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書. 간찰. 시(詩)

이광윤(李光胤) 간찰(簡札)

야촌(1) 2014. 5. 16. 21:37

↑크기는 28㎝(가로) x 28.5㎝(세로)이다.

 

●이광윤(李光胤) 

 ◇익재공 후 한당공파(閑堂公派)

   [문과] 선조(宣祖) 27년 (1594) 갑오(甲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8년 (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5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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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4(명종 19)∼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창평현령(昌平縣令) 곤(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공린(公麟)이고, 아버지는 진사 잠(潛)이며, 어머니는 종사랑(從仕郞) 강응청(姜應淸)의 딸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고 8, 9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1592) 때는 예천 용문면 하금곡리의 이개립(李介立), 제곡리의 권욱(權旭)과 더불어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었다.

 

  그 공으로 소촌도 찰방(1594)을 제수받고 비안 현감이 되었다. 이어서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3년엔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1607년 서천군수·부제학을 지냈다. 1631년(인조 9)부터 몸이 쇠약해져서 하금곡리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구(鄭逑), 김륵(金玏), 유성룡(柳成龍), 김광엽(金光曄) 등과 서로 사귀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문장과 선행이 영남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저서에 양서집(讓西集)이 있고,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정산서원(鼎山書院)에 제향되었다.묘(墓)는 경북 예천읍 용산리 제동(堤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