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한산군 이손 신도비명 병서(漢山君 李蓀 神道碑銘 幷序)

야촌(1) 2014. 5. 7. 02:05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한산군(漢山君) 증시(贈諡) 호간공(胡簡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용재(容齋) 이행(李荇) 찬(撰)

 

공의 휘(諱)는 손(蓀)이고 자는 자방(子芳)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관향은 광릉(廣陵=오늘날의 廣州)이다.

증조 휘 양중(養中)은 고려 때 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로서 본조(本朝)가 혁명한 후 태조(太祖)와 태종(太宗)께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부 휘 우생(遇生)은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 증 이조판서이다.

부친 휘 수철(守哲)은 평안도 절도사 증 의정부좌찬성이며, 모친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따님이다.

 

부인은 익재(益齋) 이 문충공(李文忠公)의 6세손으로, 증조 휘 담(擔)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이고, 조부 휘 희(暿)는 경상도관찰사이며, 부친 계반(繼潘)은 용양위 섭호군(龍驤衛攝護軍)이고, 모친 성안 윤씨(成安尹氏)는 현감 윤한(尹瀚)의 딸이다.

 

공은 나이가 부인보다 두 살 적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부인보다 두 해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부부가 모두 82세의 장수를 누린 것이다. 오호라, 공은 서른 살에 출사(出仕)하여 국가에 봉직한 지 50여 년 동안 감히 조금도 해이하지 않아서 높은 품계에까지 올랐고, 부인은 스무 살에 출가하여 집안을 다스린 지 60여 년 동안 하나의 허물도 없어서 길이 두터운 복을 누리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얻기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공은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학문의 여가에 또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였기에 세조께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하셨으며, 성종조(成宗朝)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경인년의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이 되었고,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조용(調用)되었다.

 

그리고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거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내외로 거친 관직들이 모두 당시의 중임(重任)이었다. 병마절도사가 된 것은 충청ㆍ함경 두 도였고, 관찰사가 된 것은 충청ㆍ황해ㆍ전라 세도였다.

 

근시(近侍: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된 것이 두 번이었으니 홍문관 부제학과 승정원 승지이며, 제조(諸曹)를 두루 거친 것이 다섯 번이었으니 호조 참의, 예조와 이조의 참판, 형조와 병조의 판서였다.

 

지금 성상께서 중흥의 대업을 이루셨을 때 공은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녹훈(錄勳)되어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순차를 뛰어넘어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으며, 오래지 않아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많아 사직을 청하자 성상께서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도타운 말씀으로 말리고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이윽고 좌찬성으로 승진하니 이공(貳公)으로 왕화(王化)를 넓히고 조석으로 정승을 보필하는 자리라 공은 자신의 분수에 차고 넘칠까 더욱 두려워하여 상소하여 재삼 간절히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성상께서 교서(敎書)를 내려 위로하여 애써 만류하였으며, 이윽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공은 그래도 이전의 뜻을 그대로 고집하여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이에 성상께서 마지못해 공을 체직(遞職)시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으셨다. 공은 한산군으로서 한가히 살면서 정양(靜養)한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병환이 위중하자 성상께서 의원과 약품을 하사하셨고, 부음이 들리자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관비(官費)로 상사(喪事)를 돕도록 하셨다. 봉상시(奉常寺)가 시호를 호간(胡簡)으로 결정하였다.

 

오호라, 공은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마음가짐이 경근(敬謹)하였다. 집안에서는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냈으며, 일족을 은혜로이 보살펴 촌수(寸數)가 멀고 가까운 것을 불문하고 질병과 상사(喪事)에 극진히 구호해 주었고, 공의 집에서 늘 음식을 먹고 사는 친척이 또한 수십 명을 밑돌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안의 양식이 자주 바닥이 났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사람들과 논설하기를 좋아하여 자상하게 일러 주면서 지칠 줄을 몰랐다. 병이 들었을 때가 아니면 하루도 집안에 있은 적이 없었고, 관직을 맡아서는 힘써 대체(大體)를 잡고 자잘한 것은 일삼지 않았으며, 큰 문제를 결단함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뜻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송사(訟事)를 처결할 때는 번다한 문제를 헤치고 요점을 파악하여 그 판단이 신명(神明)과 같았기에, 아전들은 농간을 부릴 수 없고 백성들은 실정을 숨길 수 없었다. 백성을 다스림은 관대히 대하되 아주 풀어놓는 데 이르지는 않고 위엄을 보이되 가혹한 데 이르지는 않아서, 곤궁한 자를 살리고 무도한 자를 부려서 모두 교화의 큰 궤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므로 부임하는 곳마다 반드시 성적(聲績)을 세워서 모두 칭술할 만하였던 것이다.

