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무오당적(戊午黨籍)

야촌(1) 2014. 7. 26. 00:40

■무오당적(戊午黨籍)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 / 향년 62세

 

김종직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佔畢齋),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강호(江湖) 숙자(叔滋)의 아들이다. 세조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성종(成宗)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임자년에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무오년에 화가 묘(墓: 부관참시를 말함)에 미쳤다.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이 총각 때 날마다 수만 자(字)를 기억하고 20세 때에는 문명을 크게 떨쳤다.

    어세겸(魚世謙)이 공의 시를 보고 찬탄하여,

“나는 그의 종 노릇 밖엔 할 수 없다.”

고 까지 말하였다.

 

계유년에 진사, 기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성종(成宗)이 문사들을 뽑았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학문과 문장으로 당대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니,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배워 얻는 것이 있었고, 한번 종직의 칭찬을 받으면 갑자기 유명한 선비로 되었다.

 

당대의 도학(道學)ㆍ문장가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일손(金馹孫)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ㆍ이종준(李宗準) 이원(李黿). 같은 여러 현인들은 그 중에도 뛰어났고, 그 밖에도 성공한 사람이 많았다. 《名臣錄》 《國朝記事》

 

○ 공이 상주 노릇하는 3년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마다 지나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홍유손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케 한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추강냉화》


○ 공의 체구가 왜소하여 어세공(魚世恭) 자경(子敬: 어세공의字)이 농담으로,

    “그에게서 누가 재주를 빼앗아 간다면 한 어린아이만 남을 거라.”

     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비명(碑銘)>


○ 성종이 처음 환취당(環翠堂)을 세우고 글 잘 짓는 신하들로 하여금 당기(堂記)를 지어 올리게 하고, 공을 시켜 등급을 정하게

     하였다. 그때 좌승지로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의 글이 겨우 삼하(三下)이고 나머지는 모두 낙제였다.

 

왕이 다시 공에게 명하여 짓게 하였는데, 붓을 들고 단번에 써내려가 한 자도 수정하지 않으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인중 위에 걸게 하였다. 서거정이 문형을 맡은지 26년 동안 사퇴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 조카에게 묻기를,

“바깥 의논이 나를 어떻다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들 너무 오래 문형을 잡고 있다고 싫어합니다.”

하였다. 거정이 실망한 빛으로,

“내가 그만두면 필경 김종직이 맡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공을 시기해서 한 말이다. 어떤 이는 무오년의 화가 여기에서 싹텄다고 하는 이도 있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고사(故事)에 대제학이 체직될 때는 나가는 이가 반드시 자신의 후임을 천거하게 되어 있었다. 서거정이 체직될 때 사람들은 모

     두 김공(金公)에게 촉망을 두었었는데, 거정은 그를 시기하여 홍귀달(洪貴達)을 천거하여 여론이 떠들썩하였다.

 

김시습의 시에,

“평생토록 가소로운 일은 귀달이 문장을 잘한다는 것이라네.”

한 것은 아마 그를 조롱함일 것이다. 《부계기문(涪溪記聞)/金時讓 著》


○ 조의제문(吊義帝文)은 분명히 뜻이 있어 나온 것이다. 공의 문집을 상고해 보면,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와 고풍(古風)

     에 화답한 시, 양 간문(梁簡文)과 당 문종을 읊은 두 수의 시 및 홍연(弘演)을 읊은 작품들이 모두 우연히 지은 것이 아닌 듯 하

     다.

 

생각건대, 공이 탕(湯)과 무왕(武王)을 비난할 뜻이 있었다면 차라리 김시습 처럼 서슴치 않고 행동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조 기묘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부에 이른 처지에서 이러한 말을 작품에 나타낸 것을 보면 옛날 예양(豫讓)의 이른바 신하로서 두가 지 마음을 품은 자이니, 부끄럽다 하지 않겠느냐. 《명재집(明齋集)》

 

○ 그가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단종조(端宗朝) 때 진사가 되었는데, 《청야만집(靑野漫輯)》에 말하기를,

    “단종이 을해년에 손위(遜位)하였고 추강(秋江)은 곧 점필재의 문인이며 갑술년에 났는데, 점필재와 함께 단종조에 진사가 되

     었다는 것은 착오이다.”

    고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효온은 과거보기를 그만두었고, 공은 곧 세조조(世祖朝)에 발신하였다.

그것은 늙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당시 의논이 그를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그의 전후의 출처가 조금 분명치 못한 점이 있었으니 기왕 세조를 섬기게 된 바에는 조의제문(吊義帝文)은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사관이었던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들이 사책(史冊)에까지 기록하기를,

“그 글(조의제문)을 지어 충성된 울분을 표시하였다.”

고 한 것은 무슨 소견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결백하게 꾸준히 나간 이는 오직 매월당(梅月堂) 한 사람뿐이다. 《축수편(逐睡篇)》


○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말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학문(도학)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생 사업이 오직 문장에 있었다. 그의 문집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고 하였다.

 

○ 공의 아버지 숙자(叔滋)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배워, 당시의 선비들로 약간 이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문하에서 수

     업하였다. 이승건(李承健)이 한림(翰林)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쓰기를,

     “남인(南人 : 영남인)들이 서로 추켜 올려서 선생은 제자들을 칭찬하고 제자들은 선생을 칭송하여 일당(一黨)을 지었었다.”

     고 하였는데, 그 뒤에 이극돈(李克墩)이 승건의 사초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고 일컬었다. 《정암연주(靜庵筵奏)》

 

김굉필(金宏弼)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 향년 51세

 

김굉필은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요,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공의 아버지는 뉴(紐)인데 무과에 올라 사용(司勇)이 되었다.

 

김굉필은 경자년에 생원과에 오르고,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고, 벼슬이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순천으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화를 당했으니 나이 51세였다. 중종(中宗)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정축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선조(宣祖) 을해년에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주었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는데, 배향된 오현(五賢) 중에서 공이 그 으뜸이다.

 

○ 공은 현풍(玄風)에 살았다. 젊을 때 호탕하고 뛰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으니, 거리에 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회초리로 때렸

     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보면 곧 피하여 숨었다. 장성하자 학문에 힘을 썼다.

 

처음에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김종직은 바로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 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염계(周㾾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쇄락(灑落)한 인품도 역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명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특출한 행실이 비할 데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밤중이 되어서야 잠을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사람들이 혹시 나라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알리요.”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글을 업으로 삼아도 오히려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 책 속에서 그 전의 잘못을 깨달았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기초이니 허노재(許魯齋)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

하였다.

 

나이 30이 된 후에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명양정(鳴陽正) 현손(賢孫)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 등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나이가 들고 덕이 높아져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명성을 숨겼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명신록》 《사우명행록》

 

○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특별히 서로 잘 지내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정여창이 공에게 장차 비방하는 논의가 일어날 것이니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권고했으나, 공은 듣지 않으면서,

 

“중[僧] 육행(陸行)이 불교를 가르칠 때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화환이 두렵도다.’ 하니, 육행은 ‘먼저 도를 깨달아 안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재화와 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간여하리오.’ 하였다 하니,육행은 비록 중이지마는 그의 말은 취할 점이 있다.”

하였다. 공에게 배운 이로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ㆍ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ㆍ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같은 분은 모두 학행이 뛰어난 제자이었다.


○ 어머니 한씨(韓氏)는 성품이 엄하고 예법이 있었다. 공은 아침마다 안부를 살펴 대청 아래에서 절하였다.

    혹시 불쾌한 기색이 있으면 공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고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어머니의 기뻐하심을 보고서야 물러 갔다.

 

일찍이 그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항상 마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을리하지 말 것이며 남이 혹시 너희를 비평하더라도 절대로 서로 맞서서 말하지 말아라.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려면 자기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을 것이라.”

하였다. 《동유연원록》


○ 내칙편(內則篇)을 모방하여 가범(家範)을 짓고, 의절(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가르쳐 더욱 인륜을 중시하게 하고, 아래

     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의 직책을 분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으니 안의 일은 계집종에게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을 도주(都主)ㆍ주적(主績)ㆍ주사(主辭)ㆍ주포(主庖)라 하였으며 밖의 일은 사내종에게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은 도전(都典)ㆍ전사(典辭)ㆍ전시(典廝)라고 하였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는데, 절하고 꿇어앉고 작업하는 것에 모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봉급의 차이도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비교하여 더 주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였으며 길사와 흉사의 경비도 풍년 들고 흉년 든 것에 따라서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다. 또 1일과 15일에 국법을 읽고 훈계를 듣는 규정이 있었다. 《경현록(景賢錄)》


○ 공은 늘 초립(草笠)을 쓰고 연자(蓮子) 갓끈을 매었다.

     노년에는 단칸방에 단정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고 글을 보며 밤이 깊어도 자지 않으므로 연자(蓮子) 갓끈이 책상에 대질리어

    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니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글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선록》


○ 공이 부참봉(部叅奉)이 되었을 때 귀복(鬼服 가장(假裝)한 옷)과 온갖 희롱을 일체 상관의 지시에 따라 행하였다. 공은 그 당시

     에 자신의 명망이 무거움을 알고 보통 사람과 구별되지 않으려고 힘썼다.

 

공은 처음에 호를 사옹(簑翁)이라 하면서,

“비록 큰 비를 만나 밖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는다.”

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바꾸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지어 날리는 것은 혼연히 처세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연원록》


○ 공은 유학을 진흥시키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 지방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찾아

     와서 그가 사는 마을에는 학도들이 거리를 메웠으니,경서를 배우려고 당에 올라도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자기가 사는 시냇가에 작은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호를 붙였다.

또 가야산(伽倻山)에 내왕하면서 학문을 강구했는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시에,

듣건대 김공이 거처하는 곳이 가야산이라 하니 / 聞說金公棲築倻山
응당 무이산(武夷山)이리라 / 應是武夷山者是也
한 것이 이것이다. 《연원록》


○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 현감으로 있을 때에 공이 방문하였다. 정여창이 금잔 하나를 만들어 두니  공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 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후일에 반드시 이것으로 남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그 후에 고을 원이 과연 이 때문에 장물죄(贜物罪)를 지었다고 하였다. 《경현록(景賢錄)》

 

○ 순천(順天) 사람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제사지내었고 이귀암(李龜巖)은 《경현록(景賢錄)》을 지었다.


