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산집(響山集) 제13권 > 묘갈명(墓碣銘)/이만도(李晩燾, 1842~1910) 著
절충장군 충무위대호군 이공 묘갈명 병서
(折衝將軍 忠武衛大護軍 李公 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광연(光然), 자는 실보(實甫)이다. 울산 이씨(蔚山李氏)는 고려 말 휘 춘년(椿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조선에 복종하지 않아 서리(胥吏)로 강등되었다. 휘 예(藝)는 포로가 되어 왜국(倭國)으로 끌려갔다가 굴복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며, 이후 일본과 유구국(琉球國)에 열세 차례나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의 포로들을 쇄환(刷還)하였으므로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칭찬하였다. 관직은 중추원 동지사(中樞院同知事)에까지 이르렀다.
이분이 휘 종실(宗實)을 낳았으니, 경상도 수군절도사로서 대마도(對馬島)를 세 번이나 정벌하였다. 6대를 내려와 휘 한남(翰南)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유원 첨사(柔遠僉使)를 지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된 휘 천기(天機), 생원 휘 동영(東英), 혜산 첨사(惠山僉使) 휘 시강(時綱)이 공의 3대 선조이다.
첨사는 영천 최씨(永川崔氏) 수방(秀邦)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 호조 참판으로 추증된 아우 시찬(時纘)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니, 바로 공이다. 공의 생모는 회덕 황씨(懷德黃氏) 연(綖)의 따님이다.
공은 명릉(明陵) 임신년(1692, 숙종18)에 태어났다.
갑진년(1724, 경종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사년(1737, 영조13)에 절충장군의 품계에 올라 부호군 겸 오위장(副護軍兼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임술년(1742)에 혜산 첨사에 배수되었다.
정묘년(1747)에 웅천 현감(熊川縣監)이 되었다.
병자년(1756)에 함경도 남우후(咸鏡道南虞候)가 되었다.
원릉(元陵 영조) 신사년(1761) 12월 24일 충무위 대호군(忠武衛大護軍)으로서 세상을 떠나니, 말릉(秣陵)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정씨(鄭氏)를 부좌(祔左)하였는데, 연일 정씨(延日鄭氏) 식(湜)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다. 여규(汝圭), 여숙(汝塾), 여기(汝基)이다.
딸 셋은 조보신(曺寳臣), 이헌희(李憲熹), 곽내약(郭乃鑰)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단아하였고 의기(義氣)는 매서웠으며, 강물이 터지고 물결이 내달리듯 한 언론(言論)과 옥처럼 깨끗하고 얼음처럼 맑은 마음을 지녔다. 이 때문에 높은 벼슬에 드나들면서도 친한 자가 드물었다.
그러나 간성(干城)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은 시대가 태평했기 때문이니, 국가의 행복이요.
실로 공의 행복이기도 하였다. 공을 알아주었던 이는 권강좌(權江左), 정명고(鄭鳴皐), 박영성(朴靈城) 등이었다.
공은 〈웅천시(熊川詩)〉에서,
쾌마를 내달려 높은 산에 오르니 / 奔馳快馬陟崔嵬
발아래 푸른 바다 만리에 펼쳐졌네 / 脚下滄溟萬里開
가슴속에 여덟아홉 개를 삼켰단 말 이제야 깨닫겠나니 / 始覺胷中吞八九
다시금 동자 불러 한 잔 가득 올리라 했네 / 更呼童子進深盃
하고 읊은 바 있다.
지금 이 시를 음미해 보건대, 그 늠름하고 씩씩한 기운은 마치 벽상(壁上)에서 포공(褒公)과 악공(卾公)을 마주한 듯하니, 또한 ‘공의 기상은 어떤지 모르겠다.’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강한은 넘실넘실 거리고 / 江漢湯湯歟
낙수의 물결 세차게 흐르네 / 洛水泱泱歟
만약 고비를 생각하는 금상의 마음을 안다면 / 苟知今王鼓鼙之思者
응당 천고의 영웅을 다시 불러내어 / 當喚起千古英雄
우리의 〈채미장〉 노래를 듣게 해야 하리라 / 以聽我采薇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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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휘 예(藝)는 …… 돌아왔으며 : 이예(李藝, 1373~1445)의 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원래 울산군의 아전이었는데, 1396년(태조5) 울산군 지사(蔚山郡知事) 이은(李殷)과 함께 일본에 잡혀갔다가 그곳에서 이은을 잘 시종한 공으로 조선으로 돌아온 뒤 아전의 역을 면제받고 벼슬에 올랐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慶尙道 蔚山郡 人物》
[주02]권강좌(權江左) : 권만(權萬, 1688~1749)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일보(一甫), 강좌(江左)는 호이다. 1725년(영조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28년 정자(正字)로 재직 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조 때 창의(倡義)의 공을 인정받아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강좌집》이 있다.
