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 반일운동의 불씨되다

야촌(1) 2014. 11. 26. 22:50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 반일운동의 불씨되다

중국 속 우리 역사 기행 19

브레인미디어 정유철 기자 ㅣ  2014년 11월 26일 (수) 13:34  

 

대성중학교의 이상설기념관 정식 명칭은 ‘이상설 선생 역사전람관’이다. 

교정에 세워진 ‘보재 이상설 선생 역사전람관 준공기’를 통해 이 전람관의 연혁을 살폈다. 

 

“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을 1906년 8월에 용정 땅에 최초로 개숙하시고 초대 숙장이 되신 보재 이상설 선생을 길이 기리려고 민족적 성원과 창학정신을 계승한 용정중학교의 협력을 얻어 오늘 여기에 본 역사전람관을 세우고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에서 쌓으신 선생의 업적을 선양하는 바이다. 

 

2000년 8월 15일 세월이 흘러 준공비가 낡고 훼손되어 중앙화수회 제24대 이필우 회장이 2천만 원을 전담해 현재 용정중학교 박철 교장과 교육국 김동국 국장의 협력으로 새로이 이곳에 세우다. 

 

2011년 8월 15일

 

중국 용정중학교 내에 있는 이상설선생역사전람관 준공비.

 

임의단체로 있던 보재(溥齋 : 이상설의 아호)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가 2000년 사단법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로 출범하면서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주관으로 이곳 용정중학교 내에 이상설 선생 역사 전람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사람인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충청북도 진천 덕산 출신인 이상설의 기념관이 용정에 왜 있을까? 이상설이 1906년 용정에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전서숙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용정실험소학교가 들어섰지만, 교정에는 ‘서전서숙 옛터’를 알리는 비석, 기념수, 이상설정(李相卨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역사를 말해준다. 전람관 안에 들어서니 헤이그 특사 사진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하지만 윤동주기념관과는 달리 안내하는 사람도, 해설하는 사람도 없다. 이렇게 홀대할 분이 아닌데·…. 헤이그 특사, 서전서숙의 설립자로는 익히 알고 있지만, 상세한 전기를 몰라 전시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이씨 이행우 선생과 벽진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 선생의 양자로 편입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광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기념관에 소개된 이상설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전람관에는 이상설이 고종황제에게 올린 상소문, 서전서숙 건립, 헤이그 활동, 을사늑약 전문, 미국·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고향인 충북 진천의 이상설 생가 사진, 이상설이 작성한 1894년 갑오 문과 답안지를 전시하였다.

 

 

▲연변 용정중학교에 개관한 보재 이상설 선생 역사관에는 이상설 사진과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이 전시되었다.

 

이상설의 사진과 함께 전시한 상소문. ‘議政府 參贊 李相卨 上疏’(의정부 참찬 이상설 상소) 글씨가 뚜렸하다.

“엎드려 아룁니다. 신이 어제 정부에서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조인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천하의 일을 다시 어찌할 수 없구나, 라고 집에 돌아와 다만 슬피 울며…….”독립운동가 박은식(朴殷植)이 ‘한국통사(韓國痛史)’에 이 상소문을 기록해 두었다.

 

비록 실효는 거두지 못했으나 그 조약을 반대한 여론이며 또한 애통해 한 혈흔(血痕)이라며 두서너 개의 상소문을 가려 기록하여 후인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제 듣건대 그 조약이 아직 황제의 비준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오니 신은 마음 벅차도록 다행하다 생각하며 국가를 위하는 계책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그 조약을 비준하여도 망하고 비준하지 않아도 또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순사(殉死 :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다)할 뜻을 결심하고 단행하는 것을 거절하시어 우리 열조 열종이 폐하께 맡기신 중임을 저버리지 마옵소서.....

 

원컨대 폐하께서는 빨리 참정대신 한규설이 상주한 바에 의거해서 조약을 가결한 여러 대신을 모두 징판하사 방헌(邦憲)을 바로잡으시고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조신을 다시 택하시어 교섭을 버리셔서 엄히 배척 거절하시고 천하 만세에 성심(聖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소서.....

 

그렇지 못하시면 신은 비록 만 번 주륙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매국역적과 함께 한 조정에 설 수 없습니다.폐하께서는 만약 신의 말이 잘못된 것이라 하신다면 모름지기 신을 참수하시어 여러 역신에게 사례하옵시며, 신의 말이 옳다고 하신다면 여러 역신을 참하시어 국민에게 사례하십시오.” (박은식, ‘한국통사’(중), 박영사, 1988, 201~202쪽.)

 

이상설은 일찍이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의정부 참찬(參贊)로 있던 이상설은 그 조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아니한 것을 알고 상소를 올렸다.

 

고종 황제에게 종사에 죽을 결심으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늑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했다.

고종이 이를 듣지 않자 같은 상소를 다섯 차례 올렸다. 고종이 이상설의 상소를 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상설은 을사늑약의 강제를 막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며 자결을 시도하였다. 1905년 11월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의 순절 소식을 듣고 이상설은 종로 거리에 달려와서 통곡하며 연설했다.