○ 갑자년에 형벌을 더하니 공이 명을 듣고는 목욕하고 관디를 갖추었는데 얼굴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이것까지 상해를 받을 수 없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나라 일에 대하여 별로 건의한 적이 없었다.

    이에 공은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인즉,
겨울에는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 마시는 것이 도이지만 / 道在冬裘夏飮氷
날이 개면 행하고 장마지면 그침을 어찌 오로지 하랴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끝내는 변하게 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는 밭갈고 말은 탈 수만 있음을 믿으리오 / 雖信牛耕馬可乘
하니, 김종직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의 벼슬이 대관에까지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代氷
나라 일을 바로 잡고 세상 구제함을 내가 어찌 하리오 / 匡君救俗我何能
마침내 후배에게 오소(迂踈) 옹졸하다고 조롱 받겠지만 / 終敎後輦嘲迂拙
세리의 용렬함은 따를 수 없는 것이네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대개 공이 시에 나타낸 뜻을 싫어한 것이었으니 이로부터 김종직과 서로 분리되었다. 《사우명행록》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이른바 서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어느 때 어떤 일로 해서인지 상고할 수 없다. 지금 《점필재전집(佔畢齋 全集)》을 살펴보면, 다만 시문을 제일로 삼고 일찍이 도학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므로 한훤당이 이것을 질문한 것이다.

 

비록 스승과 제자의 분수가 중하다고 하지만 진실로 지기가 합하지 않으면 어찌 끝내 서로 분리되지 않겠는가. 또 어찌 어떠한 일에 드러나게 서로 배척해야만 서로 분리되었다고 이르리오. 《퇴계집(退溪集)》



●김일손(金馹孫)

   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 향년 35세

 

김일손의 자는 계운(季雲),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탁영자(濯纓子)이다.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고 대대로 청도(淸道)에서 살았다.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병오년에 생원에 장원하였고, 같은 해에 갑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 공의 아버지 맹(孟)의 자는 자진(子進)으로, 벼슬이 집의에 이르렀다.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ㆍ기

     손(驥孫)ㆍ일손(馹孫)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과거에 올랐다. 《허백정집(虛白亭集)》

 

○ 그가 청도(淸道)에서 아직 과거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 매양 좌도(左道) 향시(鄕試)에는 장원을 하였다. 일찍이 별시(別試)

     에 나갔을 때, 두 형 준손과 기손은 공의 힘을 빌어 함께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이 되자 공은 두 형의 책문(策文)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그것은 형들에게 먼저 장원을 시키고 자기는 뒤에 과거를 보아 장원을 얻으려함이었다.

 

두 형이 함께 과거에 올랐는데 준손(駿孫)이 첫째가 되었다. 후방 전시(後榜殿試)에서 고시관이 그의 작품인 줄 짐작하고 그를 시기하여 짐짓 둘째에 놓고, 민첨(閔怗)을 첫째로 합격시키니, 공이 듣고 성을 내며, “민첨이 어떤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방목을 상고해 보니, 병오년의 장원은 민이(閔頤)이다.


○ 성종(成宗) 임인년에 기손과 일손(馹孫)이 함께 뽑혔는데, 문묘(文廟)에서 석채전(釋菜奠)을 올린 뒤에  책문(策問)을 내어 과

     거를 보았다. 일손이 첫째가 되고 기손이 둘째로 뽑혔다.

 

왕이 친히 시권을 보고 기손(驥孫)을 갑과(甲科)로 발탁하고 특별히 공당(公堂)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방목을 상고해 보니, 기손(驥孫)과 준손(駿孫)이 임인년에 나란히 뽑혔다는데 아마 여기에 오자가 생긴 모양이다.


○ 공은 성품이 간략하고 높이 자처하여 남을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 공은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고, 그릇과 도량이 컸으며, 또 문장이 하해 같이 넓고 깊었다.

 《명신록(名臣錄)》

○ 그가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양남 어사(兩南御史)의 명을 받고 용인(龍仁)에 이르러 객관에 같이 묵었는데, 공이 강개하여 시

     사(時事)를 논함에 있어 과격한 말이 많았다.

 

정(鄭)이 누누히 말리며,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고 하니, 공이 문득 분연히 말하기를,

“사훈(士勛 정광필의 자(字)도 이처럼 저속한 의논을 하니 어찌 차마 기절이 없는 썩은 선비 노릇을 할까보냐.”

고 하였었다. 《월정만필(月汀漫筆)/尹根壽 著》


○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소장(訴狀)과 차자(箚子: 신하가 왕에께 올리는 간단한 상소문)의

     문장은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

     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다. 불행한 때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으나, 그 화의 본말과 신원(伸寃)을 다하지 못한 일은 후생으

     로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공의 묘를 옮기던 때에 남곤(南袞)이 지어 보낸 만시(輓詩)에 모두 갖추어 짓기를,

“귀신은 아득하고 어두우며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려우니 귀신과 천도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는 달라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는구나. 길고 긴 이 우주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니, 촉루의 즐거움이 인간의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 알랴. 달관으로 한 웃음에 부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한번 나기 매양 더딤이로다.

수백년이 걸려서야 겨우 한번 보게 되네. 그를 보고도 성취시키지 못하니 태평의 다스림을 어느 때에나 보랴. 무슨 다행으로 나는 그대와 동시대에 태어났네. 서한(西漢) 시대의 문장이요,

송 나라 원풍(元豊)ㆍ희녕(熙寧)시대의 인물이었네.

 

정치의 잘못됨을 한숨 쉬고, 통곡하며 옳은 일이라면 용감히 하였도다.

강관의 무리들이 옆에서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큰 칼 쓴 죄인으로 문득 사형장으로 간단 말인가.

 

세상 만사에 없는 일이 없구나. 동해 바다가 끝없이 넓도다.

지금은 세상이 바로 되어가 혹독한 법도 풀어지고

선하고 악한 것이 구별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무오년의 원통함은 아직도 신설(伸雪) 하지 못하는고.

 

춘추의 필법에는 내 임금의 허물을 휘(諱)하는 예가 있어 정공(定公)ㆍ애공(哀公)의 기록에는 숨긴 말이 많다 하나, 이렇게 춘추를 지은 성인은 하늘과도 같아서 후세 사람 따를 바 못되고 붓을 잡아 들은 대로 쓰는 것은 사가(史家)의 상례이다.

 

들은 바가 바르고 틀림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사견(私見)이다.

그것을 정리ㆍ편찬하는 데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으니

허위로 된 것이면 깎으면 그만인데 다만 뱃속의 칼이 터럭 속의 흉터를 억지로 찾아냈네.

 

위(魏) 나라 사람들이 국악(國惡)을 써서 길거리에 보인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로다.

벼슬 자리에서 직무를 행하지 못했다면 그 죄는 매를 치면 될 것이요,

 

현능한 인재에는 특별히 용서하고 감형하는 옛법도 있는 바다.

이런 말씀 아뢰어 임금의 의혹을 풀어 드릴 이 없구나.

 

10년의 세월이 지나니 식자들의 가슴에 영원한 슬픔이 맺혔도다.

성동의 낮은 언덕 초라하여 시체 감출 곳 되지 못하네.

 

사랑하는 자질들이 좋은 땅 가려 이장을 하려 하도다.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서 굽어 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솔개나 굼벵이나 가리지 않는데 하물며 이땅저땅 상관하랴마는,

인간에서 구구하게 성묘하고 제사드리기 편리함을 취함이네.

 

처량하다, 목천현(木川縣)의 구불구불한 산기슭이여.

후일 도지(圖誌)를 편찬할 제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 마오.”

하였다.

 

끝구절은 김공의 묘가 마땅히 도지에 기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속 여지승람(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에 낭관들이 그의 묘를 기록해 올렸더니 당상관 한 사람이

“그는 벼슬이 재상에 오르지 못하였고 또 근후한 사람도 되지 못하였다.”

하여 마침내 삭제하고 말았다. 이는 남곤(南袞) 만도 못한 사람이라 하겠다.

《패관잡기(稗官雜記)/조선 명종때 어숙권(魚叔權) 著》

 

○ 그의 생질 윤모(尹某)가 남곤(南袞)을 찾아가 보니, 곤(袞)이 매우 탄식하며,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였다. 윤(尹)이 말하기를

“공처럼 뛰어난 문장을 지닌 분이 이렇게 까지 저의 외숙을 칭찬하고 부러워하시오.”

하니, 곤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로 문장의 등급을 알지 못함이로다. 물에다 비하면 탁영(濯纓)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 어떻게 비교가 되겠느냐.”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윤근수(尹根壽) 著》



권오복(權五福)

    1467년(세조 13)∼1498년(연산군 4)/향년32세

 

권오복은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 본관은 예천(醴泉)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진사ㆍ문과에 오르고, 교리로 호당(湖堂)에 참여했다가, 무오년에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죽었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睡軒集).


○ 문장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높이 받들고 존중했다.

    일손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 손순효(孫舜孝)가 읍령(泣嶺)에 올라서 파괴령(破怪嶺)이라 이름을 고쳤더니, 공이 시를 지어,
     반드시 탐천(貪泉)이 은지(隱之)를 그르친 것이 아니니 / 不必貪泉誤隱之
     공연히 재[嶺] 이름을 가지고 무지한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라 / 休將名字駭無知
     구구하게 파괴(破怪)라는 이름이 도리어 괴이하게 생각되니 / 區區破怪還堪怪
     읍령에다 타루비(墮淚碑)나 새기게 하소 / 泣嶺須刊墮淚碑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공이 자작 시고(詩稿)를 김일손에게 고쳐 달라 하고 시 한 수도 지어 같이 보냈다.

     그 시에, 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을 졸(拙)하다 하지 말고 / 畵蛇着足休嫌拙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떼어 주오 / 須把風斤斲堊墁
     하였다.

 

     일손은 글로 답하기를,

     내게 영인(郢人)의 자귀[斤]가 없는데 / 吾無風斤何以
     어찌 향지(嚮之)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뗄 수 있겠느냐 / 斲嚮之之堊也
     하였다. <본집(本集)>

 

○ 흉포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이 정신 차려 조용히 죽음에 나갔다.