[주03]정명고(鄭鳴皐) : 정간(鄭榦, 1692~1757)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도중(道中), 명고(鳴皐)는 호이다. 1725년(영조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그의 청덕(淸德)을 추앙하는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주04]박영성(朴靈城) : 박문수(朴文秀, 1691~1756)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봉호는 영성군(靈城君),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723년(경종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암행 어사로 활약했을 때의 행적이 설화로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05]가슴속에 …… 깨닫겠나니 : 가슴속에 운몽택(雲夢澤)을 여덟아홉 개나 삼켰다는 것으로, 포부가 웅대함을 일컫는다.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상림부(上林賦)〉에서 “초나라에는 칠택이 있다. 그중 하나인 운몽택은 사방이 900리인데, 운몽택처럼 큰 호수를 여덟아홉 개를 삼켜도 가슴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楚有七澤 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06]포공(褒公)과 …… 듯하니 : 포공과 악공(卾公)은 당(唐)나라 개국에 공을 세운 포국공(褒國公) 단지현(段志玄)과 악국공(鄂國公) 울지경덕(尉遲敬德)을 말한다. 두보(杜甫)는 〈단청인(丹靑引)〉에서 두 장군의 초상을 보고 “포공과 악공의 머리카락이 생동하는 듯하니, 영웅의 모습 늠름하여 격전 벌이고 오는 듯하네.〔褒公鄂公毛髮動 英姿颯爽來酣戰〕”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3》
[주07]강한(江漢)은 넘실넘실 거리고 : 이 구절은 이광윤이 무장(武將)이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시경》 〈강한(江漢)〉에 “강한이 넘실넘실 흐르니 무부가 굳세고 굳세도다.〔江漢湯湯 武夫洸洸〕” 하였다.
[주08]고비(鼓鼙)를 …… 마음 : 일제의 침략에 고민하는 고종(高宗)이 국난을 극복할 훌륭한 장군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비는 군중에서 사용하는 큰 북과 작은 북으로, 《예기(禮記)》 〈악기(樂記)〉의 “군주가 고비의 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君子聽鼓鼙之聲 則思將帥之臣〕” 한 데서 나왔다.
[주09]응당 …… 하리라 : 〈채미장(采薇章)〉은 《시경》에 수록된 시로, 국가가 환란을 당하자 임금이 백성들을 변방의 수자리로 보내고 이에 백성들이 기꺼이 응함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천고의 영웅이란 이광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으로 고통 받는 상황에서 이광윤 같은 장군에게 국가의 어려움을 구제해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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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折衝將軍忠武衛大護軍李公墓碣銘 幷序。
이만도(李晩燾) 찬(撰)。
公諱光然、字實甫。蔚山之李。肇自麗末諱椿年、仗義不屈、 降爲吏。諱藝、被虜入倭不服而還、後奉使日本 琉球、十三 度刷還上國俘。帝嘉獎之、官至中樞院事生。諱宗實、以慶 尙水軍節度使、三討馬島。六傳至諱翰南參宣武勳官、柔 遠僉使是於公爲高祖。贈掌樂正諱天機、生員諱東英、 惠山僉使諱時綱、三世也。僉使聘永川 崔秀邦女、無子、以 弟。贈戶參時纘子、子卽公也。生妣懷德黃氏綎女也。 明陵壬申公生、甲辰登武科、丁巳超陞折衝、除副護軍兼五衛將、壬戌拜惠山僉使。丁卯熊川縣監、丙子咸鏡南 虞侯、元陵辛巳十二月二十四日以忠武衛大護軍歿。 葬秣陵艮坐原。夫人鄭氏祔左。延日人湜女。三男、汝圭、汝 塾、汝基。三女、曺寶臣、李憲熹、郭乃鑰。孫曾以下不盡錄。公 天資端、雅義氣凌厲、河決川駛、言論也、玉潔氷澈、衿度也。 以是出入顯秩、薄遂其媾、而惟其未盡展拓於干城之用 者、時際太平、國家之福、實亦公之福也。知公者、權江左、 鄭鳴皐、朴靈城諸公也。然其熊、九詩曰、奔馳快馬陟崔嵬、 脚下滄溟萬里開、始覺胸中吞八九、更呼童子進湥盃。公 誦味之颯爽英姿、如對褒公鄂公於壁上、亦何可曰、不知 氣象乎。銘曰、江漢湯湯歟、洛水決決歟、苟知今王鼓聲之。思者、當喚 起千古英䧺、以聽我采薇之章。 <끝>
향산집 > 響山文集卷之十三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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