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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행방불명되었던 명량대첩비 찾음
(略)忠武公 이순신장군의 기념비가 일본인관리의 손으로 全南 右水營바다 기슭에서 자취가 없어졌던 것이 이번에 다행히도 전 총독부 박물관구내에 내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민족적으로 자랑할 李舜臣大捷碑는 지금으로부터 330여년 전 3천리 강산을 짓밟아논 소위 임진왜란 때 왜국의 수병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던 우리 민족의 자랑인 충무공의 공훈을 기리 현장하고자 당시 右水營海戰이 벌어졌던 전남 海南郡 門內面 右水營에 儒林에서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소화 17년 5월 어느 날 당시 경남 경찰부장 阿部의 손에 높이 열자 폭이 넉자 투레가 두자나 되며 무게가 소 세 마리가 간신이 끄는 이 큰 비를 뜯어내어 어디로 인가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야 그 누구가 이 짓을 탓했을 것이냐 그 이유가 치안에 재미가 없다고 치워 버린 그들에 일언반구라도 그 어찌된 것을 물었을 것인가.
4년간 그 자취를 궁금히 하고 있던 그 동리에 있는 朴夢益이가 이번에 이 비를 찾고자 상경하여 조사해 본 결과 그 비는 무사히 박물관안에 있는 것을 알아 내어 그 비를 그 전에 섰던 그 자리로 옮겨 세워 놓고자 군정청 밋첼교화과장에게 여러 가지로 원조하여 주기를 구했던 바 그도 기꺼히 찬성하여 금년안에는 미군의 원조로 다시 옛자리에 다시 서게 되리라 한다.
<매일신보> 1945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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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비, 전남 해남군 문내면으로 이전
옹졸한 倭人들이 찬연한 戰跡에 샘이 나서 일부러 허무러다가 서울시 국립박물관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조선의 넬슨장군 이충무공이 비석을 도로 찾아다가 전라남도 右水營 그전 자리에 또다시 세우려고 그 고장 유지대표가 입경하여 군정당국에 교섭을 하는 중이라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이장군에 대한 지방유지들의 우러러 추모하는 정이 간절하여 마침내 소원대로 비석을 가지고 기쁨의 還故鄕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서울에 올라온 右水營 유지대표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 사무소를 둔 이충무공전첩비 복구기성회에서 파견을 한 李龍孝외 1명으로서 그들은 국립박물관과 군정청에 직접 교섭을 한 결과 두곳으로부터 일시에 쾌락을 얻어 28일 저녁차로 고이 고이 포장을 한 비석을 싣고 일로 우수영을 향하여 귀로에 올랐으므로 머지 않아 전라남도 鳴梁海峽에는 이충무공의 찬연한 전첩비가 또다시 조선의 위엄을 떨치고 서게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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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도에 보이는 충무공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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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자료 3매는 <서울대 규장각 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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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연합뉴스) 조근영 기자 = 전남 해남군 화원면 우수영에 세워진 '명량대첩비'가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당초의 것이 아닌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바뀌었으며 비문의 표기 등이 그 근거라는 것' 그러나 명량대첩사업회측은 비문 조작 흔적이 없는 등 가짜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일축하고 있어 종합적인 조사가 시급하다는 여론이다.
향토사학자 민부삼(56.해남읍 해리)씨는 보물 503호로 지정돼 해남 충무사에 있는 이 대첩비의 비문과 1860년 제작된 호남읍지에 나타난 비문이 다르다고 31일 주장하며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민씨는 최근 할아버지인 고(故) 민병석씨의 문집에 소개된 명량대첩비의 비문에서는 일본식 한자표기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민씨는 더욱이 호남읍지 제8권에 소개된 비문과 할아버지의 문집 내용이 동일해 현재의 것은 당초의 것이 아닌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1942년 일본인들이 초등학생을 동원, 명량대첩비를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는 데도 비문에 상처가 없다는 점도 의심스럽다는 것.
그러나 명량대첩사업회 홍형덕(78.화원면) 회장은 비문을 옮길 때 자신이 참여했다면서 조작 가능성을 일축했다. 홍 회장은"일본인들이 비문을 옮길 때 자신을 포함한 300-400명의 초등학생들이 동원돼 배에 실어 보냈으며 1946년 서울 덕수궁 뜰에 방치돼 있는 것을 발견, 다시 우수영으로 가져왔다"고 밝혔다.
