墓誌銘, 墓碑文, 墓碣文, 墓表에 對하여
1. 묘지명(墓誌銘)
지(誌)는 기록한다[記]는 뜻이고 명(銘)이란 이름 하는 것[名]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덕이 있거나 선이 있거나 공렬이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알 릴 만 한 경우에는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물(器物)을 만들고 거기에다 명을 새겨서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이를테면 채중랑(蔡中郞)의 문집(文集)에 수록되어있는 주공숙(朱公叔)의 정명(鼎銘)이 그것이다. 한(漢)나라 두자하(杜子夏)에 이르러 처음으로 글을 새겨 묘소의 곁에다 묻음으로써 드디어 묘지(墓誌)가 있게 되었는데, 후세사람이 이것을 따랐다.
대개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죽은 날, 장사한 날과 그의 자손들의 대략을 기술하여 돌에다 새기고 덮개를 덮어서 광(壙) 앞 석자[尺] 되는 곳에 묻어서 훗날 능곡(陵谷)이 변천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으니, 지명(誌銘)이라고 했을 경우 그 사용한 의도가 심원하고 옛 뜻에도 저해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문사(文士)의 손을 빌어 오늘날에 신뢰받고 후세에 전하겠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미화한 자가 이따금씩 있었으니, 글은 비록 같지만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반듯한 사람에게 쓰게 한다면 필시 사정(私情)에 치우쳐 남들을 따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을 가지고 논하면, 묘지명(墓誌銘)이라고 한 경우는 지(誌)도 있고 명(銘)도 있는 경우를 말하며, 묘지명 병서(墓誌銘幷序)라고 한 경우는 지도 있고 명도 있는 상태에서 또 앞에 서(序)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지명(誌銘)이라고 하였으나 지만 있고 명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만 있고 지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별체(別體)이다.
묘지(墓誌)라고 한 경우에는 지만 있고 명은 없으며, 묘명(墓銘)이라고 한 경우에는 명은 있고 지는 없다. 그러나 또 오로지 지(誌)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명(銘)이 있는 경우도 있고, 오로지 명이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지가 있는 경우가 있으며, 또 제목은 지라고 하고서 내용은 명인 경우가 있고, 제목은 명이라고 하고서 내용은 지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모두 별체이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가 매장[權厝]한 경우를 권조지(權厝誌) 또는 ‘아무의 빈에 쓰다[誌某殯]’라고 하고, 후장(後葬)을 하면서 재차 쓰는 지문(誌文)인 경우에는 속지(續誌) 또는 후지(後誌)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죽어서 귀장(歸葬)하는 경우에는 귀부지(歸祔誌)라고 하고, 다른 곳에다 장사하였다가 뒤에 천장(遷葬)하는 경우에는 천부지(遷祔誌)라고 한다.
덮개에다 새기는 것을 개석문(蓋石文), 벽돌에다 새기는 것을 묘전기(墓磚記) 또는 묘전명(墓磚銘)이라 하고, 목판에 쓰는 것을 분판문(墳版文) 또는 묘판문(墓版文)이라고 한다. 이 밖에 장지(葬誌), 지문(誌文), 분기(墳記), 광지(壙誌), 광명(壙銘), 곽명(槨銘), 매명(埋銘)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불가에서는 탑명(塔銘)이니 탑기(塔記)니 하여 모두 20개의 제목이 있는데, 혹은 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혹은 명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이것은 모두 지명(誌銘)의 별제(別題)이다.
그 문체는 정체(正體)와 변체(變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체는 사실만을 서술하고, 변체는 사실을 서술하고 의논을 덧붙인 것이다. 또 순전히 야(也) 자만 써서 단락을 삼는 경우도 있고 허위로 지문(誌文)을 짓고서 명(銘) 내에 비로소 사실을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도 모두 변체이다.
