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상하 2단의 정(井)자형 구조
① 각단이 각각 306×32×32cm의 크기의 장대석 4개씩으로 정자형으로 이뤄졌다.
② 정자석 내부는 220×220×64cm의 공간을 이루고 하부는 목판을 깔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서반 부는 개폐
가 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부구조의 모습은 어떠할까?
위의 구조도에서 1번 부분, 밖에서 사다리로 오르면 출입구 부분이다
출입문(12단)까지는 자갈과 흙으로 채워져 있으며 윗부분은 자갈로 덮혀 있는 모습이다.
↑다음은 3번 부분, 즉 원주부분의 내벽 모습이다.다듬어져 있지 않다고 알려져 왔으나 크기가 일정하고 거친 면이
적은 것을 보아 약간은 다듬었음을 알수 있다.
↑쌓은 돌 틈 사이로 쐐기처럼 박은 작은 자갈들도 많이 보인다.
↑첨성대 내부에서 하늘쪽을 향해 쳐다본 모습이다. 가운데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장개석이 걸쳐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에서 2번 부분, 즉 내부 사다리를 걸치기 위해 가로로 가로질러놓은 장대석이다.
↑가로로 걸쳐놓은 장대석이 외부까지 뻗혀 있다.
↑사진의 4번, 정자형 두부의 내부 모습이다. 첨성대의 맨 윗부분 우물정(정)자 모양의 두부로서 2단으로 노여 있
다.
↑두부 안쪽에 사람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긴 장대석이 놓여 있다.사다리를 통하여 왼쪽 빈 공간으로 올라온 후 나무
판자를 덮고 그 위에서 관측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징한다.
↑항아리처럼 생긴 몸통의 가장 윗단 돌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본 정자형 두부의 모습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를 살펴보면
▶일본인 와다(和田) -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
▶홍이섭(洪以燮)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
의 천문대."
▶홍사준(洪思俊) - 처음으로 첨성대 실측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며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
▶전상운(全相運)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에 따라 세웠을 것"
▶김용운(金容雲)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 周髀
算經〉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
▶이용범(李龍範)
"첨성대는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
▶박성래(朴星來)
"첨성대를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 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며, 토속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 하기 위한 제단"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볼 때
소박한 의미의 천문 관측 대라는 의견이 주류이다.
첨성대는 어떻게 쌓았을까?
↑1.5m의 깊이로 땅을 파고 흙을 다진 뒤 큰 돌을 채워 넣고 사이사이로 작은 돌을 채워 넣는다.
↑다진 기초 위에 기단석을 2단으로 올린다.
↑기단석 위에 돌을 쌓으면서 내부와 외부에 같은 높이로 흙을 쌓아 올린다. 비스듬히 쌓은 외부의 흙더미
위로 돌을 끌어 올린다.
↑입구가 있는 부분까지 내부와 외부의 흙을 제거한다.
↑마지막 내부의 흙은 그대로 둔 채 외부의 흙만 제거한다.
출처 : 솔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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