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姜弘立)
[생졸년] 1560년(明宗 15)∼1627년(仁祖 5),
명나라의 요청(要請)으로 후금(後金)을 치고자 원병(援兵) 1萬 3千餘名을 이끌고 출병(出兵), 동가강(佟佳江, 지금의 혼강(渾江)에서 후금(後金)에 투항(投降)한 조선의 도원사(都元帥)이다.
[姓 名] 강홍립(姜弘立)
[生歿年] 1560(명종 15)∼1627(인조 5)
[本 貫] 진주(晋州)
[字] 군신(君信)
[號] 내촌(耐村)
[時 代] 조선중기(朝鮮中期)
[性 格] 문신(文臣)
1560년(明宗 15)∼1627년(仁祖 5),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자(字)는 군신(君信), 호(號)는 내촌(耐村)이다. 조부는 우의정(右議政) 강사상(姜士尙)이고 아버지는 참판(參判) 강신(姜紳)이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문신(文臣)으로, 장수(將帥)로서 1589년(宣祖 22)에 진사(進士)가 되고, 1597년(宣祖 30)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乙科(을과)로 及第(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1605년(宣祖 38)에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1608년(光海君 元年)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고,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614년(光海君 6)에 순검사(巡檢使)가 되었고, 1618년(光海君 10)에 진년군(晋寧君)에 봉(封)하여지고, 도원수(都元帥)·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는데, 재차(再次)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을 청(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그 해 명(明)의 요청(要請)으로 후금(後金)을 치기 위(爲)하여 원병(援兵)을 내게 되자,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萬 3千餘名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출정(出征)하였다.
그 무렵 후금(後金)이 명(明)의 변경(邊境)을 침범(侵犯)하는 등(等) 세력(勢力)을 떨치자, 명(明)은 후금(後金)을 치기 위(爲)하여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청(請)하여 왔는데, 조선(朝鮮)은 새로 일어나는 후금(後金)을 의식(意識)하면서도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명이 원병(援兵)을 보내왔으므로 명의 용청(要請)을 거절(拒絶)할 수 없었다.
이듬해 조선(朝鮮)의 원병(援兵)은 관전(寬甸) 방면(方面)에서 명(明)의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대(軍隊)와 합류(合流)하여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向)하여 적(敵)을 치기로 하였으나, 부차(富車)에서 패배(敗北)를 당(當)하여 그는 적(敵)에게 조선(朝鮮)의 출병(出兵)이 명(明)의 요청(要請)으로 부득이 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군사(軍士)를 이끌고 후금(後金)에 투항(投降)하였다.
이러한 투항(投降)은 출병전(出兵前)에
“형세(形勢)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定)하라”
는 광해군(光海君)의 명령(命令)에 의(依)한 것이라 한다. 이듬해 후금(後金)에서 조선인(朝鮮人)의 포로(捕虜)들을 석방(釋放)하였으나, 김경서(金景瑞) 등(等) 10餘名과 함께 억류(抑留)되었다가 1627년(仁祖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군(後金軍)의 선도(先導)로서 입국(入國)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和議)를 주선(周旋)한 뒤 국내(國內)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역신(逆臣)으로 몰려 관작(官爵)을 삭탈(削奪) 되였다가 사후에 복관(復官)되었다.
한편 오늘날 서울의 관악구(冠岳區) 실림7동(新林7洞)에 난곡(蘭谷)이라는 동네(洞內) 이름이 있는데, 이 동명(洞名)은 강홍립(姜弘立)이 이곳에 유배(流配)되어 은거(隱居)하면서 난초(蘭草)를 많이 길렀다는 것에서 유래(由來)되었다고 한다.
그 뒷산 신림3동(新林3洞)과 신림7동(新林7洞)의 경계(境界)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 일문(一門)의 묘역(墓域)이 있고, 원래 난곡초등학교(蘭谷初等學校) 운동장(運動場) 자리에 있던 강홍립(姜弘立)의 며역(墓域)도 1970년 난곡초등학교(蘭谷初等學校) 신축(新築)에 따라 진주강씨(晉州姜氏) 묘역(墓域)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조선후기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양수투항도./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사진가 권태균>
↑도원수 강홍립 묘
오늘날의 서울 관악구 신림동 난곡초등학교 운동장에 묘역이 있었으나 난곡초등학교의 설립
신축으로 1970년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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