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잊혀지고 있는 "선구자" 그를 아십니까?

야촌(1) 2014. 4. 25. 19:39

잊혀지고 있는 "선구자" 그를 아십니까? [중부매일]

2014년 04월 24일 (목) 22:17:18 지면보기 12면 박익규 기자 addpark@jbnews.com 

 

우리가 생각하는 '선비'란 누구일까. 사전에는 선비를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있는 사람을 비유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충북 진천 태생의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은 사전적 의미로 선비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정리해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대한제국 최후의 혁신관료로 일제의 불법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다. 1906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정사(正使)로 참석해 일본의 침탈을 알리다가 일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1894년 마지막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국학과 접맥한 근대 자연과학을 국내에 소개한 대학자이기도 하다. 러시아 연해주, 중국, 미국 등지에서 해외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동서양 학문을 섭렵하고 외국어에 통달한 보재 선생은 지행합일을 실천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사업가, 언론인, 외교관의 역할을 도맡았다. 

 

보재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은 선구자적 족적을 남겼다. 1919년 3·1 운동과 임시정부 탄생의 기초 역시 보재 선생의 공이다. 러시아와 중국, 진천을 중심으로 이상설 선생의 발자취를 취재하고자 한다. 보재 이상설 선생의 재조명을 통해 후세에 타산지석이 되길 바라면서 / 편집자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1917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이상설 선생은 반일계몽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이상설 선생은 1910년대 연해주 등지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고·최대의 민족 지도자중 한 명이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으나 이를 기억하는 후손은 많지 않다. 2017년 순국 100주기를, 2020년 탄생 150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이상설 선생은 대한민국 국적조차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고혼이나마 충북 진천으로 모셔야 되지 않을까.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지난 22일 진천의 생가와 숭렬사 사당에서 97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기념사업회는 1971년 숭모비를, 1975년에는 사당인 숭렬사를 건립해 해마다 이곳에서 추모식을 갖고 있다.

 

정재교 진천군 유도회장의 집례로 진행된 제향에는 이재정 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김영준 청주보훈지청장, 이양희 후원회장, 경주이씨 종원 등 100여명이 참석해 선생의 뜻을 기렸다. 해마다 참석자가 줄어들어 이러다가 선생이 영영 잊혀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올해는 이시종 충북도지사와 유영훈 진천군수가 선거법상 부득이 참석치 못했다. 정제우 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러시아 연해주에 광복군 정부를 세우고 초대 정통령에 오르신 선생에 대해 조국 광복을 보셨으면 초대 대통령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 큰 인물이라는 사학계의 평가도 있다"며 "고인이 남긴 유품이 많지않다보니 선생에 대한 연구도 제자리에 멈춰 있고, 추모식도 갈 수록 관심이 떨어져 실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재정 기념사업회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친일역사를 미화하는 역사교과서 문제가 국가적 문제로 혼란을 가져오고 일본이 재무장을 강화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다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며 "평화주의자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온 몸을 바치신 이상설 선생의 뜻을 기리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남기신 조국의 미래를 더 힘차게 만들기 위한 우리의 각오를 다지는 기회로 삼자"고 했다. / 박익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