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한시(漢詩)

韓國의 風流思想과 自然派 詩歌文學

야촌(1) 2015. 2. 5. 15:38

韓國의 風流思想과 自然派 詩歌文學


― 시조 ․ 가사에서 청록파 까지

 

1. 풍류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풍류(風流)라는 말은 무슨 뜻으로 쓰였을까!?

바람풍과 물흐를류.바람과 물의 뜻에서 연유된 바람과 물은 곧 자연의 총칭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 자체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풍류가 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노니는가 그것이 중요한 핵심이 되어 있다.

따라서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것, 운치가 있는 일, 아취가 있는 일, 속된 것을 버리고 고상하게 노니는 것 등의 뜻을 가지고 쓰였음을 보게 된다.

 

다른 면에서 보게 되면 풍류는 풍속의 흐름의 뜻을 담아 일종의 문화행위로 보는 바 풍류 풍월 음풍농월(吟風弄月) 의 시적 아취와 연결 시를 감상하고 시를 짓는 일과 연결시켜 자연파 문학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령 가사의 효시로 보는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옛 사람 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가
天地間 男子몸이 날만한이 하건마는
山林에 묻쳐 이셔 至樂을 모를것가
數間茅屋을 碧溪水 앞에 두고
松間 鬱鬱裏에 風月主人 되여셔라


이 대목에 風流라는 말과 風月主人이란 말이 나와 있다. 풍류라는 말이 음풍농월 풍월 시짓는 뜻으로 쓰였음을 입증한다. 그는 종구에 가서 다음과 같이 결사를 맺고 있다.


功名도 날 씌우고 富貴도 날 씌우니
淸風明月 外에 엇던 벗이 잇사올고
簞瓢陋巷에(도시락밥과 바가지물을 마시며 누추한시골에서 산다는 뜻. 흔히 청빈낙도의 표본으로 쓰이는 숙어이다.)
흣튼 혜음 아니하니
아모타 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공명도 부귀도 날 꺼리니 淸風과 明月을 벗삼아 도시락 밥과 바가지 물을 떠마시며 청빈낙도를 벗하여 한평생 즐기겠다는 소회를 읊고 있다. 자연을 벗삼아 그 속에서 시짓고 청빈낙도를 즐기는 것이 풍류적 삶이라는 뜻이다.


기타 풍류사상을 부루의 한자표기로 보고 불 밝 환 한울을 나타내는 光明世上 光明理世하는 한울님 사상 즉 배달사상과(倍達 이라는 한자표기는 붉다라는 고어에서 붉달민족 ‘붉’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단군시대 환웅사상은 태양족으로서 밝음을 숭상한 민족이었다.

 

백의민족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연결지어 보려는 시도도 있고 장차 외국에서 들어온 유 ․ 불 ․ 선 삼교와 만나 종교적 철학적 의미가 가미됨으로써 어느 것은 불교의 극락정토 사상과 어느 것은 도교의 신선사상과(한국화 같은데서 잘 나타나는 신선도나 도인의 그림이 이와 같은 근원을 갖고 있다.)

 

연결되어 더욱 심오해진 면도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자연과 인생과의 어울림 속에서 시조나 가사로 발전하여 장차 한국의 자연파 문학의 근저가 됨을 근간으로 하여 논고를 전개하고자 한다.


일찍이 여말의 나옹 화상은(瀨翁은 고려 공민왕때(1320~1376) 王師. 지공․무학과 함께 3대화상. 서왕가(西往歌) 낙도가(樂道歌) 심우가(尋牛歌)를 지었다함. 서왕가는 가사의 효시라고함.) <서왕가>나 <청산가> 같은 시가를 통해 불교적 교화를 목적으로 한 시가를 읊은바 훗날 구전된 그 가사가 국문표기로 전해온바 있었다.