     그 기절의 강하고 굳셈은 천품으로 타고났으니 과연 어떠한가. 아아, 만사가 끝나고 무덤은 닫혀 말이 없다.

 

오직 그 남기고 간 문장이 하늘에까지 빛나고 북두에까지 뻗혔으며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이 오히려 그의 전형(典型)을 방불케 하고 무궁한 먼 생각을 자아내게 하니 그 무도한 형벌인들 어떻게 백세에 끼친 향기를 없앨 수가 있으랴.

 

교리 벼슬로 있다가 노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임으로 나온지 3년 만에 잡혀 죽으니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고집(嘯皐集)》 서(序)


○ 유고(遺稿)는 흩어져 거의 없어졌는데, 그의 종손(從孫) 달성 부백(達成府伯) 권모(權某)가 주워 모아 출판하고 또 당시에 화

     를 입은 이의 명부를 책 뒤에 붙였다. 《서애집(西厓集)》ㆍ무오당적발(戊午黨籍跋)


○ 천계(天啓) 연간에 어떤사람이 상을 당하여 묘지를 과천(果川) 지방에 정하였더니, 그 곁에 고분(古墳)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

     이 공의 무덤이었다. 그 집에서 일을 시작한지 며칠 지난 뒤에 자제 한 사람이 역사(役事)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역군의 잘못으로 고분 앞에 계절(階節) 돌 몇 조각을 빼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홍포(紅袍)를 입은 장자(長者)가 고분으로부터 나와 성낸 듯한 빛을 띄우므로 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 절하며 그 성명을 물었더니, 장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권한림(權翰林) 아무개다.”

하고, 무덤을 가리키며,

“저게 나의 집이다. 근자에 역군들이 와서 내 집을 짓밟고 뜰 돌을 빼내어 심히 불안하게 하는데, 그대는 어찌 금하지 않느냐.”

하였다.

 

그 사람도 선비이며, 본래 공의 사적을 잘 알고 있기에 청하여 묻기를,

“선생이 ‘항우가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부(賦)를 지으신 분이 아니요?”

하니,

“그렇다.”

하였다. 그 사람은

“예, 그러십니까. 빨리 고쳐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흥건히 온몸을 적시었다. 이튿날 고분 앞에 가서 깨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야승(野乘)》



●권경유(權景裕)

   ?∼1498년(연산군 4).

 

권경유의 자는 군요(君饒)인데 뒤에 자범(子汎)으로 바꾸었고, 호는 치헌(痴軒)이라 고쳤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成宗) 을사년에 문과에 올랐다. 남상(南床)으로 호당(湖堂)에 참여하고, 교리(校理-正‧從五品) 벼슬을 하였다.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날에 죽었다.


○ 공은 언어와 행동이 어리숙하였으며, 정사나 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리숙하였다.

     <탁영자(濯纓子)> <치헌기(癡軒記)>


○ 성품이 맑고 곧아서 속사(俗士)들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간신[諫臣: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언(諫言)하는 신하]의 풍모가 있었

     다. 교리로서 외직을 청하여 제천(堤川)으로 나가서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정사를 하니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이속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사관(史官)이 되었을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실었더니,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이 연산주에게 말하여 내정(內庭)에서 국문을 하는데, 실정대로 불지 않는 다고 붓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으나 강직하게 굽히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받았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성품이 강하고 굳세고 사물의 근본을 알았으며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추강집(秋江集)》

●허반(許磐)

  ?∼1498(연산군 4).

 

허반의 자는 문병(文炳)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무오년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從九品)로 있으면서 화를 입었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갑자사화에 능지처참된 대사간 강형(姜詗)의 사위이다.


○ 공은 매우 언변이 뛰어나고 허탄스럽고 협기가 있어, 문무 사부(文武士夫)ㆍ의술ㆍ점복하는 이들과 가기(歌妓)ㆍ악공들이 모

     두 그 밑에 와 굽실거리니, 스스로 잘났다 생각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 있다.”

고 하였다. 연산조 때 궁중 일을 조작해 말한 자라고 국문을 당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사우언행록》


○ 공이 성리학에 뜻을 두어 출세하는 데 욕심이 적고 일마다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다.

     사우(師友) 김굉필(金宏弼)은 그의 천성이 단아함에 탄복하였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사직서 참봉이 되었다.

 

그때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로 있었는데, 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이니, 뒷날 동방의 만 백성이 우러러 신뢰할 분인데, 지금 환시(宦侍)와 더불어 거처하면서 서연에 드시는 때가 적고 희롱하고 노는 때가 많다.”

하였다.



●강겸(姜謙)

   ?∼1504년(연산군 10).

 

강겸의 자는 겸지(謙之),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관찰사 자평(子平)의 아들이고, 대간 형(詗)의 아우이다.

성종 경자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ㆍ옥당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죽임을 당했다.


○ 그는 정대하고 절조가 있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표연말(表沿沫)

   1449년(세종 31)∼1498년(연산군 4)/향년50세

 

표연말의 자는 소유(少游)이고, 호는 남계(藍溪), 본관은 신창(新昌) 함양(咸陽)출신이다.

문과 감찰 계(繼)의 아들이고. 성종 임진년(1472)에 문과에 오르고 병오년(1486)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호당에 참여하고 벼슬이 동지 성균관사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교류하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공이 예문관에 봉직하고 있을 때 연회에 금육(禁肉 당시 국법으로 먹기를 금하는 고기)을 쓴 일이 있었는데, 임금에게 알려지게

     되자 공도 연회에 참여한 죄로 같이 파면되었다. 그 뒤로 향회(鄕會)에 금육을 내놓는 데가 있으면 곧 일어서서,

“다시는 법을 범할 수 없다.”

고 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지켰다. 김종직이 그때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있었는데, 그의 행실로 천거하여 한 계급 올리도록 하였다. 《추강냉화》



●홍한(洪澣)

   1451년(문종 1)~1498년(연산군 4)/향년 48歲

 

홍한의 자는 온진(蘊珍)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성종 을사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중종이 참판을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남을 칭도하는 일이 적었으니 권력 있는 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정여창(鄭汝昌)

   1450년(세종 32)∼1504년(연산군 10)/향년 55세

 

정여창의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 경술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벼슬이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갑자년 4월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55세였다.

함양(咸陽)에 장사 지냈더니 갑자년에 화가 미쳤었다.

 

중종(中宗) 반정후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또 정축년에 우의정을 증직하였다.

선조(宣祖) 때 문헌(文獻)이라 시호를 내리고, 경술년에 문묘에 배향케 하였다.


○ 공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 공은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지나가다

     공을 보고서 기이하게 생겼다고 칭탄하며 여창(汝昌)이라 지어주고 해설하는 글까지 지어 주었으니, 여창이란 이름은 능히 가

     문을 창성하게 하리라는 뜻이다. 《명신록》

 

○ 육을(六乙)은 벼슬이 병마우후(兵馬虞候)였다.


○ 포은(圃隱) 이후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주창되었는데, 뜻을 같이한 이가 곧 공이다. 김굉필은 이(理)

     에 밝고 공은 수(數)에 밝았는데, 불행한 때를 만나 비명에 죽었으니 애석하도다. 푸르른 하늘이라 어떻다 말하랴. 《병진정사

     록》


○ 공은 친구들과 사귀어 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직 김굉필과는 지기(知己)로 삼아 늘 도학을 논의하고 글을 강론하

     며 서로 떠나지 않았다. 《명신록》


○ 어머니 최씨를 지극히 섬겨 한번도 뜻을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꾸짖기를,

     “아버지 없는 아이가 배우지 않아 어찌하느냐.”

     하니, 공이 이 말에 감동하고 뜻을 굳게 하여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공부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자 옛사람들의 학문하는 법도로 가르쳤는데, 여러 해를 연마하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더욱 정통하게 되었다. 《동유연원록(東儒淵源錄)》


○ 공이 젊었을 때 술을 좋아하여 하루는 친구와 과히 마시고 취하여 들에 쓰러져 밤을 새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꾸짖기를,

“너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네가 이와 같이 행동하면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

하였다. 그가 깊이 자책하고 공부에 힘써서 임금이 내리는 술이나 음복할때 외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진정사록》


○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윈것을 마음 아파하여 스승에게나 친구를 찾아가는 외에는 늘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어린아이처럼 어머

     니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병오년에 어머니가 이질을 앓게 되자 향을 태우고 하늘에다 부르짖으며 제 몸을 대신하여 어머니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적삼을 적셨다. 《연원록(淵源錄)》


○ 일찍이 지리산에 구경가다 진산(晋山)의 악양동(岳陽洞)을 보고는 그곳의 산수를 사랑하여 섬진강(蟾津江) 어귀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장차는 그곳에서 늙으려 하였다. <행장(行状)>


○ 산수에 정을 붙여 풍월을 읊조리고, 혹은 강에 배를 띄워 노저으며, 혹은 시내에 낚시질을 하며, 때로는  소를 타고 쌍계(雙溪)ㆍ

     청학(靑鶴) 모두 동네 이름이다. 을 왕래하였다.

 

호숫가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편액을 악양(岳陽)이라 하고 공부하는 처소로 삼으니, 원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붐비어 들었다. 《연원록》


○ 지리산에 들어가 3년동안 나오지 않았다. 오경의 심오한 뜻을 다 깨쳤다.

     성종이 경자년에 성균관에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구해 들이라 하니, 관중(館中)에서 공이 제일이라 하였

     다.  지관사(知館事)로 있던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데려다 강경(講經)을 시키려 했으나 그가 하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공의 아버지 육을(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죽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 어렸었다.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예절을 한결같이 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성종 경술년에 이조 참의 윤극(尹克)이 효행과 학식이 사림에 비길 사람이 없다고 공을 추천하였다.

 

특별히 소격서 참봉으로 불렀더니,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자식된 도리로 당연한 일일 뿐이다. 효행이라 할 것이 무엇 있는가.”

하고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친히 붓을 들어 소장 끝에

“네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구나.”

하고 쓰고, 벼슬 사양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나와서 이 해에 문과에 오르고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사우명행록》

 

○ 연산(燕山)이 동궁으로 있을때, 설서(說書)로 있던 공이 동궁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자, 연산이 매우 싫어하였다. 마침내

     외임(外任)을 구하여 갑인년에 안음현감으로 나갔다. 《연원록》


○ 안음현감으로 있던 시절 공무의 여가에 그 고을에서 총명한 자제들을 뽑아 서재(書齋)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친히 가르쳐 일과

     로 강독을 하게 하니, 학자들이 듣고 먼데서도 찾아왔다.