공은 천부적으로 총명한 성품을 타고나서 한번 귀와 눈을 거치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와 문물 및 산천의 도로, 민정(民情)의 형편 등을 남김없이 다 궁구하여 무릇 사람들이 질문하면 즉시 응답하여 조금도 잘못 알거나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후진들이 시귀(蓍龜)인 양 의지하였다.

 

늙어서는 영상(領相) 유순(柳洵)과 판서 안침(安琛) 및 원로로서 젊을 때 남상(南庠)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과 더불어 구로회(九老會)를 결성하여 매양 좋은 날이면 자질(子姪)들을 데리고 번갈아 서로 왕래하며 즐기니,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일컬었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정숙하였으며 자라서는 온화하고 의젓하여, 부모가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 딸은 범속한 사람의 짝이 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광릉 이씨는 대대로 거족(巨族)이라 절도공(節度公)이 종사(宗祀)의 중함을 생각하여 공을 위해 어진 종부(宗婦)를 고르던 차에 부인을 얻고는 기뻐서, “우리 집안일을 맡길 만하니, 이제 근심이 없구나.” 하였다.

 

부인은 위로 시부모를 모시고 곁으로 아래위의 동서들을 접하고 아래로 종들을 거느림에 있어 두루 예의(禮意)가 있었다. 그리하여 집의 안팎이 정연하고 엄숙하며 집안의 말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 터럭만큼도 남편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니, 공이 많은 복을 누리고 시종 예(禮)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부인이 그 뜻을 잘 받든 덕분이다.

 

병환이 들었을 때 자제들이 의원을 부르고 기도를 하자고 청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내 나이 여든을 넘었고 부귀영화도 누릴 대로 누렸으니, 더 무슨 바랄 것이 있겠느냐.”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어질다 하겠다.

 

공은 정통(正統) 기미년(1439, 세종21) 12월 20일에 태어나 정덕(正德) 경진년(1520, 중종15) 1월 22일에 세상을 떠났고 이해 4월 4일에 장사 지냈으며, 부인은 정통 정사년 7월 10일에 태어나 정덕 무인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고 이해 4월 28일에 장사 지냈다.

 

내외가 묘역(墓域)은 같고 봉분(封墳)은 다르니, 장소는 바로 광주(廣州) 치소(治所) 동쪽 무갑산(無甲山)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산비탈이다.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의 맏이 수언(粹彦)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고 공이 재상감으로 기대하였으나 나이 마흔이 채 못 되어 죽었다.

 

둘째 순언(純彦)은 내자시 부정(內資寺副正)이고, 셋째 온언(溫彦)은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과거에 급제하기도 전에 죽었다. 넷째 성언(誠彦)은 대과에 급제하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벼슬을 마쳤다.

 

딸의 맏이는 대과에 급제하고 한성부 우윤으로 벼슬을 마친 성윤조(成允祖)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헌부 감찰로 벼슬을 마친 권견(權肩)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대과에 급제하고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벼슬을 마친 신엄(申儼)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 아들인 방산(方山)은 충좌위 사과(忠佐衛司果)이다. 집의의 아들 경(經)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이고, 위(緯)는 사헌부 감찰이다. 부정의 아들 강(綱)은 음죽 현감(陰竹縣監)이며, 기(紀)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철산 군수(鐵山郡守)이다. 내외손이 모두 78명이니, 오호라, 적선(積善)의 보답이 어찌 끝이 있으랴. 그 명은 다음과 같다.

 

누군들 뿌리를 잘 북돋우고서 / 孰培其根

그 가지가 번성하지 않으랴 / 而枝不繁

 

흐름이 길게 뻗치기를 바라거든 / 欲流之長

그 원천을 잘 준설해야 되지 / 在濬厥源

 

광릉의 선조는 / 廣陵之先

덕문이라 일컬어지나니 / 是謂德門

 

참의공의 고고한 자취는 / 參議高蹈

시운이 막혀서 그랬던 게 아니라 / 匪時之屯

그 복덕을 스스로 누리지 않고 / 不食其報

후손들에게 끼쳐 주었던 게지 / 以遺後昆

 

이분은 어떠한 사람인가 / 其人伊何

세상에 우뚝한 달존이어라 / 爲世達尊

 

그 배필은 어떠한 사람인가 / 其配伊何

익재공의 후손이로세 / 益齋之孫

 

두 큰 집안이 혼인 맺으매 / 二大相偶

고관대작이 즐비해 / 犀帶魚軒

 