이어 "비문을 살펴봐도 조작 흔적이 없고 전쟁 중인 당시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비문을 바꿀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비가 땀을 흘리는 등 진짜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chogy@yna.co.kr<끝>
<연합뉴스> 2006/01/3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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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랑대첩비문 원문자료 비교
「西河先生集」 卷之十四/ 碑銘
故統制使李舜臣鳴梁大捷碑
萬曆二十五年丁酉九月。統制使李公統舟師進駐於珍島之碧波亭下。大破日本賊於鳴梁之口。賊由是大。不敢窺海右逼湖圻。其明年賊遂罷兵歸。世謂中興戰功。公爲第一。而鳴梁之戰最奇云。蓋公初以全羅左水使。聞賊至慷慨誓衆。進兵於嶺南界中。邀擊沿海賊。初戰於玉浦。再戰於唐浦。復戰於固城之唐項浦。皆以少擊衆。殺賊無算。卒乃大捷於閑山。威振海隅。乃進拜統制使。悉總三道舟師。仍屯閑山數歲。賊亦不敢復?海路。至是賊再擧大至。懲前之敗。蓄憾專力。欲衝海道直上。時公方被誣逮。命以白衣從元帥。俄復授舊職。於是元均已代公。大出兵迎賊。軍遂陷。盡喪其舟師器械蓄積而閑山已陷矣。顧公乘喪敗之後。無兵可戰。間關走海上。稍收亡卒。得戰艦十餘。遂進扼鳴梁。賊至者樓櫓蔽海。公督諸將進船。當海之隘口。連下碇。截中流待賊。鳴梁地迫陜。潮方盛水益急。賊從上流乘潮掩之。勢若山壓。士卒無生意。公意氣益勵。乘機奮擊。將士皆殊死戰船出入如飛。砲火四起。海水盡沸。賊船焚燒撞碎。沈溺死者不可勝數。賊遂大敗遁去。始戰方。巨濟縣令安衛少却。公立船頭大喝。命左右取衛頭。衛懼還入疾戰。是日破賊船五百。斬其將馬多時。時南民避賊從公者百餘船。未戰公令分船泛海爲疑兵。及戰船上觀者皆失色。謂公兵少當沒。及賊退戰息。見我舟屹然無恙。皆大驚爭來賀。自是軍聲復大振。夫自李鎰,申砬軍後。官軍及義軍。遇賊輒奔潰。無敢略齟齬其鋒者。及天子遣大兵來救。大震殲。次第復三都。然後我軍稍稍角之。如延安幸州之捷。雖一時稱雋。然皆藉天兵威重。僅能城拒守得全。未有獨當一面戰全勝如公之爲者也。故賊屯湖嶺六七年。不敢蹈西海一步地。南原旣陷。賊勢尤張。而猶狼顧不得逞者。?公是賴。至若露梁之戰。大戰而又大勝。臨陣殞命。卒以身殉國。公死而賊亦退。其後朝廷論平賊功。以公爲元勳。追賜宣武功臣號。贈官至左議政。立忠愍祠於露梁以祀之。公諱舜臣字汝諧。牙山人。公平居循循雅飾如儒士。及其臨難討賊。決策出奇。雖古名將不能過。而忠義奮發。有可以貫日月而感鬼神者。是以所在克捷。威?隣敵。義動中國。若公者乃古所謂眞將軍可屬大事者。非專以一時取勝爲可貴也。其行己之大方。用兵之大略。國史及他銘述備矣。不少過鳴梁。觀公戰地。慨然太息。彷徨久之。想見其爲人。今南人立石於其地。使來謁銘。義不敢辭。遂略序其舊聞。系之以詞。詞曰。
鳴梁口兮隘而束。海潮蹙兮兩峽。兵因地兮利出奇。群醜兮勢莫支。士卒奮兮鼓方震。俄殲賊兮蕩餘燼。惟將軍兮勇義俱。扼海道兮海無虞。怒濤擊兮蛟鯨趨。觀戰地兮想英謨。靈皇皇兮赫海。呵星辰兮走風雷。海不竭兮石不。昭壯烈兮耀無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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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읍지」해남군읍지 누정조