 

봄ㆍ가을로는 양로예(養老禮)를 행하여 내외청(內外廳)을 베풀어, 안에서는 부인을 시켜 안 노인들을 대접케 하고,밖에서는 공이 관디를 하고 손수 접대하니 노인들이 모두 취하고 포식하여 가무를 즐겼다.

 

정사가 깨끗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니, 경내(境內) 백성들은 속임수로 공을 저버리지 말자고 서로 경계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안음현에 광풍루 제월당(光風樓霽月堂)이 있는데 그가 원으로 가서 세우고 이름 지은 것이다. 《여지승람》


○ 평생에 시(詩)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오직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바람에 잎사귀가 새록새록하니 / 風蒲獵獵弄輕柔
     4월 화개(花開) 고을 벌써 보릿가을[麥秋]이로다 / 四月花開(縣名)麥已
     두류산(頭流山) 천첩만첩 다 돌아본 후에 / 看盡頭流千萬疊
     외로운 배로 다시 큰 강 따라 내려온다 / 孤舟又下大江流
     라 하였다. 가슴 속에 한 점 티끌도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병진정사록》


○ 홀로 시를 전공하는 이를 취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시란 성정에서 발로하는 것이니 어찌 힘써 공부할 것이랴.”

     하였다. 《추강냉화》

 

○ 성품이 단정하고 침묵하며 몸가짐이 매우 엄하였다.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처자들이 그 살이 드

     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술도 마시지 않으며 고기 등속의 불결한 것도 먹지 않으며 쇠고기나 말고기도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마음속은 항상 깨어 있었다.젊어서 성균관에 거재할 때 남들과 잠을 자는데, 코를 골면서도 자지 않는 것을 남이 잘 몰랐다. 어느 날 밤에 최진국(崔鎭國)에게 들켜 그 사실이 밝혀지자 온 관중이 떠들썩하고,

“정모(鄭某)가 참선을 하느라고 자지 않는다.”

고 말을 하였다. 《사우명행록》


○ 일찍이 향회(鄕會)에 쇠고기를 내놓은 자가 있었는데, 어떤 자가 금물(禁物)을 썼다고 관에다 일러바쳐 죄를 당하게 되니, 모부

     인(母夫人)이 그 일을 깊이 걱정스러워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결코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유선록》


○ 무오년에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귀양갔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환난(患難)은 성인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며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종성(鍾城)으로 귀양간 7년 동안 태연히 있었다. 처음에 뜰에 피우는 화로를 돌보는 소임을 맡았었는데, 매양 사신이 공관(公館)에 들면 번번이 불피우는 심부름을 공손하게 잘 하였다. 《연원록(淵源錄)》 《경현록(景賢錄)》


○ 일찍이 《중용ㆍ대학주소(中庸大學註疏)》와 《주객 문답》 및 《진수 잡저(進修雜著)》 등을 지었는데, 무오년에 화가 일

     어나자 처자들이 모두 불살랐다. 《유선록》


○ 공의 학문은 주자(朱子)ㆍ정자(程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글을 읽는데는 이치를 궁구함을 우선으로 삼고, 마음을 쓰는데는

     속임이 없는 것을 위주로 하여 일용공부(日用工夫)가 성(誠)ㆍ경(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하는 율령(律令)과 조례(條例)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리는 데서 이미 그 단서를 볼 수 있었다. 한훤(寒暄 김광필)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뜻을 같이 하고 도가 합치되어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하여, 항상 함께 행동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좋은 말로 남긴 의논이 조금도 세상에 전하지 않고 평일의 저술이 무오년의 화에 불탔으니, 어찌 후학에게 한이 되지 않겠는가. 동계 정온(桐溪鄭蘊) 소론(所論)


○ 김일손(金馹孫)이 일찍이 공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금대암(金臺庵)에 이르렀는데 중들의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김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공부하는 방법이 정(精)하고 잡되지 않으며 진(進)하여 물러남이 없으니, 우리가 성현을 배우는 데에도 이렇게 공부를 하면 도를 얻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산 꼭대기에 속설에 ‘성모묘(聖母廟)’ 라고 불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김공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일찍이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만 못하겠느냐.’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김공이 그 말을 듣고 지내려던 제사를 그만두었다. 공은 이렇듯 동배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연원록》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

    미상~1504년(연산군 10)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은 자는 백원(百源)이며, 태종대왕의 별자(別子)인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손자이다.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며, 남효온(南孝溫)의 사위이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고. 온 가족이 모두 멀리 절도(絶島)로 귀양갔다.

 

병인년 6월에 공의 아버지 우산군(牛山君) 종(踵)과 형인 용성정(龍城正) 원(援), 아우 한산부정(韓山副正) 정(挺)ㆍ화원부정(花原副正) 간(揀)ㆍ금천부정(錦川副正) 변(抃)ㆍ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등 여섯 부자가 동시에 화를 입었다.

 

○ 공은 시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고기잡는 그물을 마련하여

    항상 손수 어선을 저으며 시인들을 맞아 날마다 좋은 시를 모으니 무려 천백 편이 되었다.

 

○ 일찍이 남효온(南孝溫)과 보제원(普濟院) 위에서 작별할 때 빈객들이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데, 공이 효온의 부채에다 시를 쓰

     기를,
     서로 알고 지낸 8년 동안 /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작별만이 잦네 / 會少別離多
     천리로 떠나는 손을 잡고서 / 臨分千里手
     눈물을 가리며 맑은 노래를 듣네 / 掩泣聞淸歌
     하니, 좌중이 모두 붓을 놓았다고 한다. 《추강집》

 

○ 공은 남효온(南孝溫)ㆍ김일손(金馹孫)ㆍ강경서(姜景叙) 같은 이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일찍이 들

     에 있는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그 음율이 살성(殺聲)을 발하므로 다음날 반드시 잡혀 갈 것을 짐작하였다. <족보(族譜)>


○ 공은 스스로 ‘구로주인(鷗鷺主人)’ 이라 부르며 고상ㆍ방종하여 구속받지 아니하였으니, 진(晋) 나라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서사(書史)를 읽고 시문을 배우며 음률을 해득하였으니, 모두 그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김뉴(金紐)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정말 궁중의 모란꽃이 개인 하늘 아래 난만하게 핀 것 같도다.”

하니,이유추(李有秋)가 그 말을 듣고,

“김(金) 재상이 귀가 있구나.”

하였다.

 

서호(西湖)에 정자를 짓고 늘 고기잡는 배를 띄워 놓으니 시인과 문사가 강 위에서 놀기를 끊이지 않았는데,속된 선비가 찾아오면 배를 저어 반드시 피하곤 하였다. 남효온의 시에,

“왕손이 배를 저을 줄 안다.『王孫解刺舟』”는 것이 이것이다. 한 형과 네 아우가 모두 그럴듯한 인물이었고,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일시에 죽음을 받으면서도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 《사우명행록》

 

○ 중종이 도정(都正)을 증직하고 숙종 을유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영종(英宗) 무오년에 군(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내려 소민공(昭愍公)이라 하였다.



강경서(姜景叙)

   1443년(세종 25)~1510년(중종 5)/향년 68세

 

강경서는 자는 자문(子文)이며, 호는 초당(草堂)이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정사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점필재(佔畢齋) 문하인으로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회령(會寧)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풀려 돌아왔다. 벼슬이 좌승지에 이르렀는데 뒤에 예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 공은 천성이 정직하고 강개하였다.

 

○ 일찍이 하인 하나가 공의 아들에게 달걀 몇 개를 보냈다. 부인 박씨(朴氏)가 물리치며,

     “어린아이라고 해서 어찌 남편의 맑은 덕에 누를 끼칠까보냐.”

     하였다.

 

○ 부인 박씨(朴氏)는 공이 곤장을 맞고 귀양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여 음식을 끊어 이듬해에 죽었다. 중종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

     하였다. 《여지승람》

 

●이원(李黿)

   1471년 추정~1504年(燕山君 10) / 향년 34歲

 

이원의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7世孫이며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다.

성종(成宗) 기유년(己酉年: 成宗 20, 1489)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랑(佐郞-正六品) 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곽산(郭山)으로 유배(流配) 되었다가 4년만에 다시 나주(羅州)로 이배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참형당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으로 신원되어 도승지(都承旨-正三品)에 추증되었다.


○ 공(公)은 기상이 당당하여 절개를 위해 죽을 각오가 있었으니, 어린 임금을 부탁할만 하였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남효온(南孝溫) 著》

 

○ 공의 아버지 공린(公麟)의 벼슬은 현령이다.

   그는 박팽년(朴彭年)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명이 절하면서 청하기를,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는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공린(公麟)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 공(公)은 하도 꿈이 기이해 자리에 일어나 신부를 깨워 물으니 전날 어머니 깨서 새 사위를 대접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자라를 구한후 부엌 도가니에 가둬 놓았다는 얘기였다.

 

이 말을 들은 공린은 신부와 함께 부엌에 들어가 자라 8 마리를 가까운 냇물에 살려 보냈는데(그중 한 마리는 죽었었다), 훗날 공린은 아들 8 형제를 두었고 이름을 모두 거북구(龜)자와 고기어(魚) 자를 넣어 오(鼇), 구(龜), 원(黿), 타(鼉), 별(鼈), 벽(鼊), 경(鯨), 곤(鯤),자(字)로 이름 지었다.

 

그뒤 모두가 문장(文章)에 뛰어나 팔별집 팔문장 으로 일컬어 졌는데 셋째아들 원(黿)이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형(斬刑)으로 죽임을 당하니 앞서 자라 한마리가 죽은일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그 후 경주이씨 팔별집은 18대(약540년)가 지난 오늘날 까지도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 오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 팔 형제를 순씨(荀氏)의 팔룡(八龍)에 비하면서 공을 지목하여 자명(慈明)이라 하였다.《부계기문(涪溪記聞)/김시양(金時讓)의 수필집》

 

○ 태상시(太常寺: 시호를 주는 것을 맡은 관청)에 있으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의정(議定) 하였다는 이유

     로 무오사화 때에 죄를 만들어 나주(羅州)로 귀양보냈다. 갑자년에 죄가 더하니 공의 종이 공을 업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공은

“임금의 명은 피할 수 없다.”

