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정도전(鄭道傳)

야촌(1) 2015. 3. 7. 18:11

정도전(鄭道傳)

[생졸년]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요 학자로,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운경(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생애]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 :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文德曲)>·<몽금척(蒙金尺)>·<수보록(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활동사항]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 經濟議論》·《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 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삼봉집(三峰集)』

『해동잡록(海東雜錄)』

『대동기문(大東奇聞)』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도전(鄭道傳)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

「정도전(鄭道傳)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

「정도전(鄭道傳)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

「정도전(鄭道傳)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

「三峰集編刊考」(末松保和, 『朝鮮學報』 1, 1951)

 

 

↑문헌공 삼봉정도전선생 영정

  ◇제작년도 : 1994년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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