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한시(漢詩)

구태여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할 것 뭐 있겠나?

야촌(1) 2015. 2. 26. 00:28

구태여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할 것 뭐 있겠나?

 

남 앞에선 쉬워도 나만 아는 일에선 어려워(人知猶易獨知難/인지유역독지난)

한 생각 하는 사이에 별별 생각 다 든다.(雷雨雲星一念間/뢰우운성일념간)

방구석에 있을 때에도 떳떳할 수 있다면(如令屋漏常無愧/여령옥루상무괴)

구태여 설산에서 고행할 것 뭐 있겠나?(苦行何須入雪山/고행하수입설산)

 

☀이진상(李震相, 1818~1886)

「술학자경(述學自警)」 중 ‘홀로일 때를 삼가다[謹獨]’

『한주집(寒洲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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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조선 말기 유학자 이진상은 57세인 1874년 겨울, 책을 들고 제자들과 함께 가야산 아래 있는 만귀정(晩歸亭)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고요하게 지내면서 전에 배운 학문을 다시 익히고 여러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시는 세상을 초월하고 싶어 자연에서 소요하며 성정을 기르던 이 시기에 지은 작품입니다. 「술학자경」 안에는 극기(克己), 신사(愼思), 신언(愼言), 근독(謹獨), 독지(篤志), 존성(存誠) 등 스스로를 경계하는 시 26수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 혼자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워진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남 앞에서는 오히려 문제없기가 쉬워도 자기만 아는 부분에서는 문제없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남 앞에서는 타인을 의식하면서 조심하게 되지만 나만 아는 곳에서는 ‘아무러면 어떠랴?’ 하는 마음이 생기기 쉬워서이겠지요. 특히나 머릿속에서 이는 생각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한 생각 사이에도 수많은 변화가 입니다. 번개도 치고, 비도 내리고, 구름도 끼고, 별도 뜨고……

 

자신의 잘못이 분명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후회하기만 해도 변화가 있으련만 이런저런 핑계, 남들에 대한 원망, 자포자기하는 생각들로 뒤엉켜, 내 마음인데도 남의 마음인 것마냥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러고 나면, 또다시 마음 찾는 일을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되는 양 일삼아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마음의 고향이고, 언제고 내 마음을 떠난 적이 없는데도 또다시 마음을 찾아 마음 밖을 기웃거리니, ‘나만 아는 일’을 잘 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맞습니다.

 

저자는 누가 보든 안 보든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도량(道場)이 될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도량이니, 도 닦자고 구태여 설산까지 갈 이유가 없는 것이겠지요.

 

글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