뭇사람들은 부러워하였지만 / 衆人所矜

공은 전전긍긍 삼갔 도다 / 公戰以兢

 

그리하여 훌륭한 명성 지키어 / 保有令聞

작록의 영예를 받게 됐도다 / 禮備數登

 

우리 공의 덕을 / 我公之德

부인이 잘 받들었고 / 夫人是承

 

우리 공의 복을 / 我公之福

부인이 더불어 받았도다 / 夫人與膺

 

그 후로 자손들이 / 曰子曰孫

대대로 계승하였어라 / 繼繼繩繩

 

묘소 좌측에 비석을 새기노니 / 刻石墓左

후인들은 이를 보고 알 수 있으리 / 來者有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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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秉忠奮義靖國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漢山君贈諡胡簡公神道碑銘 幷序

 

公諱蓀。字子芳。姓李氏。廣陵人。曾祖諱養中。高麗刑曹左參議。我朝革命。太祖,太宗。累徵不起。祖諱遇生。司醞主簿。贈吏曹判書。考諱守哲。平安道節度使。贈議政府左贊成。妣陽城李氏。觀察使孟常之女。夫人。益齋李文忠公六世孫。曾祖諱擔。承政院右副代言。祖諱瞦。慶尙道觀察使。考繼潘。龍驤衛攝護軍。妣成安尹氏。縣監瀚之女。公年少夫人二歲。至是。後夫人二歲卒。竝享壽八十二。嗚呼。公三十而仕。奉國五十餘年。不敢少懈。以躋崇品。夫人二十而笄。治家六十餘載。罔有一愆。永膺厚福。人咸曰難矣哉。公己卯。進士。學問之餘。又善弓馬。世祖命補宣傳官。參成宗朝原從功臣。擢庚寅文科。累轉禮曹正郞,都摠府經歷,奉常寺副正。調金海府使。由承文院判校。陞掌隷院判決事。自是。出入踐履。皆一時重任。其爲兵馬節度使者。曰忠淸,咸鏡凡兩道。爲觀察使者。曰忠淸,黃海,全羅凡三道。參近侍者再。曰弘文館副提學,承政院承旨。歷諸曹五。曰戶曹參議,禮,吏曹參判,刑,兵曹判書。聖上重興。公方判兵曹。錄勳。賜秉忠奮義靖國功臣號。超階崇政。封漢山君。未幾。拜議政府右參贊。年至請老。上命賜几杖。敦諭不許。旣而。陞左贊成。貳公弘道。朝夕台鉉。公益懼盛滿。上表乞骸骨。至再三愈懇。上賜敎書。慰勉留之。俄進階崇祿。公猶執先志。辭以疾。上不得已。遞爲判中樞府事。以漢山君就閑頤養者。凡四年而終。疾革。上命賜醫藥。訃聞。輟朝二日。官庀喪事。太常諡曰胡簡。嗚呼。公性稟寬厚。心存敬謹。其居家。事親以孝。處兄弟以友。恩育諸族。不間疏遠。疾病死喪。護救備至。常食于家者。亦不下數十人。家儲屢空。略不爲意。喜與人論說。諄諄不知倦。非疾病。未嘗一日處於內。其居官。務持大體。不事細察。至決大議。未嘗少撓。其聽訟。剔繁撮要。剖斷如神。吏莫容奸。民無隱情。其治民。寬不至縱。威不至苛。蘇羸馭梗。納之大軌。故所至必有聲績。盡可稱述。聰明之性。出於天賦。一經耳目。終身不忘。國家典故文物。以至山川道里。民情物狀。纖悉究到。凡有疑質。應答如響。無少遺失。後進者。倚以爲蓍蔡焉。旣老。與柳領相洵,安判書琛及諸老之少時同游南庠者。結爲九老會。每良辰佳節。扶携子姪。迭相往來爲娛。一世稱爲美事。夫人生而英肅。長而溫懿。父母異之曰。此女不可以儷凡子。廣陵之李。爲世巨族。節度公思惟宗祀之重。爲公擇賢冢婦。得夫人。喜曰。足以付吾家事。無憂矣。夫人上奉舅姑。旁接娣姒。下撫婢僕。曲有禮意。內外斬斬。言不踰梱。不以纖芥累君子。公之享有多祉。終始以禮者。亦夫人善承之也。旣疾。諸子請迎醫行禱。夫人曰。吾年踰八十。榮貴亦至。有何所望。竟不肯。其賢矣哉。公以正統己未十二月二十日生。正德庚辰正月二十二日卒。是年四月初四日葬。夫人以正統丁巳七月初十日生。正德戊寅二月十八日卒。是年四月二十八日葬。異墳同塋。乃廣州治東無甲山艮坐坤向之原也。生四男三女。長粹彥。登第。官至司憲府執義。人以公輔期之。未四十而歿。次純彥。內資寺副正。次溫彥。有才名。未第而夭。次誠彥。登第。參靖國勳。以水原府使罷。女長適成允祖。登第。終漢城府右尹。次適權肩。終司憲府監察。次適申儼。登第。終軍資監正。側室子方山。忠佐衛司果。執義有子曰經。掌隷院司議。曰緯。司憲府監察。副正有子曰綱。陰竹縣監。曰紀。登武科。鐵山郡守。內外孫總七十八人。嗚呼。積善之報。寧有艾耶。銘曰。