하였다.

 

종은 이장곤(李長坤)의 일을 인용하여 울면서 권고하였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형장에 이르러서도 말이 더욱 굳세니, 연산주가 더욱 노하여 형벌을 가등(加等)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이 일찍이 말하기를,

     “익재(益齋)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니, 두 집의 어짐이 한 사람에게 모이었다.”

     하였다.

 

○ 공의 아우 별(鼈)은 자가 낭선(浪仙)이다. 공과 함께 울면서 교외에서 작별한 후, 그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평산(平

     山)에 살면서 그의 당(堂) 이름을 ‘장륙당(藏六堂)’이라고 하였다.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고을의 노인과 더불어 낚시질을 하고 혹은 사냥도 하였으니 시를 읊고 술을 따르며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매양 술이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내가 우는 닭을 죽이려고 하나 순같은 성인이 있을까 염려된다.

죽이지 않으려고 하나 역시 도척(盜跖) 같은 횡포한 자가 있구나. 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에 울어 그치지 않으니 순과 도척이 함께 듣게 된다. 선과 악을 각기 힘쓰니 울지 않는 것은 닭의 천성이 아니다. 하였다.

《패관잡기(稗官雜記)》


○ 공은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영걸스러우며, 풍채가 뛰어나고 문장도 높고 깨끗하였다.

     비록 방랑불우(放浪不遇)한 때라도 슬퍼하고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한 평생 서적을 많이 보았지마는 성인의 도를 훼방한 글은

    읽지 아니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은 남의 문장을 추켜올리는 일이 적었는데 공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는,

“이보다 더 잘 지을 수 없다.”

하였다.

 

●이종준(李宗準)

   1458년(추정)∼1498(연산군 4) / 향년 42

 

이종준은 자(字)는 중균(仲鈞)이며, 호는 용재(慵齋) 또는 호를 장륙(藏六)ㆍ부휴자(浮休子)ㆍ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이라 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종(成宗) 을사년에 문과 제 2등에 올라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화를 입었다.

 

○ 공은 문장을 잘 짓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일찍이 서장관이 되어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역관(驛館)에 있는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칠해버렸다. 역관(驛官)이 통역을 불러 힐문하니, 통역은

“서장관이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므로 반드시 그 뜻에 만족하지 아니하여 그렇게 한 듯합니다.”

하니,역관이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니, 새 병풍 두 벌을 펼쳐 놓았으므로 공이 한 편에는 글씨를 쓰고 한 편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보는 사람이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 공은 당시에 풍류로 명성이 있었다. 일본 호송관(護送官)으로 임명되어 동래(東萊)에 이르렀는데, 나이 12, 3세 되는 기생이 있

     었다. 공은 그 기생을 몹시 사랑하여 이름을 방안아(榜眼兒) 공이 문과 제 2등이 되었었다. 라 고쳐주며,

“네가 시집가기 전에 내가 재차 사신갈 명을 받는다면 너와 인연을 맺을 것이니, 네 이름을 고치는 것은 그 뜻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공이 이 해에 북평사(北評事)로 임명을 받았으므로 남쪽과 북쪽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 오지 못하였다.

《추강냉화》


○ 권경유(權景裕)는 공과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남효온(南孝溫)이 어느 날 공과 함께 달밤을 이용하여 권경유의 집에 이

     르니, 경유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이하여 함께 달빛 아래 앉았다.

 

공이 짐짓 청수(淸瘦)한 태도로 대하니, 경유는 크게 탄복하고 꿇어앉아 옷자락을 받들었다. 밤새도록 실컷 이야기하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공인줄 알고 서로 크게 웃었다. 드디어 뜻이 통하는 벗이 되었다.

《사우명행록》


○ 신(申) 지평 아무개 이 집은 가난해도 술을 좋아하여 일찍이 자기의 호를 장륙(藏六)이라 하였다.

     공은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그 호를 바꾸자고 청했으나, 신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무오년에 북계(北界 함경도(咸鏡道))로 귀양가는데,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가다가 옛적 송 나라 이사중(李師中)이 지은

     “바른말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던 외로운 충성을 다른 이는 따르지 못하리라 자신한다.『孤忠自許衆不與』”

는 율시 한 수를 벽 위에 써 놓고 갔다.감사가 이것을 임금에게 알리니, 연산주는 원망하는 뜻이 있다고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 홍귀달(洪貴達)이 공을 구하려 했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이목(李穆)

   1471년(성종 2)∼1498년(연산군 4) / 향년 28

 

이목(李穆)의 자는 중옹(仲雍)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젊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다.

열 아홉살 기유년에 진사가 되고, 을묘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호당에 참여하고 영안 평사(永安評事)가 되었다. 무오년에 화를 입고 갑자년에 화가 묘에까지 미쳤으니, 그때 나이는 28세였다. 공주충현서원(公州忠賢書院)에 배향되다.


○ 공은 뜻이 높고 기운이 세찼다. 성종이 언젠가 병이 나서 대비가 무당을 불러 기도를 올리는데, 성균관(成均館) 안 벽송정(碧松

     亭)에다 굿을 차려 놓았었다. 공이 유생들을 데리고 나와 무당을 매질하여 내쫓았다.

 

무당이 궁중에 호소함에 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병환이 나은 뒤에 이 말을 고하였더니, 왕이 거짓 성을 내어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을 모두 적어 들이라 했다.

 

유생들이 필경 크게 견책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모두 피해 숨었는데, 공은 혼자 숨지 않았었다. 왕이 조금 뒤에 대사성을 불러 전교를 내리기를,

“네가 능히 여러 유생들을 인도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을 바르게 하였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고, 특별히 술을 내려 주었다. 《명신록(名臣錄)》


○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이 되어 마음대로 정사를 하는데, 마침 그때 가뭄이 들었다.

     공이 상소를 올리기를,

“윤필상(尹弼商)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되리이다.”

하였다. 필상이 길에서 만나 그를 불러,

“자네가 꼭 늙은 나의 고기를 먹어야만 하겠는가.”

하니, 공이 말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 뒤에 필상이 왕에게 대비의 뜻을 따라 불교 숭상하기를 권하니, 공이 유생들을 거느리고 필상의 간사함을 논하여 간귀(奸鬼)로 지목하고 주살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친히 묻기를,

“네가 어찌 정승을 귀(鬼)라고 욕하느냐?”

하니, 공이 아뢰기를,

“그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귀(鬼)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장차 옥에 가두려하다가 다른 정승들이 힘써 구하므로 공주(公州)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 일로 인해 그가 곧다는 소문이 더욱 떨쳐졌다.

 

을묘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무오년 옥사가 일어나자, 과연 필상(弼商)이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과 함께 얽어 넣어 참혹한 화를 입었다. 사형에 임하여 기색이 조금도 평상과 다름이 없고, 스스로 절명가를 지었다. 필상은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았다. 《명신록(名臣錄)》

 

● 이수공(李守恭)

   1464년(세조 10)~1504년(연산군 10) / 향년 41

 

이수공의 자는 중평(仲平)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요,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이다. 성종 무신년에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가 광양(光陽)으로 옮겨 갑자년에 사사(賜死) 당하였으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중종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었다.

 

●이주(李冑)

   1468년(세조 14)∼1504년(연산군 10) / 향년 37歲

 

이주는 자는 주지(冑之)이며, 호는 망헌(忘軒)이요,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용헌(容軒) 원(原)의 증손(曾孫)이다. 성종 무신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무오년에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 공은 어질고 글을 잘 지었다. 시의 격조는 옛태가 있었으며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정언이 되어 나라 일을 말

     할 때에는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다. 임술년 봄에 남효온(南孝溫)이 귀양살이하는 진도(珍島)로 공을 방문하여 벽파정(碧波亭)

     에서 유숙하였다. 뒤에 연산주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사우명행록》



정희량(鄭希良)

   1469년(예종 1)~1502년(연산군 8) / 향년 34歲

 

정희량의 자는 순부(淳夫)이며, 호는 허암(虛庵)이요,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임자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김해(金海)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괴이한 재앙으로 인해 모든 죄수를 놓아줄 때 돌아왔으나 갑자년 5월에 멀리 도망갔으니,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나이는 34세였고 아들이 없었다.

 

○ 공은 높은 절개를 좋아하여 나쁜 사람과 같이 있거나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학문을 널리 닦아 통달하였는데, 더욱 역학(易學)의 수(數)에 조예가 깊었다.

 

○ 성종(成宗)이 세상을 떠나 성복(成服)을 하고 나서, 대행왕(大行王 성종)을 위하여 불사(佛事)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렸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서해도(西海道 황해도)로 귀양갔다가 조금 후에 석방되었다. 그 해에 과거에 뽑혀 예문관에 있었는데, 또 궁중의 잘못한 일을 극력으로 논난하였다.

 

○ 무오년에 의주(義州)로 귀양갔다. 귀양가 있는 동안에 술을 빚어 마시니 그 술은 거르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으므로 술 이름을

     ‘혼돈(混沌)’ 이라 하였으니 태고 때의 순박함을 숭상함이었다. 술이 취하면 번번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나는 내가 빚은 탁주를 마시고 / 我飮我濁
나는 내가 타고난 천진(天眞)을 온전히 한다 / 我全我天


나는 술을 스승으로 삼으니 / 我乃師酒
성인(청주의 숨은 말)도 현인(탁주의 숨은 말(隱語))도 내 스승이 아니다 / 非聖非賢


자기의 즐거움을 즐기는 이는 마음으로 즐기게 되니 / 樂其樂者 樂於心
늙음이 장차 닥쳐옴도 알지 못한다 / 不知老之將至


사람들이 누가 나의 술 즐겨함을 알리오 / 人孰知餘之樂是 酒也
하였다. <본집>

 

○ 경신년에 김해(金海)로 옮기었다. 그 이듬해 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분상(奔喪)하지 못하여 늘 울적하고 슬픈 마음

     을 품고 있었으나 하늘에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참에 수로왕능(首露王陵)이 자못 영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애사(哀詞)를 지어 호소했는데, 글에 성명은 쓰지 않고 정(鄭)자를 나누어 전읍(奠邑) 두 자로 썼다.