忠武公李舜臣鳴梁大捷碑在前水營東門外 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李敏敍撰
萬曆二十五年丁酉 統制使李公統舟師追舟於珍島地碧波津下 大破日本賊於鳴梁之口 賊由是大? 不敢窺海右逼湖圻 其明年賊遂罷兵 世謂中奧戰功 公爲第一 而鳴梁之戰最奇云 蓋公初以全羅左水使 聞賊至慷慨誓衆 進兵於嶺南界中 邀擊沿海賊 初戰於玉浦 再戰於康浦 復戰於固城之唐項浦 皆以小擊衆 殺賊無數 卒乃大捷於閑山 威振海隅 乃進拜統制使 悉摠三道舟師 仍屯閑山數歲 賊亦不敢復?海路 至是賊再至大 擧懲前之敗 畜憾專力 欲衝海道直上 時公被誣逮 命以白衣從元帥 俄復授舊職 於是元均已代公 大出兵迎賊 軍遂陷 盡喪其舟師器械蓄積而閒山已陷矣 顧公乘敗之後 無兵可戰 間關走海上 稍收亡卒 得戰艦十餘 遂進?鳴梁 賊至者樓櫓蔽海 公督諸將進船 當海之溢口 連下碇 截中流待賊 鳴梁地迫狹 潮方盛水益急 賊從上流乘潮掩之 勢若山壓 士卒無生意 公意氣益勵 乘機奮擊 將士皆殊死戰船出入如飛 砲火四起 海水盡拂 賊船焚燒撞碎 沈溺死者不可勝數 賊遂大敗遁去 始戰方 巨濟縣令安衛少却 公立船頭大喝 (命左右)取衛頭 衛懼還入疾戰 是日破賊船五百 斬其將馬多 時南民避賊從公者百餘(船) 未戰公令分船泛船爲疑兵 及戰船上觀者皆失色 謂公兵少當沒 及賊退戰息 見我舟屹然無恙 皆大驚爭來賀 自是軍聲復大振 夫自李鎰 申砬破後 官軍及義軍 遇賊輒奔潰 無敢略(齟齬)其鋒者 及天子遣大兵來救 大震殲 次第復三都 然後我軍稍稍角之 如延安幸州之捷 雖一時稱雋 然皆籍天兵威重 僅能城拒守得全 未有?當一面戰全勝如公之爲者也 故賊屯湖嶺六七年 不敢蹈西海一步地 南原旣陷 賊勢尤張 而猶狼顧不得逞者 緊公是賴 至者露梁之戰 大戰而又不(大)勝 臨陣殞命 卒以身殉國 公死而賊亦退 其後朝廷論平賊功 公以爲元勳 追 贈宣武功臣號 贈官至左議政 立忠愍祠於露梁以祀之 公諱舜臣字汝諧 牙山人 公平居循循雅飭如儒士 及其臨亂討賊 決策出奇 雖古名將不能過 而忠義奮發 有可以貫日月而感鬼神者 是以所在克捷 威攝隣賊 義動中國 若公者乃古所謂眞將軍可屬大事者 非專以一時取勝而爲可貴也 其行己之大方 用兵之大略 國史及他銘備述(述備)矣 不少過鳴梁 觀公戰地 慨然太息 彷徨久之 想見其爲人 今南人立石於其地 使來謁(銘)求銘 義不敢辭 遂略敍其舊聞 係(系)之以詞 詞曰 鳴梁之口兮隘而束 海潮蹙兮洞兩峽 兵因地兮利出奇 群醜兮勢莫支 士卒奮兮鼓方震 俄殲賊兮蕩餘燼 惟將軍兮勇義俱 扼海島兮海無虞 怒濤激兮蛟龍超(蛟鯨趨) 觀戰地兮想英謨 靈皇皇兮赫海隅 呵星辰兮走風雷 海不渴兮石不 昭壯節兮耀無極矣
廣巖岩下有 牧使尹行別業遺祉 其後士人金?齡作 亭於此扁 以廣巖齋棲息焉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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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비 국역문
유명조선국 통제사 증시 충무공 명랑대첩비 자헌대부예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 이민서(李敏敍,1633~1688)가 짓고,
보국숭록대부 행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쓰고,
숭정대부 지돈녕부사 겸 지경연사 동지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전자(篆字)를 쓰다.
