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삼학사(三學士)

야촌(1) 2014. 7. 6. 17:29

삼학사(三學士)

 

삼학사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찬양은 피할 일이다. 그들 역시 宋時烈처럼 名分論에 사로잡힌 인물들 일 뿐이다. 그들은 조선 역대로 오랑케로 멸시하였던 女眞族의 후예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에의 절의를 주장한 것이다. 오히려 최명길(崔鳴吉)과 김상헌(金尙憲)의 상반된 입장을 통하여 병자호란을 읽는 것이 옳은 일일듯....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의 삼학사(三學士) 말고도 많은 척화신(斥和臣)들이 있었다. 윤황(尹惶), 이일상(李一相), 유계(兪棨), 정온(鄭溫), 조경(趙絅) 등이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세 사람이 淸나라에 넘겨지는 "희생양"으로 낙점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 것은 청태종의 칭제건원(稱帝建元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 )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 삼학사들이 누구보다 격렬하게 "홍타이지(皇太極)의 참월(僭越)을 비난하였고, 주화신(主和臣)을 성토하였기 때문이다.

 

홍익한(洪翼漢)은 1636년 2월 " 홍타이지가 보낸 使臣의 머리를 베어 明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나의 머리를 베라 "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오달제(吳達濟)는 1636년 10월 " 공론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화친을 시도하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고 최명길을 겨냥하며 직격탄을 날렸다.

 

윤집(尹集)은 더 나아가 "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하고 오랑케와 和親을 주도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 .. 중국 南宋의 매국노)보다 나쁜 자 "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삼한산두(三韓山頭)

 

 

淸나라는 어쩔 수 없이 三學士를 죽이기는 하였지만, 이후 삼학사의 절의(節義)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삼학사를 기리는 사당(祠堂)을 짓고,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碑를 세웠다.

 

그리고 강희제(康熙帝)는 훗날 " 조선이 明나라 말년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찬양하였다.

 

 

위 신문의 기사와 같이 중국의 봉천(奉天)에서 용을 조각한 비석이 중간이 부러진 채 땅 속에 묻혀있다 발견되었다. 이 비석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글씨가 있었는데.. 여기의 三韓은 조선을 가리킨다. 즉, 조선의 泰山과 北斗 .. 태산과 같이 높고 북두칠성과 같이 빛난다..라는 뜻이다

 

淸太宗은 三學士를 회유하고 고문하며 그들을 신하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삼학사는 완강히 거절하는 가운데 이들을 처형하기 전에 청태종은 친히 국문하였다.

 

이 때 洪翼漢은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못함을 안타까워 할 뿐.."이라 하였으며, 尹集과 吳達濟는 "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 "며 기개를 보였다.

 

청태종은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하며, 삼학사가 죽고 난 후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淸나라가 몰락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비석을 잘 관리되지 못하고 파괴되어 방치되다가 1930년대에 발견되었다.

 

 

 

 

↑복원된 三韓山斗碑 -발해대학 교정

 

중궁 동포들은 성금을 모아 碑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중국의 문화혁명 때 이 碑는 다시 파괴되어 碑身만이 세 조각난 채로 농가의 주춧돌로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이 비석을 발해대학에서 구입하여 보관하게 되었고, 2005년에 渤海大學이 중심이 되어 발해대학 안에 복원하여 세워 놓았다.

 

삼학사 전(三學士傳)

 

 

우암 송시열(尤巖 宋時烈)은 국난(國難)을 당하여 의리를 지키며 죽는 방식에 자결(自決), 전사(戰死), 절사(節死) 등 세가지 방식이 있는데, 이 중에서 포로로 잡혀 戰死하는 것이 가장 貴한 죽음이라고 하며, 삼학사의 절의를 높게 평가하였다.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傳記)로 송자대전(宋子大典)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어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하여 춘추대일통(春秋大一通),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뜻을 높이기 위하여 편찬하였다.

 

삼학사들의 약전(略傳)과 언행을 기록하고 그들이 청나라에 잡혀 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을 때까지 조정 내부의 의논과 對淸關係 등 주변상황을 기록하였다.

 

삼학사에 대한 약전과 병자호란 전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에서 조선 지배층의 대내외적 대응방식을 이해한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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