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이효자전(李孝子傳)

야촌(1) 2013. 12. 11. 15:28

■ 이효자전(李孝子傳)

 

무릇 행실 가운데에는 효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효 가운데에는 어버이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세상에는 혹 이런 행실이 있는데도 민멸되어 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에 내가 몹시 한스럽게 여겼다.

 

근래에 이생 흡(李生翕)이란 자가 있어 일찍이 나를 따르면서 글을 배웠는데, 스물세 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위하여 죽었다. 이는 효 가운데 큰 것이 아니겠는가. 아득히 먼 옛날에 살았던 효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 사람을 사모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런데 더구나 사제 간이겠는가. 그 애통스러움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세대가 점차 멀어져서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이에 드디어 그의 행실을 열거하여 그의 전을 짓는다.

 

이 효자(李孝子) 흡(翕)이란 자는 자는 화중(和仲)이고, 우봉인(牛峯人)으로, 판결사(判決事) 이유겸(李有謙) 명길(鳴吉)의 아들이다. 흡의 형제는 다섯인데, 흡은 그 가운데 둘째이다. 형의 이름은 핵(翮)이고, 동생의 이름은 상(翔)이며, 그다음 동생의 이름은 숙(䎘)이고, 그다음 동생의 이름은 익(翊)이다.

 

흡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백부가 데려다 양아들로 삼았는데, 백부의 안색을 받들어 살피면서 봉양하여 예에 어김이 없었다. 상을 당하여 거상하면서는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애통해하였다.

 

형 핵이 4년 동안 고질병을 앓았는데, 한번도 형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직접 약을 달였다. 흡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 겉모습은 비록 순순(諄諄)하여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확고하여 분육(賁育)조차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에 부모를 따라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당시에 강도의 주장(主將)이 섬 안으로 피난 온 자들을 모집하여 광성진(廣城津)을 지키면서 오랑캐들을 막았다. 갑진(甲津)이 함락되자 주장이 수비를 파하라고 영을 전하였다.

 

그러자 흡은 강개하여 물에 뛰어들어 죽고자 하였으나,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드디어 식구들과 더불어 길상산(吉祥山)으로 피난을 갔는데, 가던 도중에 오랑캐들을 만났다.

 

아버지가 오랑캐들에게 대들면서 굳게 항거하자, 흡은 형 핵과 더불어 아버지를 따라 함께 오랑캐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희는 나와 처지가 다르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의리상 죽는 것이 마땅하다. 너희는 서생이니 우선 도망쳤다가 돌아가도 무방하다.”

하였다.

 

그러자 흡 형제가 말하기를,

“옛사람 가운데에는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다. 죽지 않아도 되는데 죽는 것은 헛되이 죽는 것입니다. 지금 아버지께서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죽는 것은, 각각 죽어야 할 자리에서 자기의 분수대로 제대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헛되이 죽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이들은 달아날 겨를이 없으니 결단코 오랑캐의 기병들에게 넘겨줄 수가 없습니다.

도망치다가 차례차례 말 앞에서 죽는 것이 어찌 조용히 부모와 함께 죽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으니, 그 지조가 이와 같았다. 오랑캐들이 식구들을 약탈하려고 하자, 흡의 어머니가 먼저 스스로 불 속으로 몸을 던져 온 몸이 다 불에 타 죽었다. 그때 동생 숙은 나이가 겨우 열두 살이었는데, 오랑캐들에게 포로로 잡히자 역시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가 만류하여 멈추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신중히 행동하여 죽지 말아라. 나는 다섯 아들이 있으니 너는 포로가 되라. 너의 두 형과 나는 오늘이 죽기에 적당한 때이다. 너의 셋째 형은 잃어버려서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리고 네 동생은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다. 만약 부모가 오늘 죽는다면 동생이 죽는 것도 오늘이다.

 

나의 종사(宗祀)가 너에게 달려 있으니, 네가 살고 죽는 것이 도리어 중하지 않겠는가. 네가 비록 사로잡힌다고 하더라도 화친(和親)이 만약 성사된다면 고향 땅으로 다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몸을 삼가서 죽지 말아라.”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내외(內外) 조상들의 성과 이름, 관작을 써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린 나이에 이역 땅으로 잡혀갈 것이니,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는, 손을 잡고 영결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잘 가거라, 잘 가거라.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 당시에 노인 이희민(李希閔)이란 자가 그 곁에 있었는데, 핵이 돌아보면서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르신께서는 나이가 많으니 오랑캐들이 비록 사납기는 하지만 반드시 노인장을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오랑캐들에게 굽히지 않은 것은 노인장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이희민이 눈물을 흘리면서 답하기를,

“나 역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사람이다. 어찌 죽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참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어찌 감히 본 바를 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흡이 말하기를,

