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고승호(高陞號) 사건-격랑의 청일전쟁

야촌(1) 2015. 8. 30. 21:28

▲고승호(高陞號): 격랑의 청일해전 전시관 입구.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2015년 8월 4일부터 10월 4일까지 고승호(高陞號): 격랑의 청일전쟁이라는 주제로 국립해양문화연구소와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공동주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고승호(高陞號)

 

고승호(高陞號)는 길이 72.6m로 2134톤을 적재할 수 있는 증기선으로써 1883년 청나라는 영국 배로우 조선회사에서 건조한 고승호를 4만 파운드에 임대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진압용 군사수송선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승호는 1894년 7월 25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경기도 안산 풍도 앞 바다에서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고 침몰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청일전쟁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세기 말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탈로 국력이 약해졌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대외 진출을 꿈꿨다. 청과 일본은 1885년 '조선에서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 한다'는 텐진 조약을 체결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지 못한 조선은 청에 군대를 요청했다. 

 

청이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군사를 보냈다. 고승호는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병사 1000여명을 싣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풍도 앞 바다에 숨어 있다가 고승호를 침몰시켰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의 야욕을 잘 보여주는 고승호 침몰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으며, 현재 일본과 중국, 영국, 프랑스 등에 관련 기록물이 전해오고 있다.

 

당시 고승호에는 청나라의 군자금으로 쓰일 은덩이와 은화가 600톤이 실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다에 가라앉은 군사수송선은 100여 년간 보물선으로 뒤바뀌었다. 이 때문에 고승호 보물소동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 그리고 근래까지 약 100년에 걸쳐 계속됐다. 

 

1920년 대부터 선실 안의 물품을 인양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2001년에도 민간에서 대규모로 유물을 인양했다.

 

-전시기간 : 2015년 8월 4일~ 10월 4일.

-전시장소 :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기획전시실.

-공동주최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출처 : 고승호 팜플렛

 

 

▲풍도해전과 고승호 침몰사건에 관한 설명문.

 

▲풍도해전으로 인하여 침몰하는 고승호.

 

▲고승호 침몰위치.

 

▲풍도해전에서 일본군의 대승리를 알리는 기록들.

 

▲풍도해전에 관한 독일인 "폰 한네켄'의 진술서.

 

▲청일전쟁 지도.

 

▲영국 상선 (코우싱호:高陞號)에 관한 설명문.

 

▲고승호 설계도면.

 

▲중국 수송선 고승호에 관한 설명문.

 

▲중국 수송선 '고승호'에 탑재된 무기류.

 

▲고승호에 탑재된 군자금과 생활용품.

 

▲근대의 두얼굴

 

▲근대의 두 얼굴에 관한 기록.

 

▲조선인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중국이 넘보고 있는 그림.

 

▲고승호의 생활용품.

 

▲1920년대~1930년대. 보물선에서 수중문화유산으로...

 

▲근대의 고승호에 관한 뉴스와 기록들.

 

 출처 : 봉구아재 사랑방.(http://blog.daum.net/life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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