 

그날 밤 꿈에 눈동자가 겹으로 된 매우 위대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너는 장차 놓여날 것이다.”

하였다. 공이 꿈을 깨어 여러 벗들에게 이야기하고 또 기록하여 간수해 두었더니, 그해 겨울에야 놓여 나왔다. 《금관지(金官志)》


○ 공은 젊을 때부터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특히 시를 잘하였다. 성품과 기질이 강건하여 생과실을 몇 말을 먹어도 체하

     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탁주는 큰 그릇으로 세 그릇을 마시고 청주는 두 그릇을 마시며 소주는 한 그릇을 마시는데, 술에 따라 양(量)을 조금씩 줄이되 반드시 먼저 가슴을 씻는다. 잔으로 예를 차려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다만 큰 사발로 거뜬히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 공은 음양학(陰陽學)에 능통하였는데 서울 안에서 명운(命運)을 잘 추산(推算)하기로 소문난 사람에게

    반드시 가서 질문해 보고는,

“엉터리구나.”

하였다.다만 주부(主簿) 오순형(吳順亨)에게는 굴복하면서,

“이 사람이 추산하는 것은 정확하여 허황한 점이 없는데, 다만 세상을 겁내어 그 재주를 다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추산하여 보았는데, 난 시[生時]가 확실하지 않았으므로 탄식하기를,

“만약 아무 간지(干支)에 났으면 크게 귀하게 될것이고, 아무 간지에 났으면 말할 수 없이 나쁘다.”

하면서 매양 세상을 피해 도망갈 의사가 있었다.

 

김해(金海)로 귀양갔다가 놓여 와서 어머니 상을 입고 고양(高陽) 《사재척언》에는 풍덕(豊德) 또는 덕수현(德水縣) 남쪽이라 하였다. 에서 시묘 살이를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우리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5월 5일에 종들을 밖에 내보내고 홀로 나가서 밭 두렁을 거닐고 있었다. 아이 종이 찾아오니,

“너는 필관채(筆管菜)를 캐어서 저녁 반찬이나 준비하라.”

고 보내버렸다.

 

아이 종이 돌아오니 공은 있지 아니하였다. 이웃 사람을 불러 사방으로 샅샅이 뒤를 밟아 찾았으나,다만 남강(南江) 조강(祖江)의 상류(上流) 가의 모래밭에 신 두 짝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반드시 강물에 빠졌을 것이라고 하여 잠수하는 사람을 모아 가지고 잠수와 배로 강의 위 아래를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는 찾지 못하였다. 공의 친족 해평군(海平君) 정미수(鄭眉壽)가 각 고을에 공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리어 찾아보자고 청하니,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가서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

하였다.

 

마침내 그 흔적도 모른 채 얼마 안 가서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니, 사람들은

“그가 자취를 피해 숨은 것이고 죽은 것이 아니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상한 중이 서쪽 여러 산에 왕래하는데 일찍이 희량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분명히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하며, 혹은

“머리를 깎지 않은 채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가 되어 종적을 숨기고 왕래한다.”

하였다. 《사재척언》 《용천담적기》


○ 가천원(加川院)의 벽 위에 절구 두 수가 있는데, 그 절구에,


     새는 무너진 담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頹垣穴
     중은 석양의 샘물을 긷네 / 僧汲夕陽泉
     산과 물로 집을 삼은 손님아 / 山水爲家客
     천지는 어디가 끝간 데인고 / 乾坤何處邊
     하고, 또


     전일 바람 비에 놀라 / 風雨驚前日
     문명한 이때를 저버렸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도 천지간에 노니 / 孤笻遊于宙
     시끄러움이 싫어져 시까지 짓지 않으련다 / 嫌閙並休詩
     하였다.

 

이행(李荇)이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는,

“이것은 반드시 허암(許庵 정희량(鄭希良))이 지은 것이라.”

하고 원(院)의 주인에게 물으니,

“누더기를 입은 중이 조금 전에 이곳을 지나다가 쓴 것입니다.”

하였다.

 

이행은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써 놓고 남을 의혹시키는 것이니, 허암이 쓴 것이 아니다.”

하였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사주 보는 사람 김륜(金倫)이 젊을 때 향산(香山)에서 놀다가 이천년(李千年)이란 도사를 만나 육칠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술

     수를 배웠다. 후에 부모를 뵙기 위해 그를 작별하고 영동(嶺東)으로 돌아올 때, 기해년에 강서(江西)의 구룡산(九龍山)에서 만나기로 서로 약속하면서 손수 시를 써서 주었는데,


여든된 산속의 늙은 이는 / 八十山中老
삼팽(三彭)을 벌써 소제해 버렸네 / 三彭已掃除


인간 세상을 꿈꾸지 않을 것이며 / 人間應不夢
학(鶴)과 짝하는 외에 다른 뜻은 없도다 / 鶴伴意無餘


누운 평상에는 달빛만 차갑고 / 雪榻蟾光冷
구름 창에는 해 그림자가 희미하구나 / 雲牕日影踈


티끝없는 거울(맑음)이 / 誰知無累鑑
만 세 동안 절로 맑고 깨끗함을 누가 알리오 / 萬代自淸虛
하고,

“정묘년 늦은 봄에 송죽처사(松竹處事) 우재(愚齋)가 쓰다.”

하였고, 또 단계(丹溪)에 이르러 시를 써서 주었으니,

한가함 얻어 한 번 취함이 하늘의 놀이인데 / 偸閑一醉是天遊
이 가운데 강바람은 손님을 만류하네 / 箇裏江風挽客留


탁목봉이 높으니 하늘이 가까운 듯 / 啄木峯高天若近
수림정 아래에는 땅이 둥실 뜬 듯 / 秀林亭下地疑浮


두 낭자의 혼백은 천 년 전의 일이고 / 二娘魂魄千年事
아홉 굽이 강물은 만고에 흐르네 / 九曲江聲萬古流


가슴 속에 진루가 오래 끼었더니 / 胷海久牽塵累擾
단계에 이른 이 날 내 근심을 씻도다 / 丹溪此日洗吾愁


하고, “계사년[黑蛇之歲]에 우옹(愚翁)이 쓰다.” 하였다.

공을 모시던 나이 열서넛된 아이에게도 역시 시를 써서 주었으니,천지간에 집이 없는 산수 손님은 / 天地無家山水客
생애가 한□ 뜻은 평안하네 / 生涯一缺意如如
이끼 낀 산길은 흰구름에 잠겼는데 / 苔痕山路白雲鎖
달그림자는 맑고 차고 대그림자는 성기네 / 月影淸冷竹影踈

푸른 산에는 구름이 만 겹이고 / 碧山雲萬疊
푸른 바다는 끝없이 넓도다 / 滄海濶無邊
묻노니 무슨 일로 / 爲問緣何事
돌아갈 마음 대궐로 향하는고 / 歸心北闕懸
하였으니, 시의 격조가 높고 글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데리고 다니는 아이도 시 짓는 솜씨와 글쓰는 법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그가 평범한 방사(方士)가 아님이 분명하다. 김륜(金倫)은 일찍이 공이 기록한 생년 월 일 시(生年月日時)의 오행(五行)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판사 신경광(申景光)이 점치는 것을 좋아하여 선비와 높은 관직에 있는 이의 오행(五行)을 기록해 두었는데 공의 사주도 역시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김륜이 서울에 왔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면서,

“이것은 우리 스승 이천년(李千年)의 팔자라.”

고 하였다. 이로써 그가 죽지 않았음을 더욱 믿게 되었다고 한다. 《사재척언》


○ 한 수재(秀才) 혹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라고 한다. 가 산중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는데, 한 늙은 중이 곁에 있다

     가 그 태도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이따금 구두의 틀린 것을 고쳐 주었다. 수재는 그 중이 허암인가 의심이 나서,

“당신이 주역을 아시오?”

하니, 중은

“모르오.”

하고 사양하였다.

 

“주역의 내용은 매우 깊어서 읽기 어렵소.”

하니,

“선비의 주역 읽는 것을 보니 능히 통달하였소.”

하였다.

 

또 문답하기를,

“당신이 정허암을 아시오?”

하니,

“모르오.”

하였다.

“허암은 정희량의 호입니다.”

하니,

“그 성명은 자못 듣고 있으며 그 사람된 품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허암이 종적을 숨기고 나오지 않으니, 아까운 일입니다.”

하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정아무『鄭某 정희량을 말한다.』는 어버이의 상중에 시묘 살이를 하다가 상례를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피해 도망갔으니 충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효도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여 죄가 크니 무슨 낯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겠습니까.”

하고, 조금 후에 작별하고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축수편>


○ 사화가 일어나서 사림이 모두 살해되니, 집 안에 간수해 둔 사초도 보존된 것이 없었다. 후일에 연산군 일기 수정청(燕山君日記修正廳)에서 사초 구하기를 몹시 서두르니, 공의 자제들이 집 벽 속에서 사초를 찾아 바치었다. 이에 힘입어 일기를 편수하였으니 대개 사화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사초를 감춰 두었던 것이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정승조(鄭承祖)

   생졸년 미상

 

정승조는 자는 술이(述而)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종(成宗)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감찰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최부(崔溥)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 향년 51歲

 

최부는 자는 연연(淵淵)이고, 호는 금남(錦南)이요,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성종 임인년에 진사과와 문과에 올랐고, 병오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을 거쳐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 공은 널리 학문에 통하고 잘 기억하였으며, 영웅호걸의 기상이 있어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 성종 때 공은 사간이 되었고 정광필(鄭光弼)과 남곤(南袞)은 좌우 정언(左右正言)이 되었다. 공이 계축(契軸)에 시를 썼는데

     그 끝 글귀에,

“뒷사람이 손으로 가리키고 어루만질 적에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스럽다 할는지 모르겠네.”

였으니, 이 글귀가 비록 우연히 지은 것이지만, 그 글 뜻을 음미하여 보면 오로지 정(鄭 충성됨)ㆍ남(南 간사함) 두 분의 뒷날 행사를 위해 말한 것인 듯하다. 《기재잡기》

 

○ 공은 나주(羅州)사람이고 응교가 되었다. 송흠(宋欽)은 영광(靈光)사람이다. 정자(正字)가 되었다.

