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진(河世晉)의 배위 효부문
소재지 : 경남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
효부 동래정씨 정려기(孝婦 東萊鄭氏旌閭記)
공의 휘는 세진(世晋)이요 자는 인보(仁甫)요. 호는 죽오(竹塢)다. 1684년 11월 22일 묘시(卯時) 에 사직공(司直公-諱 河珍) 21세손으로 야로면 구정리 집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온화하고도 묵중하며, 위엄 있는 거동이 엄연하고 준미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밖에 나가서는 공손하였다. 부모님 상(喪)에 시묘살이 하시니,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속된 늙은이일지라도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또, 마을과 고을에서 모두 그 가풍을 흠앙하였으니, 이는 실로 어버이 섬김을 효성으로 하고, 몸 수양을 공경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1756년 8월에 통정대부 교지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교지를 받으셨다. 1758년 5월 13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75세였다. 임종하실 때 정침으로 옮기게 하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게 하며 집안 자질(子姪)들 남녀를 좌우(左右)로 차례 있게 자리하게 하신 후 이연(怡然)히 별세하시니, 이내 그 천성이 그러하게 한 것이었다.
야로 현내면 동박동 경좌에 안장되셨다. 남평 문응벽(文應壁)은 행장(行狀)을 짓고, 전 도사(都事) 전성 이종기(李種杞)는 묘표(墓表)를 지었다. 배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동평군(東平君) 종[種, 1417(태종 17)~1476(성종 7)/정절공(靖節公)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의 손자로 1450년(세종 32) 고령군 덕곡면 노리 오노곡(吾老谷)에 이거하여 살았다]의 7세손이요,
무과 두영(斗英)의 따님인데 1680년 9월 25일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어버이 사랑하는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서 아버님 목 종기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고 하느님께 아버님 명(命)을 기도하시니, 하느님이 그 정성에 감동하사 달포 만에 완쾌하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님을 잘 받들어 섬기는 데 효성으로써 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 절차를 예로써 하였다. 시어머님이 여러 해 병환으로 신고하면서 청하시는 것이 여름철 메추라기 고기라, 이에 목욕재계하고, 앞 들에 나가 기도하시니, 날아가던 메추라기 한 마리가 품안에 들어오기로 장만하여 드렸더니, 병환이 곧 나으셨다.
이는 얼음 속에서 잉어를, 겨울철에 죽순을 얻은 옛 일과 어찌 다르리요? 그래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하였다. 1742년 6월 6일에 별세하시어 공의 묘 청룡 유좌(酉坐)에 장사되셨다. 그 때 본군 군수 서인수(徐仁修)가 부물(賻物)을 보내어 제사를 돕고 3개면 장정(壯丁)을 동원하여 양례(襄禮)를 넉넉하게 하도록 하였다.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여러번 읍과 도에 품신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복호(復戶)를 내리고 정문을 세우게 명하고 숙부인 교지를 내리셨다. 이러한 사적이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소상하게 실려 있다. 진사 경주 이회근(李晦根)은 정려기(旌閭記)를 짓고, 전 승지 옥산 장석신(張錫藎)은 중수기(重修記)를 짓고, 회당 옥산 장석영(張錫英)은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 석물이 세워졌다.
옮긴이 :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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