 

“우리 정부의 여러 대신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아직도 구차한 삶을 누리려는 망상을 갖겠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나라가 자립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보호하에 들어간다면 종사가 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족 또한 멸망하리니 우리 동포 형제는 깊이 생각하라.

 

지금 민 보국(輔國, 민영환을 가리킴)의 말일(末日)이 즉 우리 국민이 죽을 시기이다. 내가 민 보국 한 사람을 위해 곡하는 것이 아니요, 실로 우리 전국의 동포를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니라.” (박은식, ‘한국통사’(하), 박영사, 1988, 7~8쪽.)

 

연설을 마친 이상설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에게 구원되었다. 이를 목도한 백범 김구(金九, 1876~1949)는 이렇게 적었다. “그날 민영환(閔泳煥)이 자결하였다. 그 보도를 접하고 몇몇 동지들과 같이 민영환 댁에 가서 조문을 마치고 돌아서 큰 도로에 나오는 때였다.

 

나이가 사십 안팎쯤 되어 보이는 어떤 한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 망건도 없이 맨 상투 바람으로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는데, 크게 소리치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參贊)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그이도 나랏일이 날로 잘못 되어감을 보고 의분을 못 이겨 자살하려던 것이었다.(도진순 주해. 김구자서전 ‘백범일지’, (개정판) 돌베개, 2002, 195~196쪽.)

 

이상설은 이듬해 4월 국외로 나가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의 용정(龍井)에 들어갔다. 이상설은 1906년 8월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조선인 자녀를 받아들여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서전평야에서 이름을 따와 서전서숙이라 하였다. 서전서숙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숙장은 이상설이, 운영은 이동녕·정순만 등이 맡아보았으며, 교사는 이상설·여조현·김우용·황달영 등이었다. 교사의 월급·교재비·학생의 학용품 등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고,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이상설은 ‘산술신서’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교육내용은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용정 외에도 온성·종성·회령에 이르기까지 교포들을 방문하여 신교육 및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서전서숙의 설립목적 등을 역설하며 자제들을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이상설선생역사전람관은 이상설이 펼친 항일운동, 민족 교육 등을 소개했다.

 

서전서숙은 간도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이었고 서전서숙의 설립으로 연변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이 시작되었다. 연변에서도 서전서숙의 설립은 반일운동의 발단이었으며 서전서숙의 설립을 계기로 각지에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높게 평가한다. 

 

조선인의 전통적인 구식서당교육이 근대 학교 교육으로 이행하는 첫 시작이었음을 상징하였고 연변지구 반일운동의 발단이라고 평가한다. (박청산, ‘내 고향 연변’, 연변인민출판사, 2004.) 이렇게 되기까지 이상설이 걸어온 삶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상설은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고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문학을 공부했다. 나라를 잃게 되자 이상설은 국권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풍찬노숙 망명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다음해 용정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을 접어야 했다. 1907년 3월경 이상설에게 고종의 칙명이 도착했다. 헤이그 특사로 가라는 칙명이었다. 이상설은 서전서숙을 여준(呂準) 등에 맡기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4월 20일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특사의 정사(正使)가 되어 5월 21일 이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과 협력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세 특사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한국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다.

 

 

▲이상설은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갔으나

   일제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유럽을 돌며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일제는 8월9일 궐석 재판에서 부사(副使)인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유럽순방을 마친 이상설은 미국에 1년 남짓 머물면서 한인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9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이상설은 신한촌 등 항일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를 비롯한 국내외의 의병을 총집결하여 항일투쟁연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조직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가 한일강제병탄을 강행하자 이상설은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동포를 규합하여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일제의 병탄에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상설이 짓고 8,624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서명이 붙은 이 선언서에서, “우리는 '대한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 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어 이주한인의 자치를 도모하고자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기 위하여 나자구에 대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14년 국외 최초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였다.일제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의 탄압으로 대한광복군정부가 와해하자 이상설은 상해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16년 중병에 걸려 투병했으나 점차 악화하여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이상설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아무르 강가에서 화장하고, 생전에 남긴 그의 저작들도 모두 거두어 불태웠다. 그의 공훈에 비해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니 마음이 아프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헤이그 특사 정사(正使) 이상설. 선생의 일대기를 연변에 와서 처음 알다니, 독립운동가에 얼마나 무심한가. 무거운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오니 윤동주 교실로 이어진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상설기념관을 세웠지만 찾는 이가 없어 거의 문이 닫혀있었다고 한다.

 

2008년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가 나서 윤동주기념관과 연결 통로를 만들고 자료를 재정비했다. 그래서 이런 동선이 됐다. 윤동주 교실은 윤동주 시인이 공부하는 교실을 재현해 놓았다. 난로, 도시락, 학생 책상, 윤동주 흉상이 있고 칠판에는 윤동주의 시 ‘서시’에 곡을 붙인 ‘서시’ 악보가 그려져 있다. 이제 발길은 옛 일본영사관, 윤동주 묘, 윤동주 생가로 이어진다.   

 

글/사진.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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