명(銘)의 체(體)로 말할 것 같으면 삼언(三言), 사언(四言), 칠언(七言), 잡언(雜言), 산문(散文)이 있고, 문구 가운데에 혜(兮) 자를 사용하는 것도 있고, 맨 끝에다 혜(兮,어조사혜)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맨 끝에다 야(也)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운자(韻字)를 쓰는 데도 한 구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두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세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앞에는 운자를 사용하고 끝에는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앞에는 운자가 없는데 끝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한 편 안에 이미 운자를 사용하고 한 장(章) 안에서 또 각각 따로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 구절씩 걸러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어조사에 운을 두는 경우가 있고, 한 글자를 한 구절씩 건너 거듭 사용하여 스스로 운자로 삼는 경우가 있고, 전체 다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운자를 바꿀 경우에 두 구절마다 한 번씩 바꾸는 경우도 있고 전편에 걸쳐 바꾸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각 편중에 섞여 나온다.
2. 묘비문(墓碑文)
옛날에는 장사지내는 데, 풍비(豐碑)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서 곽(槨)의 앞과 뒤에다 세우고 그 가운데를 뚫어서 녹로(鹿盧)를 만든 다음 동아줄을 꿰어 하관하는 것이다.
한(漢)나라 이후로 죽은 자의 공업을 맨 처음에는 그 위에다 새기던 것을 점점 바꾸어서 따로 돌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유협이 이른바 “원래 종묘에 세워졌던 비(碑)가 무덤에도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시기에 처음으로 신도비(神道碑)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개 풍수가(風水家)들이 동남쪽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그곳에다 비를 세웠던 것인데 이것을 인하여 이름을 삼은 것이다.
당(唐)나라 비의 제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5품(品) 이상인 관원만 사용하였는데, 근세에는 높이와 너비에 각각 차등을 두었으니 제도가 세밀해진 것이다. 대체로 장사를 치른 자가 지(誌)를 만들어서 유택(幽宅)에다 보관하고 나서 또 비(碑)나 갈(碣)이나 표(表)를 만들어 밖에다 내걸었던 것은 모두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차마 선조의 덕을 은폐시키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 문체가 문(文)도 있고 명(銘)도 있고 서(序)도 있는데, 혹은 사(辭)라고 하고 혹은 계(系)라고 하고 혹은 송(頌)이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모두 명(銘)을 이르는 것이며, 거기에는 또 정체와 변체가 있다. 불가와 도가에서 장례 지낼 때도 역시 비를 세워 참람스레 품관처럼 하였으니, 아마도 역대로 서로 인습에 젖어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금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 듯하다.
3. 묘갈문(墓碣文)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갈(碣)을 지었으니, 갈이 지어진 것은 진(晉)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唐)나라의 묘갈 제도를 보면 부석(趺石)은 네모나고 수석(首石)은 둥글었는데 5품 이하의 관원만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비와 갈을 본래 서로 통용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관직의 등급 문제로 인하여 그 명칭을 구분하였지만, 사실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문체도 비와 유사하다. 그러나 명(銘)이 있고 없고는 짓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다. 오로지 갈이라고만 하고서 도리어 명을 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까지 겸해서 말하고서 도리어 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지(誌)나 조(詔)처럼 확고부동한 표준을 내세울 수 없는 것들이다.
4. 묘표(墓表)
묘표는 동한(東漢)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원년(元年)에 알자(謁者)인 경군(景君)의 묘표를 세웠는데, 그 뒤로 계속 이어졌다. 그 문체는 비(碑)나 갈과 동일한데, 벼슬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다 쓸 수 있었으니 비나 갈에 등급의 제한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또 천표(阡表), 빈표(殯表), 영표(靈表)가 있는데, 대체로 천(阡)이란 묘도(墓道)를 말하며, 빈(殯)이란 장사하기 전을 지칭하며, 영(靈)이란 막 죽었을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으로부터 빈을 하고, 빈으로부터 묘를 쓰고, 묘로부터 천을 만들게 된다.
出典 : 林下筆記 1卷(李裕元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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