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한시(漢詩)

조령에서 이별하며 - 이시발

야촌(1) 2014. 11. 12. 18:34

선현들과 함께 넘는 문경새재

 

■ 조령을 지나며 김문오에게 시를 주어 이별하다.[過鳥嶺 。贈別金文吾

 

 

지은이 : 이시발(李時發)

 

同鄕同志來同幕(동향동지래동막) / 동향에다 동기로 같은 곳에서 일했거니

獨恨未同今日歸(독한미동금일귀) / 이제 오늘 함께 돌아가지 못해 아쉽네

紅葉滿山君莫羨(홍엽만산군막선) / 온 산에 가득한 단풍 그대 부러워 마시게

嶺梅千樹未應遲(령매천수미응지) / 고향의 천 그루 매화 얼마 뒤 꽃 피울 테니

 

출전 : 碧梧先生遺稿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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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인물소개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 :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양구(養久), 호(號)는 벽오(碧梧)이다. 1589년(선조2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애 류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형조참판, 함경도관찰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를 지냈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역사를 감독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저서로 『벽오집(碧梧集)』 8권 4책이 있다.

 

●김문오(金文吾)

    [생졸년] 1564년(선조 2) ~ 1621년(광해군 13)

 

  조선시대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문오(文吾), 호는 쌍매(雙梅). 할아버지는 김광우(金光佑)이고, 아버지는 성균박사 김응구(金應龜)이며, 어머니는 노경기(盧景麒)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등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지평(持平), 1612년 병조정랑에 승진하였다.

 

같은 해부터 장령(掌令)·사간·집의(執義)·교리(校理)·부교리 등 삼사의 관직을 번갈아 지내면서 대북정권이 추진한 정책의 관철에 앞장섰다. 1613년 겸보덕(兼輔德), 1616년 보덕이 되었으며 직강(直講)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의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선조의 옥책(玉冊)을 올릴 때 참여한 공로로 당상관에 승진하여, 1618년 여러 차례 승지에 오르고 판결사를 지내다가, 1621년 대사간·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죽었다.

 

 

↑이 詩는 조곡관(鳥谷關) 숲 약수터 앞 나무에 달려있다.

    조곡관(鳥谷關)은 경상북도 문경새재의 제2관문으로 지번 주소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42-36번지 이

    다.

 

 

 

 

조령산(鳥嶺山)

 

조령산(鳥嶺山, 1,017m)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곳의 고개를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하다 하여 ‘새재’라 하고 소위 ‘문경새재’라고 일컫으며 3곳의 관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영남지방에서 소백산을 넘어 서울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조선시대의 주요교통로였다.

 

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은 초곡성과 조령성 사이에 있다. 주흘관에서 3㎞ 거리이다.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조곡관’ 또는 ‘영남제2관’이라고 칭한다.

 

조곡관(鳥谷關)

 

조곡관은 세 관문 가운데 맨 처음인 1594년 임란 직후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발굴기록에 따르면 신라 때의 기와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새재가 고려 태조 때 열렸다고도 하고, 조선 태종 또는 세종 때 열렸다고도 하는 것은 꼭 그때 처음으로 길이 생겼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삼국시대부터 있던 길이요 요충으로 여겨져오던 곳이었지만, 한때는 그 중요성이 덜해졌다가 다시금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길이 열렸다’고 한 것일 듯싶다.


문루는 1975년에 복원한 것으로 옛 이름은 ‘조동문’(鳥東門)이었지만 지금은 ‘조곡관’(鳥谷關)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높이 4.5m의 석성이 관문 동쪽으로 400m, 서쪽으로 100m 가량 뻗어 있다. 석성 너머로는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과연 일당백의 요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발 380m로, 생각보다 그리 높지는 않다.

 

오른쪽에 연결되는 산줄기의 최고봉이 1,106m 높이의 주흘산 주봉우리이고, 왼쪽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1,017m의 조령산이다. 그러나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정작 길에서는 산봉우리가 잘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조곡관 동쪽의 산세는 조곡계곡으로 뻗어나가는데, 그 등성이를 따라 5㎞쯤 가면 주흘산에 이른다.

 

이 조곡관의 동쪽으로 ‘어류성’(御留城)의 존재를 알리는 팻말이 보이는데, 고려 태조 10년(927) 7월 초에 태조 왕건이 이곳에 와서 당시 이 지방 호족이었던 고사갈이성의 성주 흥달의 귀순을 받았다고 전해오는 곳이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