 

「청산은 말없이 살라하네. 유수는 태없이 흐르라 하네.」

가요로도 불리우는 이 가사는 시조의 근원도 느껴지는 바 불교의 계송이 시조창으로 발전 하는 모습을 짐작케 한다. 서왕가 역시 불경을 언해한 듯한 우리말 가락으로 대중교화에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천경만론을 낫낫치 추심하야
육적을 자부리리라 허공마를 빗기타고
마야검을 손에 들고 오온산을 드러가니
제산은 첩첩하고 사상산이 더욱 높다


4.4조나 3.4조의 율조로 나아가려는 가락과 우리말 가사의 원형을 봄직하다 하겠다.

여말의 시조 발생과 함께 이러한 국문시가에 대한 욕구는(고려시대의 구비문학은 우리말로 시가를 짓고자하는 욕구가 증대한 것이며 한자로는 진정한 우리의 정서를 노래할 수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러한 욕구가 결국 훈민정음을 제정한 것이다.) 장차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우리 시가로 정착의 기회를 만나 한문이나 그에 대한 차용문자 시대가 가고 구전문학의 국문표기 정착문학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2. 여말의 정치적 풍운과 시조의 발생


고려조의 무신 정치는 문신의 낙향이나 불우한 낙백으로(무신정치로 쫓겨난 문신들은 임천에 은거하여 시회를 열거나 소연을 베풀었는데, 한시로선 그 욕구를 충족할수 없어 경기체가나 시조가 자연발생학적으로 등장하였다.) 이어진다.

 

당대의 문신 사림은 임천에 은거하여 음풍농월로 소일하게 된다. 그 소회를 한시에 의존하였지만 일부는 심심파적으로 우리 가락을 선호하여 <경기체가>니 <한림별곡>이니(고려고종조에 등장한 시가. 노래제목이 別曲이란 말이 붙어 있고 노래 끝에 景幾何如가 붙어 있어 생긴 곡명 문자는 한자 명사로만 된 말을 음수에 맞추어 가창함. 음수율은 334 444등 3과4로 배치) 소연(小宴)과 함께 그 연석에서 서로 즉흥시로써 흥취를 돋구었던 것 같았다.

 

여말의 유신의 한 사람인 이규보는 <梨花에 月白하고>라는 시조를 남긴 사람이다.

이규보는 백운거사라 자처하고 국순전 백운 소설같은 패관류의 글을 남긴바도 있지만 <한림별곡>에 3대문장가로 나온다. 李仁老 李公老 李奎報 압운과 3음절의 반복 음수율에 맞추어 부른 한 대목이다.

 

林泉에 쫓겨난 그들은 배운 지식을 써먹을 곳이 없어 풍류적인 시회나 놀이에 활용하여 심심 파적으로(心心破寂:심심풀이의 뜻. 쫓겨난 선비들이 심심하니 333 34 운율에 맞추어 한자명사로 나열하고 끝에 합창으로 경기엇더하니잇고! 외치었다.)

 

그 재주를 즐기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단체로도 즐겼지만 혼자서 즐기는 풍류는 더욱 더 아취를 풍겨 시적 경지를 이룩하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가령 그의 한시<適意>라는 뜻에 맞는다는 뜻에서 외로움에 부치는 제맛에 사는 풍류적 아취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獨坐自彈琴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고
獨飮頻擧酒 홀로 잔을들어 홀짝홀짝 마시니
旣不負吾耳 거문고 소리는 이미 내 귀에 들리지 않네
酒不負吾口 술 또한 내 입에 거슬리지 않네
何須待知者 어찌 지음을 기다릴 건가
亦莫須飮友 역시 술 마실 벗 따로이 있을손가
適意側爲歡 뜻에만 맞으면 홀로라도 즐거운 것
此言吾必取 이 가락이 마음 절로 흥에 겹네.

(適意: 뜻에 맞으면의 뜻인데. 제멋(흥)에 맞으면으로 의역할 수 있다.

