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금(李承金)
임진왜란의 의장(義長) 이승금(李承金)은 성(姓)이 청안이씨(淸安李氏)로, 오위부장(五衛部將)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 1522-1592)의 둘째 아들로 조선 명종 11년(1556)에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입실리(入室里)에서 태어났다. 이승금은 13세 때 손가락을 끊어 병세가 위독한 아버지를 구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선조 12년(157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1592) 때는 아버지 이응춘(李應春) 의장(義長)을 따라 두 숙부(이우춘, 이봉춘)와 함께 지금의 울산광역시 강동동에 소재하는 공암(孔岩) 지역과 당시 경주성(慶州城)의 남쪽을 돌아 흐르는 문천(蚊川 : 汶川)전투에 참가하여 누차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의병장이다.
선조 27년(1594년) 10월 9일 아버지 이응춘(李應春)이 개운포(開雲浦 ; 울산 남구 성암동 일원) 전투에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순절하자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명(明)나라 원병이 도산성(島山城 : 鶴城 울산시 중구 학성동 소재)에 이르자 스스로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산전투(島山戰鬪)'에서 조ㆍ명(朝明) 연합군이 패배하여 경주(慶州)로 철수하자 실의에 빠진 이승금은 선영(先塋)을 찾아 시묘(侍墓)를 살면서 벼슬길에 뜻을 버렸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승금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선무원종훈삼등(宣武原從勳三等)으로 녹봉(祿封)하고, 훈련정(訓練正)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선조 34년(1601) 46세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 후 조정에서는 순조(純祖) 32년(1832) 아버지 이동춘은 병조참판으로, 이승금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로 추증하였다. 현재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에 있는 오복동(五福洞) 언덕에 부인 경주 안씨(慶州 安氏)와 합장으로 모셔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床石)만 남았고, 유품으로는 교지(敎旨) 4장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이승금이 태어난 외동읍 입실리
이승금이 안장된 대복리의 오복동(五福洞)은 정조 때는 오복(五福)과 대양(大陽) 두 마을로, 1894년(고종 31)에는 오복동(五卜洞)과 대양동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고 대양동의 대(大)와 오복동(五福洞)의 복(福)을 따서 대복리(大福里)라 하였다. 이 마을 대양에 있는 등성이에 의병장 이승금(李承金)의 묘가 있다.
위대한 외동읍(外東邑) 출신 의병장들이 왜 하필이면 거의가 출생지(出生地)와 살던 곳이 아닌 울산(蔚山)에서 작고하시고, 그 묘역(墓域)마저 출생지를 떠나 외동읍이 아닌 울산 등지로 정해야 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의 입실리
짧았던 그의 일생을 안타까워하며, 순조(純祖) 32년(1832) 아버지 이응춘 공과 그에게 내린 조선왕조실록을 한 부분을 소개한다.
○命故判決事贈吏判李時茂加贈, 豐基故參判贈吏判黃暹賜謚, 蔚山故部將李應春及其子故訓鍊正承會贈職, 時茂, 贈領相廷立之父, 而壬辰殉節者也, 暹以文學名節, 著績於宣廟朝, 光海時被削者也, 應春戰亡於倭變, 而承會以復讎募義者也。<純祖 32卷 32年 2月 27日 (甲辰) 3번째기사 / 이시무·황성·이응춘·이승회 등에게 시상하다.
위 실록의 내용을 직역하면 “고(故) 판결사(判決事) 증 이조판서 이시무(李時茂)에게 증직을 더하고, 풍기(豊基)의 고 참판 증 이조 판서 황섬(黃暹)에게는 사시(賜諡)하며, 울산(蔚山) 고 부장(部將) 이응춘(李應春)과 그 아들 고 훈련정(訓練正) 이승회(李承會)에게는 증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시무는 증 영상(領相) 이정립(李廷立)의 아버지로서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했던 자이고, 황섬은 문학과 명절(名節)로 선묘조(先廟朝) 때에 공적이 드러났는데 광해군 때 삭직(削職)당했던 자였으며, 이응춘은 왜변(倭變 ; 임진왜란)에 전사하였고, 이승회는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집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라는 뜻이다.
실록에는 '이승금(李承金)'을 '이승회(李承會)'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금(金)'자가 '회(會)'자로 오기된 듯하다.
출처 :외동향우회/외동중학교 동창회 원문보쓴이 : 李容雨 기ㅣ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