만력25년(1597) 정유 9월에 통제사 이공이 해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 아래 진을 치고 왜적들을 명량어귀에서 산산이 무찌르니 적들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패하여 감히 전라도를 엿보거나 경상도 충청도를 건드려 보지 못하다가 그 이듬해에 적이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세상사람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로는 공을 으뜸이라 하고 또 울도 싸움이 가장 신기 하였다고 이른다.
공이 일찍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왜적들이 침략해 왔다는 말을 듣고 강개하여 부하들과 맹세하며 영남 쪽으로 진군하여 바다의 적군들을 무찔렀는데 처음 옥포에서 싸우고 다음 당포에서 싸우고 다시 고성 당항포에서 싸우되 언제나 적은 군사로 많은 적군을 무찔러 죽이기 얼마인지 모르더니 마침내 한산바다에서 크게 이기자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쳐 통제사로 삼도 해군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다.
눌러 한산 섬에 몇 해를 머무르매 적들이 감히 다시 침범하지 못 하드니 이때에 이르러 왜적들이 또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들어와 지난날 패한 일을 거울삼아 분을 머금고 기를 쓰며 바다를 해쳐 바로 올라서려는 것이었다.
그 때 공은 바야흐로 모함을 입어 잡혀갔다가 특명으로 평복을 입고 도원사를 따르더니 이윽고 다시 복직이 되었는데 이 때는 원균이 이미 공을 대신하여 많은 군사로 왜적과 싸우다가 마침내 져서 군사와 무기와 군량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섬도 벌써 무너진 뒤였다.
어허! 공은 허물어진 뒤를 이어 싸울 군사조차 없으므로 간신히 바다 길을 헤매어 겨우 얼마 안 되는 패전한 군사를 주워 모으고 전선 10여 척을 거두어 드디어 명량을 억눌렀다. 적의 배들이 바다를 덮어 오는지라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바다로 나가기를 재촉하고 좁은 목에다 뱃머리를 잇대어 닻을 내리고 흐르는 바다 중간을 끊어 적들을 기다렸다.
명량은 목이 좁은데다 조수는 마침 들어와 물결이 더욱 빠른데 적군들이 상류 쪽으로 조수 따라 덮쳐오니 형세는 마치 산이 누르는 것 같아 우리 군사들은 풀이 죽으므로 공은 기운을 더욱 돋우고 기회 따라 쳐부수게 하니 장수들은 죽기를 맹세하였다.
전선은 나는 듯 나들고 대포는 사방에서 터지며 바다 물은 뒤끓는데 적선은 불타고 깨어져 물에 빠져 죽는 자 이루 셀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적들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처음 싸움이 한창 어울렸을 때 거제현령 안위가 뒤로 물러남에 공은 뱃머리에 서서 큰소리로 안위의 목을 자르라 호령하니 안위도 두려워 되돌아들어 날쌔게 싸워 이날 적군의 배를 쳐부순 것이 오백 척이요,
그 장수 "마다시"의 목도 베었다. 그 때 남도백성들로 적을 피해 공을 따르는 배가 백여 척인데 싸우기 전에 공은 그 배들을 바다에 벌려 세우고 싸우는 배처럼 꾸미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배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얼굴빛이 질리며 공은 군사가 적으매 응당 패하리라 걱정하였더니 적이 물러가고 싸움이 끝난 뒤에 우리 전함들이 그냥 우뚝 아무 탈 없음을 보고는 모두 경탄하며 달려와 치하하니 이로부터 우리 해군의 위세가 또 다시 크게 떨치었다.
저 이일 신립이 패한 뒤로는 관군과 의병들이 적을 만나는 대로 무너지며 적들의 칼날에 맞설 길이 없더니 명나라에서 많은 군사를 보내주어 크게 깨트리니 세 도성도 차례로 수복되고 거기 따라 우리 군사들도 좀 버틸 수가 있었다.