 

단체로 뒷풀이같이 즐기는 풍류보다 홀로 시나 거문고를 타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 더욱 선비의 풍류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마시며 홀로 즐기는 제멋에 사는 전형적 선비의 풍류경을 한시로 읊고 있다. 이러한 한학자도 이젠 우리말로 쓴 시가 필요해 읊은 것이 <梨花에 月白하고>란 시조였을 것이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 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규보의 고시조 전문>

(이 다정가는 연애 3요소 장소(이화꽃 핀 정원) 시간(三更) 대상(님부재)중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다정도 병이 되어 잠 못 드는 것이다.)


연대만 고려말이지 5백년 지난 지금에 와서도 하나도 손색없는 시조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다정도 병이라는 metaphor 마저도 아직 사은유가 되지 않고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풍류는 장차 멋이라는 말과 어울리면서 한국 특유의 운치를 칭하는 풍류문학을 형성하였다.(멋은 맛에서 파생된 말로 후대로 내려오며 완전히 다른 말로 뜻이 달라졌다.)

 

멋이라는 말은 아름다움, 고움 등 미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가치 개념화된 특수한 단어인데 이 말의 어원은 맛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본다. 멋있는 사람, 멋있는 집, 멋있는 옷 맵씨 등 사람이나 사물에 두루 수식어로 쓰이고 있어 그 어의개념은 아리송한 면이 있고 설명이 난한 불분명하여 개념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단어이다.

 

우리 민족만이 가진 특이한 정서적 미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바 버선코, 옷자락 서양의 Dandy하고는 다른 운치있는 것 우리의 풍속이나 정서와 어우러진 개념내용과 특징을 지닌다.

 

맛에 부합되는 짭짤하다 구수하다 시큼하다 와 달리 멋에 관련되는 구성지다, 텁텁하다, 능청거리다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맛이 감각적 미각이라면 멋은 시각적 감성적 매력이 아닌가 싶다. 맛과 멋은 처음엔 유사한 말이다 차츰 다른 말로 변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구 사람들이 최초로 만든 한영사전에는 멋을 맛과 동일어인 taste로 표기했고, 최근에는 전혀 다른 dandism, foppery, nice, smart, stylish, smart-looking 등 다양한 번역어로 나타나되 모두 맛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음을 본다. 민족적 이념과 정서가 배양된 미적 요소로서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찾고 있음을 본다.

 

가령 꽃을 두고 아름다운 꽃은 가하나 멋있는 꽃은(꽃을 멋있는 꽃이라고는 하지 않으나 꽃을 머리에 꽂고 있으면 그 모습을 멋있다고 할 수 있다.) 어울린 표현이 아니다. 어떤 풍경과 어우러진 집을 가리켜 멋있는 집은 가능할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나 사물과의 조화를 통해서 감지되는 어떤 동적상태를 멋이라고 불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우리 문학의 한 특징을 이 풍류와 멋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많았던 것 같다. 이 멋은 양반이나 귀족 상류층의 운치에서 차츰 恨과의 연관도 가지면서 민중적 멋 판소리계의 극가 같은 것. 시조창 같은 것으로 차츰 전민중의 애환과 연결되어진 것으로 느껴진다.

 

이런 풍류사상과 멋을 한껏 잘 활용한 시가가 시조창이 아니었던가 싶다.(시조는 문자로 표현하는 가사라기보다 노래부르는 창의 의미가 강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창보다는 문자화되는 가사가 중시되고 있다.)

 

고려말 야심가 이방원이 넌지시 그의 조선조 건국의 뜻을 우의적으로 표현한<하여가(何如歌)>로써 권주가를 부르자, 거기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단심가(丹心歌)>로 답한 포은의 반배는 그야말로 얼마나 멋진가. 이것이야말로 진정 한국문학의 한 멋인 것이다.

