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이상설선생 유허비

야촌(1) 2014. 8. 25. 02:03

독립운동가 이상설(李相卨)선생 유허비

 

우수리스크 외곽의 수이푼 강변에는 독립 운동가였던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외로이 세워져 있다.

이상설은 1907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이준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장으로 가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였다.

 

이상설은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으면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그 재를 여기 옛 발해의 땅이었던 솔빈강(率賓江) 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유허지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유허비(遺墟碑)가 서있다.

 

'보제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했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 곳 수이푼강물에 뿌리다. ...'이상설은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동지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같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되었다.

 

옛날 발해의 지방행정구역인 솔빈부가 자리잡았던 지역에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솔빈강 (率賓江)이 바로 '수이푼 강'이다.

 

 

▲우수리스크 솔빈강 (率賓江, 수이푼 강)변 옆에 있는 이상설선생 유허비(遺墟碑).

 

 

 

 

 

 

 

▲보재 이상설선생 유허비 앞으로 흐르고 있는 솔빈강(率賓江, 수이푼 강)이다. 

 

▲허비 앞의 솔빈강 (率賓江) 건너편으로는 발해산성이 있었던 평원이 보인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密使事件)

 

1905년 일제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한다는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고종은 "보호조약은 무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또한 고종은 한양의 각국 공사들에게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성과가 없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여 주로 중재재판, 육해전 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실제는 열강들 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후원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전 주(駐)러시아 공사 이위종과 이범진(李範晉)을 만났다.

 

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지만 보름이 넘도록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독일 베를린으로 가 뒤 '장서(長書)'와 부속문서인 '일인(日人)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한 뒤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로 가서 장서와 부속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밀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통보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사정이 알려지자 각국 신문기자들이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 회보(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7월 9일에는 회의장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 한국을 여론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조국을 지키지 못하여 분하고 화가나 음식을 끊었는데, 그로 인해 병이 나 7월 14일 호텔에서 병사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미 계획된 대로 각국을 순방하며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며 재판에 회부토록 했고,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은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여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일제 통감부는 고종을 감금하고,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마침내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禪位)한다는 미명으로 사실상 폐위 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하여 합병의 형식만 남게 되었다.

 

사진 출처 : 바람따라 구름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