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산53-7
↑신숙주선생 영정
●신숙주(申叔舟)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덕린(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년(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해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문종 2)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며,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超拜)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誥命 : 임명장)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土田)·노비·안마(鞍馬)·의복을 함께 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방면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잦았는데, 그는 강경론을 펴 1460년에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였다.
그는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遺命 : 유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 서무를 참결(參決 : 참여하여 결정함.)하고, 같은 해 이른바 남이(南怡)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大統)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여러 나라의 음운(音韻)에 밝았던 그는 여러 역서(譯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館餽 : 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75년(성종 6)에 일생을 마쳤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할 정도로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사육신·생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道學的)인 분위기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대에서의 그의 정치적·학문적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그를 좋게 평가하는 표현으로는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 : 작은 절의)에는 구애되지 않았다.’든가,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을 열세 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 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배려는 외교·국방면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가 그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전하는 필적으로는 송설체의 유려함을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의 찬문(贊文)과 진당풍(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보한재집≫이 전하는데, 1644년(인조 22)에 7세손 숙(洬)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완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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