 

훗날 그 노래야말로 이방원의 야심성취로 조선조가 건국되고 포은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절의가의 전형이 된 것이다.(포은의 희생후 그 단심가는 얼마후 死六臣의 절의가로 이어져 많은 시조를 남긴다. 성삼문의 형장으로 끌려가며 읊은<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는 대표적인 시가이다.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료
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하야 천년같이 누리리라
<이방원의 하여가>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건없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가식다=변하다의 뜻, 지금도 가시가 생겼다고 한다(구더기)) 있으랴
<포은의 단심가 전문>


하여가와 단심가는 인생관 절의관 모두 극과 극으로 대비되는 태도이다. 이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권주가로써 속내를 상징적으로 읊는 모습은 바로 멋진 장면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하여가가 승리하고 단심가가 죽음을 당했지만 문학적으로는 절의가가 영원한 승리를 얻은 것이다. 현실에 지고 이상적 승리를 취하는 것 그것이 멋인 것이다.(현실적으로는<何如歌>가 승리하나 역사적으로는<丹心歌>가 절의가로 남는다.

 

고려조말 三隱은 圃隱(정몽주)牧隱(이색)吉再(치은)을 가리킨다.) 기타 많은 고려 유신들이나 두문동파나(복애 범세동외 72현) 은거하여 조선조의 건국에 등을 돌렸고 그들이 남긴 회고가는 패자의 망국한이기보다 이념상 맞지 않는 권력과 매별하고 그들 나름의 이상을 지키려는 절의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색의 신구 갈등을 노래한 고뇌어린 노래는 반가운 매화를 찾아 석양에 홀로 서서 갈곳 모른다 하였다. 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머흘다 험하게 일어나다의 뜻)
반가운 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夕陽에 홀올로 서서 갈곳 몰라 하노라
<이색의 방황가>


이방원의 권장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것이냐 고뇌하는 유신의 방황하는 심정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고려의 망운이 깊어진 곳에 새로운 조선조 건국의 음모는 험한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다. 자기가 꿈꾸는 이상세계의 매화는 대체 어디 피어있는가? 망운이 깃든 여말 힘없는 선비는 어디로 갈까 그 지향점을 잃고 있다.

 

결국은 이방원등의 건국이 매화가 아니어서 그는 정몽주의 비보를 뒤로 한 채 귀양길에 오른다.
또 한 사람의 삼은(三隱) 길재(吉再.治隱)는 회고가(懷古歌)를 통하여 절의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五百年 都邑地를 匹馬로 돌아드니
山川은 依舊하되 人傑은 간데없다
어즈버 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吉再의 懷古歌>


망해버린 왕조의 옛궁궐터를 찾은 유신 吉再, 그는 흥망성쇠의 비운을 탄식한 싯구를 남겼다. 그는 결국 경상도 금오산에 은거 채미정(菜薇정)을(구미시 금오산에 가면 길재 은거시 지었다는 채미정을 복원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는 뜻이다.) 짓고 고사리를 캐먹으며 백이숙제의 길을 걸었다. 원천석도 회고가 한수를 남겼다.(<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로 시작된다.) 이상과 같이 시조의 시문학은 고려조의 망운과 신흥 조선조의 건국기간에 발생하여(훈민정음 이전에는 시조창으로 구전되다가 조선조에 와서 시조집간행시 국문으로 표기되어 오늘날 전해온다.)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그 전성은 조선조에 와서 본격화하였다.

 

단심가를 이어받은 사육신의 절의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가 전기(태조 성종간) 100여년의 기간 동안 시조형식의 시가를 남겼다. 시조는 아직도 본격적인 문학 장르로서 대접받기보다 한시를 본업으로 하되 여기로 읊는 그런 정도의 즉흥적 권주가로 하대받았던 장르였다.(조선조 선비들은 한시를 진짜시라 하고 우리말 시는 여기로 치부했다.)


3. 시조에 나타난 청산(靑山)


청산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여 자연이다. 자연이란 인위(人爲)가 가해지지 않은 삼라만상 있는 그대로의 현상들 산 ․ 강 ․ 바다 ․ 동물 ․ 청산 ․ 강물 ․ 바람 ․ 구름 따위를 가리키며 철학에선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靑山이란 나무. 바위. 온갖식물. 산짐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