“천지와 귀신이 분명하게 사방에 두루 존재합니다. 나는 나의 직분을 다하는 것일 뿐이니, 다른 사람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고양인(高陽人) 이응선(李應善) 역시 곁에 있었는데, 부부가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일흔 살을 먹도록 살았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

하고는, 혀를 차면서 탄식해 마지않았다. 얼마 뒤에 어떤 오랑캐가 숙을 잡아 말에 태우고는 다른 기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서 떠나갔으나, 다른 적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흡 형제는 불에 타고 있던 어머니를 끌어내어 논바닥에 눕혀 놓고 상처를 치료하였다. 오랑캐들이 중상을 입은 것을 알고는 잡아가지 않고 활을 당겨서 쏘려고 하였다.

 

그러자 흡 형제가 어머니를 몸으로 가리고 말하기를,

“오랑캐 놈아, 나를 쏘아라.”

하니, 오랑캐가 화살을 쏘았는데, 흡은 얼굴에 화살 두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핵은 왼쪽 어깨와 오른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고는 거의 죽었다가 겨우 살아났다.

 

핵의 아내 김씨(金氏)는 참의 김상(金尙)의 딸이고, 흡의 아내 오씨(吳氏)는 참판 오백령(吳百齡)의 딸인데, 모두 자결하였다. 오랑캐들이 흡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다가 그의 아내가 불에 몸을 던지고, 한 아들은 사로잡혔으며, 한 아들은 죽고, 한 아들은 기절한 데다가 아들의 아내 두 사람이 모두 자결하는 것을 보고는, 차마 다시 죽이지 못하고 버려둔 채 떠나갔다. 이에 드디어 죽음을 면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숙은 과연 오랑캐 땅에서 도망쳐 돌아왔으며, 4년 뒤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형제가 모두 재주와 행실로 당대에 이름이 났다. 처음에 흡 형제가 모두 죽을 처지에 있었는데, 핵은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고, 숙은 사로잡혀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유독 흡만은 복이 없었다. 흡은 비단 지극한 행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장 역시 출중하여 보는 자들이 모두 나라의 그릇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요절하고 말아 자식이 없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착한 사람을 편든다.”

하였다. 흡이 죽은 것은 참으로 죽어야 할 경우에 분수에 따라 제대로 죽은 것이다. 나는 효성을 다하여 죽었는데도 그에 대한 보답이 없는 것을 몹시 슬퍼한다.

 

[주1]이효자전(李孝子傳) : 이 글에 대해 남은경(南恩璟)은,

“이 전은 정두경의 3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정통 전(傳)의 양식에 맞게 창작된 것으로, 실제 인물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총 864자의 작품이다. 정두경은 ‘이흡(李歙)의 효를 위한 죽음’을 중심 소재로 삼아 참다운 삶의 태도에 대한 고민과 이상적인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표출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병자호란 당시 우리 민중이 겪었던 참혹한 수난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무능한 위정자에 의해 일반 백성들이 겪게 되는 현실적 비극에 대한 직시이며, 또한 이에 대한 울분의 표시이다.” 하였다.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1998, 이화여자대학교》

 

[주1]분육(賁育) : 춘추 시대 때 힘이 세기로 이름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을 가리킨다.

 

동명집(東溟集) 제11권 전(傳 - 정두경(鄭斗卿)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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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정두경(鄭斗卿)

 

1597년(선조 30)-1673년(현종14)때인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그는 이항복의 문인으로 어릴 때부터 타고난 文才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月沙 李廷龜는 나라의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칭송하였는데 그가 20살에 지은<劍賦>는 司馬相如와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응시하기보다는 주로 金地南·李尙質 등과 어울리며 詩酒로 소일하였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부수찬‚ 정언‚ 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조였던 鄭順朋이 을사사화 때 사림에 끼친 物議로 出仕길이 편안치 않았다.

 

1636년 청나라의 사신 龍骨大의 귀국으로 조정의 의론이 척화론으로 기울자 空文을 경계하고 武備를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다시 문답형식의 <禦敵十難>을 상소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교리로서 諷詩 20여편을 찬진하였으며‚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 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 등에 임명되었으나 노환으로 사양하였다. 시문‚ 서예에 뛰어났으며 후일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는 성품이 호탕하여 술을 너무 좋아해 자신을 검속하지 못한 흠이 있었는데 일찍이 경기도사 시절 振威縣 향교의 공자 위패를 술김에 모독하였다가 유생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은 司馬遷을 모범으로 삼았고‚ 시는 杜甫에 가까워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이 많았고 조정에 벼슬한 지 40여 년이었지만 끝내 文衡을 담당하지 못하고 죽자 사람들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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