    같은 때에 옥당에 있었는데 함께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서로 시오 리 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 날 송흠은 공을 방문하였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에 공이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

하니, 송흠은

“역말을 타고 왔네.”

하였다.

 

공은

“나라에서 주는 역말은 그대의 집까지이고, 그대의 집에서 내 집에 오는 것은 사사 걸음인데 어찌 역말을 타겠느냐.”

하였다. 조정에 올라와서 공이 이 뜻을 임금에게 아뢰어 그를 파면시켰다. 송흠이 공에게 와서 하직하니 공은

“그대같이 나이 젊은 사람은 이 후에도 마땅히 조심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전언왕행록》

 

○ 공은 교리가 되어 제주(濟州)에 왕명으로 심부름 갔다가 성종 19년 무신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었다. 아버지의 상사

     (喪事)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여 중국 절강 태주부(浙江台州府)로 갔었는데 중국에서 관원을 시켜 데려다 주었다.

 

성종이 공에게 ‘표해록(漂海錄)’ 을 지으라 하므로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지어 바치고 그 후에 아버지의 초상에 갔으니,사람들이 이 일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였다. 공이 일찍이 중국 사람을 만나 명수(命數)를 추산해 보니, 다만 고시(古詩)

“고소성 밖의 한산사, 밤 종소리가 객선(客船)에 들려오네.”

를 써 주므로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뒤에 표류해서 태주(台州)에 이르러 밤에 종소리를 듣고 물으니, 그 곳이 곧 한산사 고소성이었다. 《국조기사》



●붙임 신영희(辛永禧)

   1442년(세종 24)~1511년(중종 6)

 

신영희는 자는 덕우(德優)이며, 호는 안정(安亭)이요,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대제학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계묘년에 진사과에 올랐으나 과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 호방하여 구속을 받지 않고 대절이 있어서 세속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선비의 기개를 보면 옛날 동한(東漢) 시대 말기와 같으니 멀지 않은 시일에 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속히 숨으라.”

하였다.

 

공은 갑자기 직산(稷山)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들과 함께 죽림우사(竹林羽士)라 하였는데 문장과 행의(行義)가 한 시대의 영수가 되었다. 작은 당을 지어 당 이름을 안정(安亭)이라 하였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산장을 지나가다가 시를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노인이라 하니 어찌 알지 못하랴 / 村號老人那不識
동네 이름을 빈사라 하니 이를 좋아해서 온다 / 里名貧士愛玆來
나뭇군 아이는 선비의 풍류가 멀어져 감을 알지 못하지만 / 樵兒不識風流遠
오히려 사산 별곡만은 부르고 있네 별곡(別曲)은 공이 지은 것이다 / 猶唱蛇山別曲回
하였으며, 김종직이 일찍이 공의 남정시(南征詩)를 보고,

“이 시는 마땅히 청산 백석(靑山白石) 사이에서 읊어야 될 것이라.”

하였다. 《해동잡록》

 

김굉필이 일찍이 나를 책망하기를,

“그대와 벌써 교분을 끊으려고 해도 정리상 차마 끊지 못했다.”

고 하므로 내가 물으니,

“그대가 아니었다면 능히 결단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백공(伯恭) 남효온(南孝溫)과 백원(百源) 무풍정(茂豊正)과 정중(正中) 수천정(秀泉正)과 문병(文炳) 허반(許磐)은 모두 진(晋) 나라 선비들의 풍습이 있다. 진 나라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 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신영희(申永禧)가 지은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김굉필이 신영희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화가 멀지 않은 시일에 일어날 것이니, 나같은 사람은 진실로 면할 수 없지마는 그대는 멀리 피하라.”

하고 드디어 서로 교분을 끊었다. 남효온(南孝溫)의 병이 위독하여 김굉필이 가서 문병하였으나 효온이 거절하고 보지 않으므로 굉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효온은 벽을 향해 누워서 말 한 마디 없이 영원히 결별하였으니, 이는 굉필과 절교하는 것이었다.

굉필이 영희를 끊으려고 한 것과 효온이 굉필을 끊으려고 한 것은 세상 일이 어지럽고 위태한 관계로 철인(哲人)이 아니면 능히 화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연원록》

 

○ 공은 기개가 있어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남의 계집종을 관계하여 그 주인에게 욕을 보았으므로

    마음에 불평을 품고 죽었다. 《소문쇄록》

 

붙임 수천부정(秀泉副正)

   생졸년 미상

 

수천부정(秀泉副正) 이정은(李貞恩)은 자는 정중(正中)이며, 호는 설창(雪窓) 또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이다. 익녕군(益寧君) 나(袳)의 아들이며 태종(太宗)의 손자이다.

 

○ 공은 음률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났다. 슬프게 악기를 타면 길가는 사람도 반드시 울었다.

    날마다 시와 술을 즐겼으니 무풍정(茂豊正)과 명성이 같았다.

 

김굉필의 꾸짖음을 듣고는 자신의 옛 습관을 모두 고쳤으나 일부러 속된 태도를 취하면서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아니하고 감히 예전 친구들과 내왕하지 아니했으니 과연 혼자 몸을 보전하였다. 사람된 품이 독실하고 겸손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사우명행록》



●붙임 홍유손(洪裕孫)

   1431년(세종 13)~1529년(중종 24) / 壽 99歲

 

홍유손은 자는 여경(餘慶)이며, 남양 향리(南陽鄕吏) 순치(順致)의 아들이다. 호는 조총(蓧叢) 또는 광진자(狂眞子)라고 하였다.


○ 일찍이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을 보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김종직이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하는 뜻을 알았다.”

고 하니 배우는 이가 모두 그를 따랐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고 서울에 와서 김종직에게,

“세상 일에 대하여 건의하지 않고 어찌 공연히 벼슬만 하고 있느냐.”

고 간하였다.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불교와 노자(老子)를 미워하면서도 행하는 일은 한 가지도 불교와 노자를 벗어난 것이 없다. 둥글게 행하고 모난 것을 싫어함은 노자의 사상이고, 자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라.”

고 하니 김종직이 크게 미워하였다. 이로부터 매양

“여경(餘慶)이 간사하다.”

고 하니 공도 또한 자기를 감추고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조위(曹偉)

   1454년(단종 2)~1503년(연산 9) / 향년 50歲

 

조위는 자는 태허(太虛)이며, 호는 매계(梅溪)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영의정 석문(錫文)의 종질(從姪)이다.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처 호조 참판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또 순천(順天)으로 옮겨졌다.

계해년에 죽으니 나이 50세이었으며 갑자년에 추형(追刑)하였다.

 

○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넓었다. 시문을 잘하여 문장으로 성종에게 크게 우대를 받았다.

 

○ 성종 때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갈 때 특별히 한 계급을 올려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임명되었다.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임금의 우대가 극진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동각잡기》

 

○ 매양 세말에 지은 시를 임금에게 올리게 하니 임금의 마음에 맞았으므로 그 부모에게 곡식을 내려주게 하였다. 군수로 있을 때

     품계가 찼고 어버이 상을 당하자 또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는데, 지방관에게 부의의 특전을 내리는 것은 그 전에는 없었던 일

     이었다. 《소문쇄록》

 

○ 공은 김종직의 처남[妻弟]이다. 성종이 명을 내려 김종직이 지은 시문을 편집하게 하니 공이 조의제문(吊義帝文)을 문집 첫머

     리에 실었다. 연산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柳子光)이 참소하기를,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은 것은 자못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였다.

 

이때 공은 하정사(賀正使)로서 연경(燕京)에 가 있었는데, 연산주는

“공이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바로 베어 죽이라.”

하였다.

 

공의 일행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비로소 그 말을 들었다. 공의 서제(庶弟) 신(伸)이 일찍이 요동에 점 잘 치는 사람 추원결(鄒源潔)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른 말은 없고 다만 두 글귀의 시를 써 주었다.

 

그 시에,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 나오나 / 千層浪裡飜身出
응당 바위 밑에서 세 밤을 유숙한다 / 也須巖下宿三宵
하였다.

조신(曹伸)이 공에게 보고하기를,

“첫 글귀는 화를 면할 듯도 한데,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서로 함께 슬피 울었다. 압록강까지 돌아와서 바라다보니 강가에서 관원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행은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으니 의금부 도사가 와서 형벌을 행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서로 마주 보고 목이 메이도록 울면서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강을 건너서야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그를 구해 내어 다만 잡아다가 문초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일행은 기뻐하면서 그제야 점 치는 사람이 써 준 시의 첫 구절이 이것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으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지 못했는데, 마침내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順天)으로 귀양갔다가 병들어 죽으니 고향인 금산(金山)에 장사 지내었다.

 

갑자년에 화가 일어나자 그 전의 죄를 추록(追錄)하여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었다. 시체를 끌어 내어 묘앞 바위 밑에 두고 3일 동안이나 내버려 두었으니 조신은 그제야 두 글귀가 모두 맞은 것을 깨닫고 괴이하게 여겨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박한주(朴漢柱)

   1459년(세조 5)~1504년(연산군 10) / 향년 46歲

 

박한주는 자는 천지(天支)이며, 호는 우졸자(迂拙子)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성종 을사년에 문과에 올라 헌납에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벽동(碧潼)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말이 곧고 간절하였다. 지방으로 나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어서는 고을을

     태평하게 다스렸다. 연산군이 그를 불러 간관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의견을 아뢰기를,

“후원(後苑)에서 말을 달리고 공을 차며 용봉장막(龍鳳帳幕)을 펼쳐 놓고 잔치 놀음하는 때가 많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러한 정사를 하십니까.”

한즉,연산군이 노하여 답하기를,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하였다.

 

이에 박한주는 “이것은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임금님의 사사로운 물건입니까.” 하였다. 이어 노사신(盧思愼)ㆍ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탄핵하자 마침내 그들에게 무함을 당하였다.



●임희재(任熙載)

   1472년(성종 3)~1504년(연산군 10) / 향년 33歲

 

임희재는 자는 경여(敬輿)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요, 임사홍(任士洪)의 아들이다.

무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 공은 글씨를 잘 썼다. 일찍이 한 절구를 병풍에 쓰기를,
     요. 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 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 秦皇何事苦蒼生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 不知禍起蕭墻內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 虛築防胡萬里城
     하였다.

