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삼한산두비(三韓山斗碑)

야촌(1) 2014. 7. 6. 21:31

심양=조선일보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중국 요녕성(遼寧省) 심양시(沈陽市) 중심가에서 20여㎞ 떨어진 화평구(和平區) 경새로(競賽路)에는 3년제 직업대학인 ‘요녕발해전수학원(遼寧渤海專修學院)’이 있다. 지난 1992년 설립된 이 대학 교정에는 다른 대학에서 보기 힘든 ‘삼학사 유적비’가 서 있다.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다 청(淸)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분을 말한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조선은 단군이 처음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했다.”

 

유적비는 높이 1.5?, 폭 60㎝ 크기로, 전면 맨 위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란 글자를 새겨놓았고, 그 아래에는 삼학사의 행적을 기리는 1000여자의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또 뒷면에는 이를 한글로 풀이한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척화의 수괴’로 지목된 삼학사가 심양에 끌려와 청조의 온갖 회유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이듬해(1637년) 3월 소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아 죽은 사실이 적혀있다. 당시 청 태종은 비록 삼학사를 죽였지만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 백성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삼한산두’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이다.

발해학원 교정에 세워진 유적비는 사실은 진본이 아니다. 진본은 대학 구내에 마련된 삼학사비 자료실에 두동강이 난채로 보관돼 있다. 

 

유적비가 조성된 것은 1935년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70년이나 더 된 비문이 어떻게 18년 역사의 발해학원에 보관돼 있는 것이며, 또 두동강이 나게 된 것일까. 먼저 병자호란이 발발한 400년전으로 돌아가보자.

 

1616년 중국 동북지방에는 만주족이 중심이 된 후금(後金·청)이 들어선다. 후금과 조선은 광해군이 유연한 외교정책을 편 덕분에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후임인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함)’을 표방하여 후금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에 금은 1627년 1차 조선원정[정묘호란]을 개시해 개성을 점령하고 조선으로부터 ‘형제지국’의 맹약을 받아낸다.

 

그후 후금이 명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전비와 병력을 요구하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격하할 것을 강요하자, 인조는 이를 거부하고 항전의지를 굳힌다.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를 하는 인조

 

홍타이지(태종)는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그해말 1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 원정길[병자호란]에 오른다. 변방부대의 무능함으로 청군이 압록강을 넘은 사실을 4일 뒤에야 안 인조는 화급히 수비부대를 편성해 보지만 파죽지세로 밀고오는 청군을 막지못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된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인조는 1만3000의 병력으로 저항하였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사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화친파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1월30일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하게된다.

 

전승을 기리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삼전도에 남긴 청군은 삼학사를 인질로 잡아가 끝내 죽였으나, 청 태종은 이들의 절개를 높이 사 사당과 비석을 세운 사실이 청대의 야사인 ‘질사(?史)’란 책에 실려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삼학사비를 찾아나선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흐른 뒤 만주에 살던 조선족 동포와 삼학사 후손들이었다. ‘삼학사 유적비’는 이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사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수 없었다. 마을의 고로에게 물어보니 심양성 서문밖 세분이 순절한 곳 곁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분 절사를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保靈寺) 근처이다. 

 

얼마 안있어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 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삼두’ 넉자가 찬연하니 질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후손들은 비신(碑身)을 찾지는 못했지만 비액을 기초로 하여 비석을 복원한 뒤 심양 춘일(春日)공원 양지바른 곳에 세웠다. 중수비 맨 아래에는 ‘이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1935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라고 내역을 적고 있다.

 

영원히 땅에 묻힐 뻔한 삼학사의 정신을 후손들이 살려낸 것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복원한 이 비석마저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비석은 두 조각이 나 혼하((渾河)에 버려져 소실되고 만 것이다.

 

 

<지난 2005년 계룡건설 이인구 회장(오른쪽에서 5번째) 일행이 심양 발해대학 구내에 세운 학사정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앞줄 왼쪽에서 5번째가 삼학사비를 찾은 천문갑 교수(별세)이다./사진=계룡건설 제공>

 

훗날 이를 알고 비석을 찾아나선 요녕대학의 천문갑 교수[훗날 발해학원을 세웠으나 2009년 위암으로 별세]는 중국인의 집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5000위안을 주고 구입하였다가,

 

지난 2005년 한국의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 등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학 구내에 원비문은 보관하고, 이를 모조한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회장은 발해학원 구내에 학사정도 세웠다. 이곳 비석과 똑같은 비석이 지난 2005년 독립기념관에도 세워져, 만주를 떠돌던 삼학사의 혼백은 370여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