 

孰培其根。而枝不繁。欲流之長。在濬厥源。廣陵之先。是謂德門。參議高蹈。匪時之屯。不食其報。以遺後昆。其人伊何。爲世達尊。其配伊何。益齋之孫。二大相偶。犀帶魚軒。衆人所矜。公戰以兢。保有令聞。禮備數登。我公之德。夫人是承。我公之福。夫人與膺。曰子曰孫。繼繼繩繩。刻石墓左。來者有徵。<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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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남효온의 시(秋江 南孝溫 詩) 삼수

 

◈칠원(漆原)의 전장(田莊)에서 김해 이사군(李使君) 자방(子芳)께 올리다<3수>

[1]

늙은 이 몸 하늘 끝에 마음껏 활보하니 / 老馬振鬐天一頭

사돈의 은혜가 강호에 넘치기 때문이오 / 姻婭恩渥溢滄洲

어느 해인들 김해 꿈을 끊을 수 있을까 / 何年擬斷金州夢

계자의 갖옷에 눈서리 차갑게 떨어지네 / 霜雪飄零季子裘

 

[2]

베 이불 한기 생기고 등잔불 꺼졌는데 / 布被生寒燈焰零

촌닭 새벽 알릴 때 술이 처음 깨는구려 / 村鷄報曉酒初醒

삼차강 즐거운 놀이 뜬구름처럼 지나고 / 三叉行樂浮雲過

선경 같은 칠점 산이 꿈속에서 푸르다오 / 七點仙山夢裏靑

 

[3]

귤잎은 푸르디푸르며 단풍잎 드문데 / 橘葉靑靑楓葉稀

차 꽃 피는 시절에 부슬부슬 비 내리오 / 茶花時節雨紛紛

창원 객사에서 느끼는 유랑의 한탄이 / 昌原客舍東西恨

저녁이면 봄 버들가지보다 많아진다오 / 日夕多於春柳枝

 

[주]이사군(李使君) : 남효온의 사돈으로, 당시 김해 부사로 있던 이손(李蓀)을 말합니다. 자방(子芳)은 자(字)입니다.

 

 

 

 

한산군 이손의 신도비각 한산재( 漢山閣)

 

한산군 이손의 신도비(神道碑)

 

1520년 건립된 이 비는 귀부(龜趺). 이수(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 수 앞면에는 용 두 마리가 가운데의 여의주를 마주 올려다 보고 있는데, 운문(雲紋)에 감싸여 있고, 뒷면도 동일하며 측면에는 용 꼬리와 운문이 있다.

 

귀부는 거북머리가 앞을 직시하고 목의 주름이 굵게 하나가 접혀 있으며, 앞. 뒤 다리는 몸통에 부조형태로 각(刻)하여 붙였고, 꼬리도 왼쪽으로 들어 올렸다. 비의 마멸이 진행되고 있으나 판독은 가능하다. 영구 보존을 위하여 현재는 신도비각이 세워저 있다.

 

 

좌측이 이손(李蓀) 선생의 묘이고 우측은 배위 경주이씨 묘이다.

 

이손(李蓀, 1439~1520)의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자방(子芳), 초명은 명( 蓂)이었는데 세조가 손(蓀)으로 바꾸어 주었으니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묘소는 15세기 묘제에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전반기에, 새로운 유형의 묘제를 시험하던 시기에 조성되어 다른 봉분에 비해 특이하게도 7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비좌하엽(碑座荷葉)의 묘표가 각각 1기씩 있으며 조선 중기에 제작된 정경부인 경주이씨의 묘비 4편은 비좌하엽(碑座荷葉)이고 묘비명은 남곤(南袞, 1471년 ~ 1527)이 지었으며,글씨는 김노(金魯)가 백자(白磁)편에 썼다. 이손 선생의 묘는 백대리석의 묘비도 눈에 띄지만, 7각형의 묘가 더 특이하다.

 

선생의 묘역과 신도비는 경기도 광주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