연안 행주의 승첩은 비록 한때 훌륭했다고 하나 모두 명나라 군사의 힘을 빌어 겨우 성을 지키고 적을 막았을 분인데 제 힘으로 혼자 한 방면을 당해 내어 모조리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공만이 한 일이다. 그래서 적들이 호남 영남에 진치고 있은 지 예닐곱 해에 감히 서쪽 바다는 한 걸음도 밟아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남원이 무너짐에 따라 적의 기운은 더욱 세어졌건 만은 그래도 뒤가 무서워 제 뜻대로 다 못했던 것도 어허~ 공 때문이었다. 노량싸움에 이르러서는 크게 싸우고 또한 크게 이기었으며 진중에서 운명하여 마침내 몸을 나라에 바치었고 공이 돌아가시자 적도 또한 물러갔다.
그 뒤에 조정에서 적을 평정한 공로를 의논할 제 공으로써 으뜸을 삼아 선무공신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 벼슬을 주고 노량에 충렬사를 세워 제사하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이요, 자는 여해, 덕수인이다. 공은 평소엔 차근차근하여 단아한 품이 마치 선비와 같았으나 전쟁에 다 달아 적을 무찌름에 있어서는 계책을 냄이 신기하여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이에서 더 할 수 없었으며 또 늠름한 충의는 저 해와 달을 꿰고 귀신까지도 감동하게 함이 있었다.
가 있는 곳은 반듯이 승첩이 있었으며 위엄은 왜적들로 하여금 무서워 떨게 하였고 의기는 중국을 흔들었나니 공과 같은 이는 그야말로 옛부터 일러오는 "참장군"이라 가히 큰일을 맡을만한 분이요, 다만 한 때의 승리를 들어 훌륭하다고 논할 것만은 아니다.
그의 모든 행적과 군사 거느리던 일들은 역사의 몇 많은 사람의 기록에 적어 있거니와 내가 젊어 명량을 지나다가 공의 싸우던 터를 보고 하염없이 한숨쉬며 오래 거닐면서 그의 인격을 상상하여 본 일이 있었던 바 이제 남도 사람들이 그곳에 돌을 세우고 거기에 새길 글을 청하는지라 의리에 감히 사양할 길 없어 드디어 옛날에 들은 이야기를 대강 적고 노래를 이어 붙인다. "울돌목이여 좁을러라 조수 벅참이여 두 골 새로 빠지도다.
군사들 날램이여 북소리 울리는데 적을 무찌름이여 남김없이 휩쓸도다.오직 장군이여 의와 용맹 갖추시니 바다길 억누름이여 걱정이 끊이도다.성난 물결 덮침이여 용과 고래 달리는데 싸움터 바라봄이여 영특한 재주 그리도다.넋이 갸륵하심이여 한 바다에 번듯하매 별들을 꾸짖음이여 바람우뢰 일구도다.바다 아니 마름이여 돌도 아니 삭을진저 장한 공적 밝히어 그지없이 빛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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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비
◈보물 제503호
◈명 칭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9.06.16
◈소 재 지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186-7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이충무공유적보존회
◈관 리 자 .
◈설 명 : 임진왜란(1592∼1598)당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곳은 옛 조선시 대의 우수영(右水營)이며, 강 건너 바로 앞이 진도를 바라보는 해남의 남쪽 끝 해안지역이다.
일제 시대에 경복궁에 옮겨졌던 것을 1947년에 다시 옮겨 세웠다. 이 석비는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꽂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 선조 30년(1597)이순신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비문은 1686년에 쓰여졌으나 비가 세워진 것은 2년 뒤인 1688년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하였다
이 비는 조선(朝鮮) 선조(宣祖)30년(1597)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진도(珍島)벽파정(碧波亭 ) 아래서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右水營)에서 진도(珍島) 사이의 해협의 급류를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일본(日本)의 대선단(大船團)을 격파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 공을 기념한 것으로 숙종(肅宗) 14년(1688) 3월 이곳 동외리(東外里)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는 그후 일제시(日帝時)일인(日人)들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어 경복궁(景福宮)에 옮겨졌던 것을 1947년에 이곳에 다시 옮겨 세우고 비각(碑閣)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문화재청/문화재정보>
제목은 전서체이고, 그 외는 해서체로 명량대첩비의 비문을 지은이는 이민서(李敏敍)이고, 글쓴이는 박정영(朴正英)으로 숙종 14년(1688). 3월에 전라우수사 박신주(朴新胄)의 감독하에 이 비가 세워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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