연산주가 어느날 갑자기 사홍의 집에 갔다가 이것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

하니, 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에 연산이 노한 기색을 띄면서,

“경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다. 내가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니, 사홍은 꿇어앉아 아뢰기를,

“이 자식의 성질과 행실은 전하의 말씀처럼 온순하지 못합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화를 입었다. 혹은

“공이 일찍이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아들을 참소했다.”

고 한다. 《국조기사》



●강백진(康伯珍)

   1449년(세종 31)~1504년(연산군 10) / 향년 56歲

 

강백진은 자는 자온(子韞)이며, 본관은 신천(信川)이요, 김종직의 사위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올라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유정수(柳廷秀)

   1451년(문종 1)~1502년(연산군 8) / 향년 52歲

 

유정수는 자는 국준(國俊)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성종 계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때 장령의 신분으로 극력 구원하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고 초산(楚山)으로 귀양가니 울분이 쌓여 병들어 죽었다. 아들 관(灌)은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강혼(姜渾)

   1464년(세조 10)~1519년(중종 14) / 향년 56歲

 

강혼은 자는 사호(士浩)이며, 호는 목계(木溪)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생원과에 장원하고 성종 병오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놓여 돌아왔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벼슬이 숭록대부 판중추(崇祿大夫判中樞)에 이르고 진천군(晋川君)으로 책봉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 공은 문명(文名)이 김일손(金馹孫) 다음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연산주가 말년에 그 첩을 잃고 매우 슬퍼하여 여러 신하를 시켜 제문을 짓게 할 때 공이 제문을 지어 그 슬프고 쓰라린 형상을 지극히 다하여 표현하니, 연산주가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연산주에게 자못 사랑을 받았으나 선비들의 공론은 그를 천하게 여기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도승지로서 반교문(頒敎文)을 짓게 되었는데, 문득 썼다가 도로 지워버려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하니 사람들이 도깨비 글이라 하였다.

 

아마 밤에는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밝은 날에는 스스로 기운을 잃은 것을 말한 것이다.

《음애일기》 《국조기사》

 

○ 공은 젊을 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게 된 뒤에는 학문을 가지고 음란한 정치를 아름답게 꾸며 아

     첨하였으니 궁인(宮人)의 애사(哀詞)와 재소(齋疏)를 짓는데, 그 곱고 아름다운 문장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더하여 갑자기 승진하여 도승지가 되니, 관계(官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도승지의 직은 옮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류(淸流)의 논의에 죄를 얻었다. 《음애일기》

 


○ 성몽정(成夢井)이 말하기를, “강혼이 대궐 안 여러 각(閣)의 아름다운 명칭을 지어 올려서 폐주에게 아첨하였으니, 문장은

     비록 넉넉하나 어찌 귀하다 하리오.” 하였다.

 

●이계맹(李繼孟)

   1458년(세조 4)∼1523년(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또는 묵암(墨巖).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며, 부여감무 의(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대정(大種)이고, 아버지는 영(潁)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89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설서·검교·정언·집의·좌승지 등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생을 모아 치른 시험에서 성적이 뛰어나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 사제 관계는 아님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1503년 장령이 되었고, 전한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승진했으나 이듬 해박경(朴耕)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곧 억울하게 연루되었음이 밝혀져 풀려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9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 해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도관찰사를 비롯해 호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를 거쳤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류(士類)들에 대한 처리가 지나치자, 스스로 논의에 맞지 않다고 여겨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퇴거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옳고 그름에 명백한 태도를 취했고 군자다운 태도가 있었다 한다.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와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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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촉루의 …… 나은지 :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이 남쪽만 향해서 앉아 있는 임금 보다 걱정없고 편하기가 나으므로 바꾸지 않겠다고 한 우언(寓言)에서 온 것이다.

 

[주-02] 원풍(元豊)ㆍ희녕(熙寧) : 송(宋) 나라 원풍ㆍ희녕년간에 명현(名賢) 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소식(蘇軾) 등이 나온 시대를 말한 것이다.

 

[주-03] 한숨 쉬고 통곡하며 : 한 문제(漢文帝) 때의 가의(賈誼)가 상소하니, “지금 천하의 사세(事勢)는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한숨질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04] 강관의 무리들 : 전한(前漢) 때의 문인 가의가 나이 젊고 재주가 있어 정치를 개혁할 것을 주창하였는데, 훈구대신인 강후(絳侯)ㆍ관영(灌嬰) 등이 헐뜯고 방해하였다고 한다.

 

[주-05] 뱃속의 칼 : 당대(唐代)의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서 사람들을 많이 해쳤다고 하는 고사에서 온 말.

 

[주-06] 위(魏) 나라 …… 보인 것 : 북위(北魏) 때의 사관들이 황실(皇室) 선대의 악한 것을 써서 돌에 새겨 큰 길가에 내보였다가 살육을 당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07] 솔개나 …… 않는데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인 열자(列子)가 “사람이 죽은 뒤에 땅 속에 묻히면 굼벵이들이 파먹을 것이요, 묻지 않고 숲 속에 버리면 까마귀나 솔개들이 쪼아 먹을 것이니 죽은 이에게는 묻는 것이나 묻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라고 한 말에서 온 말이다.

 

[주-08] 탐천(貪泉) : 중국 광동 남해현(南海縣)에 탐천이 있는데, 관리들이 그 물을 마시면 탐욕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청렴한 관원인 오은지(吳隱之)가 “나는 마셔도 마음이 변하지 아니할 자신이 있다.” 하고 마시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읍령이나 탐천이란 이름에 상관없이 흐리고 깨끗함이 사람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주-09] 타루비(墮淚碑) : 진(晉) 나라의 현인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의 덕을 사모하여 그 곳 백성들이 현산(峴山)에 세운 비를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 비 앞을 지날 때에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비를 ‘타루비’ 라 하였다.

 

[주-10] 영인(郢人)의 자귀[斤] : 영(郢) 땅의 사람이 자귀질을 잘 하여 남의 콧등에 흙을 조금 붙여 두고 그것을 깎는데 코를 다치지 않고, 또한 코의 주인도 자귀질의 솜씨를 믿기 때문에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11] 하늘에 …… 뻗혔으며 : 진 나라의 장화(張華)가 천문을 본즉 두우성(斗牛星)사이에 광채가 나므로 전환(電煥)에게 물었더니, “그 밑 땅 속에 반드시 보검(寶劍)이 있는 까닭이다.” 하여 전환을 두우성의 분야(分野)인 풍성(豊城)에 수령으로 보내어 땅 속을 파니 과연 보검이 나왔다는 고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문장의 광채를 말한 것이다.

 

[주-12] 땅에 …… 내는 것 : 진의 문인 손흥공(孫興公)이 천대산부(天臺山賦)를 지어서 남에게 보이며, “이 글은 땅에 던지면 반드시 쇳소리[金聲]가 날 것이다.” 하였다.

 

[주-13] 태산(泰山)이 …… 못하겠느냐 :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서 노(魯) 나라 권신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것은 비례의 제사이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태산이 임방(일찍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은 제자)만 못해서 비례의 제사를 받겠느냐.” 했다고 한다.

 

[주-14] 간지(干支) : 육갑(六甲)의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 등은 간(干)이라 하고, 자(子)ㆍ축(丑)ㆍ인(寅)ㆍ묘(卯) 등은 지(支)라 하는데, 간과 지가 합한 갑자(甲子)ㆍ을축(乙丑) 등이 간지이다.

 

[주-15] 삼팽(三彭) : 도가(道家)의 서(書)에 의하면 사람의 몸 가운데, “삼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천상(天上)에 올라가서 사람의 죄악을 보고한다.”는 말이 있다. 수양한 사람은 삼팽이 없어져서 죽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주-16] 하늘의 놀이 :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사람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경지가 이룩되었음을 말한다.

 

[주-17] 두 낭자 : 《단계(丹溪)》에 두 낭자에 관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시에 그 말을 쓴 것이다.

 

[주-18] 방안아(榜眼兒) : 문과의 제2등 합격을 방안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표적으로 이름을 고쳐 준 것이다.

 

[주-19] 장륙(藏六) : 자라[鱉]가 네 발과 머리와 꼬리의 여섯 가지를 움추려 감추는 것을 ‘장륙’이라 하는데 이것은 몸을 보전하여 화를 피하겠다는 뜻이다.

 

[주-20] 팔룡(八龍) : 한(漢) 나라 순숙(荀淑)의 아들 팔 형제가 모두 훌륭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씨 팔룡(荀氏八龍)’이라 하였다.

 

[주-21] 자명(慈明) : 순씨팔용(荀氏八龍)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

 

[주-22] 내가 …… 염려된다 : 맹자의 말에, “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서 부지런히 착한 일만 하는 것은 순(舜)의 무리요,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이익만 구하는 것은 도척(盜賊 중국 춘추시대의 몹시 악한 사람인데,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의 무리이다.” 하였다.

 

[주-23] 오현(五賢)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의 다섯 학자를 말한다.


[주-24] 주염계(周㾾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 : 송(宋) 나라 문장가 황곡산이 같은 문장가인 주염계를 화창한 바람과 비갠 뒤의 달[光風霽月]이라고 칭송하였다.

 

[주-25] 허노재(許魯齋) : 원(元) 나라 허형(許衡)의 호(號)가 노재인데, 평생에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주-26] 내칙편(內則篇) : 《예기(禮記)》의 한 편명(篇名)인데 여자의 행실에 관한 교훈이 실려 있다.

 

[주-27] 무이산(武夷山) : 주자(朱子)가 서원(書院)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주-28] 안자(顔子) : 공자의 수제자. 그가 궁하게 살면서도 그 즐거워함을 변하지 아니 하였다는 말이 있다.

송 나라 주무숙(周茂叔)이 정자(程子)에게,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라.” 하고 가르쳤다.

 

[주-29] 추형(追刑) : 살았을 때에 미처 형을 가하지 못하던 것을 죽은 뒤에 시체에 형벌을 가하는 것.

 

[주-30] 애사(哀詞) : 사람이 죽은 뒤에 그를 애도하여 지은 운문(韻文)으로 된 조사(弔辭).

 

[주-31] 재소(齋疏) :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에 쓰는 축원문(祝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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