學修行立所樂匪淺有曀陰羶于薄京輦桓桓全公忠義胥勉執其籌狐兎于獮彼鄙肉食謀國何舛人彛倒懸神惋鬼㥏大地無天有脚何踐高陽有區澄川翠巘縛茅苑貞四友其扁有沸于衷轅檜叱衍潯龍莫鶱碓樂自遣鳩巢某山有老謇謇禹顔道同寤寐纏繯呌嘑發聲激昻挫轉虜肝堪嚌釰虯蜿蟺翳然蓬蒿知德者鮮有燀其光於乎不顯撑穹拄坤匪席可卷不有斯人吾其蝡蝡高山日月愈仰愈緬凡今之民視此銘碝百世是師勅我天典

 

郭鍾錫 씀

 

[출처] 곽면우선생 찬 현와공유허비문|작성자 모우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