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신라사(新羅史)

신라의 골품제

야촌(1) 2013. 4. 15. 01:12

■ 신라 골품제와 관등

 

◇성골(聖骨)-왕족-부 모 모두 왕족으로 왕이 될 자격으로 최고 신분. 진덕여왕으로 끝남.

◇골(眞骨)-부모 중에 한쪽만 왕족, 무열왕부터 경순왕 까지, 1~5관등 복색(服色)은 자색(紫色).

◇육두품(六頭品)-17관등에서 6~9관등 아찬(阿湌)까지만 임명된다, 복색은 비색(翡色-다홍).

◇오두품(五頭品)-17관등에서 10~11관등 대나마(大奈麻)까지만 임명된다, 복색은 청색(靑色).

◇사두품(四頭品)-17관등에서 12~17관등 대사(大舍)까지만 임명된다. 복색은 황색(黃色).

 

※17관등은 3대 유리왕(儒理王)이 관을 설치하고 17관등을 두었다.

    1.이벌찬(伊伐湌)   2.이척찬(伊尺湌), 3.잡찬(迊湌), 4.파진찬(波珍湌), 5.대아찬(大阿湌)  6.아찬(阿湌), 

    7.일길찬(一吉湌), 

    8.사찬(沙湌),  9.급벌찬(級伐湌)  10/대나마(大奈麻)  11.나마(奈麻),  12.대사(大舍),  13.소사(小舍)  

    14.길사(吉士)  15.대오(大烏), 16.소오(小烏),  17.조위(造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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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

 

삼국의 신분제는 국민을 크게 귀족, 평민, 노비라는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삼국 중 신라에는 독특한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골품제는 폐쇄적이고 매우 엄격한 신분제로, 모반이나 범죄 등의 이유로 신분이 격하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격상하는 경우는 없었다.

 

골품제의 기원에 관한 설로 법흥왕이 재위 7년에 율령을 반포하면서 정식적으로 성립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이정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골품제는 크게 골제와 두품제로 나눌 수 있는데, 골제는 왕족에게 적용되었고, 두품제는 귀족이나 평민들에게 적용되었다.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데, 흥덕 9년 이전에 모두 평민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골품제는 신라 왕경인 금성에서만 적용되었으며, 지방민들은 진촌주가 5두품, 차촌주가 4두품의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지방민의 계급은 신분의 의미보다는 의복 재질의 종류, 집의 크기와 재료의 규제 등 일상에서 사치에 대한 규제를 목적으로 하였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26대 진평왕 이후 성골 중에 남자가 다하여 여자인 덕만 공주가 왕위에 올랐으며, 결국 진덕여왕 이후 성골이 다하여 진골인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런데 똑같이 진흥왕의 후손인 용수와 덕만 중 덕만 만이 성골이었다는 것은, 용수와 구별되는 선덕여왕 계열에서 동륜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른 가계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계를 신성화시킨 결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원래 성골과 진골은 특별한 구분이 없었는데,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계의 후손이 다른 진골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성골이라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 시 제기되는 하급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위계를 중첩하는 중위제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가옥의 규모나 복색, 장신구 등 일상생활에서의 규제 외에 일반 평민이나 노비와 같은 천인에 대한 규정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골품제는 모든 사회 운영에 있어서 적용된 것이 아니라 단지 관계 진출과 같은 부문에 한정 적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폐쇄적인 특성 때문에 결국 최상층인 성골은 자멸하고 말았고, 유능한 인재들이 골품제의 벽으로 인해 국가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어 결국 신라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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