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마지막 선비 보재 이상설

야촌(1) 2014. 6. 20. 00:17

상식 초월 폭넓은 '향학열' 독립운동 원천됐다

[마지막 선비 보재 이상설] 3.학문적 깊이를 어찌 가늠하랴.

 

[중부매일] 2014년 06월 19일(목)   21:50:37  지면보기 9면  ㅣ

박익규  addpark@jbnews.com

 

↑중국 용정시 이상설 역사전람관 내부에는 민족교육의 선구자들로 이상설, 이동휘, 김약연을 소개하고 있다.

  서전서숙을 설립한 이상설 선생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근대교육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의 학자중에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輪)하고 조예(造詣)가 심히 깊어 동서 학문을 거의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므로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법률·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 -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24일, 베델의 이상설 상소논평 "문장은 경교(鯨鮫:고래, 상어)를 넘어뜨릴만하고, 성리(性理)는 근굴(根窟)을 뚫었다. 

 

깊은 생각은 역학과 수학에 궁달하였고, 정치와 법률에 정통하였다. 의학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역사와 지리는 더욱 더욱 연구가 깊었다. 외국어 정도는 오히려 얕은데 속하여 스승없이 영어를 능통하였고 … 러시아 학문도 통하여 점차 톨스토이와도 사귀(漸交)었다" - 위당 정인보 이상설은 신구학문을 겸수했다. 

 

학문분야도 광범해 전통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학은 물론 신학문에 있어서 정치·법률·경제·사회·수학·과학·철학·종교 등 모든 분야에 일가를 이뤘다. 이러한 학문의 수학을 위해 일찍부터 영어·일어 등의 외국어도 배우고 뒷날 러시아어까지 익혔다. 

 

이처럼 불굴정진하고 지행합일한 선생의 공부가 훗날 대한독립의 기초를 놓는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그러하듯 학문에 대한 연구 또한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관련 서적과 자료를 중심으로 이상설 선생의 학문세계를 조명했다. / 편집자

 

 

↑이상설 선생이 1900년경 편역한 것으로 알려진 중등교과서인 산술신서 상권 1. 2. 

이상설은 직접 산술신서 상, 하권을 저술해 서전서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충북 진천에서 출생한 이상설은 7세 때인 1877년 이·호·예·병·형조참의를 역임한 양부 이용우에게로 출계한다. 

이상설이 이용우에게 출계하게 된 일화는 다음과 같이 집안의 구전으로 전해진다.

 

"이상설이 어릴 때부터 조숙조달하여 재질이 탁월하고 총명이 비범하여 인근의 경탄함이 컸었는데, 마침 이용우가 늦도록 후사가 없어 이름 높은 관상가 김모씨를 데리고 경주이씨의 집단 향리인 진천 초평으로 양자 감을 고르러 가는 도중에 '보재의 비범하다는 평탄을 듣고 산직마을에 들르게 되었는데 관상가가 7세의 복남(이상설)이를 이윽히 보더니 희색이 만면하면서 보기 드문 귀상이라'고 극구 칭송함을 듣고 그 자리에서 후사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설 선생이 1886년이나 1887년경 간행한 것으로 알려진 수학 관련 서적인 '수리

 

어쨋든 어려서부터 재동·신동소리를 듣던 이상설은 스무살을 넘으면서 이미 유학의 큰 학자로 칭송되었다. 구한말 문신 이건창이 보낸 편지에는 율곡 이이를 조술할 학자로 칭송하고 있다.

 

"진실로 이상설의 뒷날 대성하고 창무한 것을 누가 막지 않는다면 이는 곧 율곡의 도가 행함이요, 그것은 나라의 부강이 될 것이요, 백성의 복지가 될 것이요, 선비의 영화가 될 것이다. 어찌 작게 이상설 혼자만의 행복이라 하리요"

 

이상설은 약관 27세로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 앞서 그의 유학에 대한 수준은 25세때 급제한 과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설은 시국과 사회의 큰 전환을 살피고 곧 신학문과 근대사상을 거의 자습으로 수학하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으로 환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성제 이시영은 이상설의 수학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 보재의 학우는 자신과 그의 백형인 우당 회영을 비롯하여 남촌의 3재동으로 일컬었던 이범세, 서만순, 조한평, 한학의 석학인 여규형, 여조현 등이 죽마고우였고 이희종과는 결의형제의 맹약까지 한 사이였다.

 

또한 보재는 학우간에서 선생격이었기에 그 문하생으로 민형식 등 7, 8명이나 있어 동문수학자는 17~18명이나 되었다.

 

 

↑중국 용정시에 소재하는 이상설선생역사전람관 전경

 

보재가 16세 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붙이고 한문·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때 보재의 총명 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는 같은 학우들이 경탄함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기억력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었다. 보재는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하였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관한 어떤 문제를 반나절이나 풀려다가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 속에서 풀었다고 깨어서 기뻐한 일이 있다.

 

또한 학우들이 다 취침 후에도 혼자 자지 않고 새벽 두세시 까지 글을 읽고도 아침에는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공부하였다. 기억력이 얼마나 비상하였든지 자면서도 학우들이 한 이야기를 깨어서 역력히 기억하였다. 그는 식사 후에는 반드시 20분가량 자는 습관도 있었다."

 

 

↑이상설 선생이 법학을 공부하면서 편역한 것으로, 알려진 계약법 등의 법률인 '법학만초'

 

이상설의 신학문은 거의 독학에 의한 것이나 당시 미국인 선교사이자 고종의 외국인 고문역할을 한 헐버트 박사와 정치적으로 교분이 두터워 그로부터 영어·불어 등의 외국어와 외국 신학문의 지도를 많이 받았다. 또한 외국의 신간서적을 널리 구입해 새로운 정치사상을 수용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5년 을사5조약 이후 한국의 국권수호와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로 뒷날 이상설의 헤이그밀사행에 큰 밑받침 역할을 하게된다. 이상설이 신학문을 수학할때 쓴 것으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국제법인 '십간섭'을 비롯해 수학인 '수리', 물리·화학·식물학, 계약법, 정치 등의 번역서 등의 자료는 그의 신학문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상설의 신학문은 정치·경제·사회·과학·수학·철학·종교·외국어 등 각 분야에 걸쳐 일반 상식으로 쉽게 믿을 수 없을리 만큼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고 특히 수학과 법률에 있어서는 대가로 지칭되었다. 이상설의 학문에 대한 칭송은 위당 정인보와 백암 박은식을 비롯 매당 장석영, 한계 이승희, 농성 조원구 등도 비슷한 평을 남겼다.

 

이상설을 찾아와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벌인 영남의 명유(名儒)인 이승희는 훗날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나 밀산부에서 독립운동기지 설정을 위한 한흥동 건설에 합심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수학에서 있어서는 이상설이 제일인자로 칭송되고 또한 가장 먼저 학계에 수학을 수용한 인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상설의 수학은 당시 통용되던 중등학교수학교과서를 저술하였고 1907년 간도에 그가 세운 서전서숙에서 직접 학생들에게 교수하기도 했다. 그가 해외망명한 후에 그 아우 이상익의 저술이 통용됐던 사실만 봐도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최초 수학자인 이상설 선생을 숭모하기위해 충북학생 수학캠프가 올해 7월말 진천에서 열리는 것도 이같은 이유다.  글 / 박익규 사진 / 김용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