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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금성관(羅州錦城館)

야촌(1) 2014. 5. 22. 20:12

나주금성관(羅州錦城館)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이다. 객사란 고려~조선시대 때 지방의 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 또는 궐패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현재 옛 나주읍성 내에는 나주목사내아, 관문인 정수루와 서문밖에 나주향교 등이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인 성종 18년~20년(1487.4.12~1489.7.20) 때인 이유인(李有仁) 목사(牧使-正三品) 가 재직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1603년(선조 36)에 크게 중수하였고, 1884년(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奎東)이 또다시 중수하였다. 

 

1910년 이후 민족항일 기에는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여 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그 뒤 1963년과 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원전 망화루(望華樓)의 옛 모습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望華樓)

 

 

 

↑망화루에서 바라본 나주금성관(羅州錦城館)의 전체 전경입니다.

 

↑금성관의 내삼문

 

↑복원전 금성관의 옛 모습

 

 

 

 

 

 

 

↑관찰사가 나주에 왔을때 집무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동익헌인 벽오헌입니다. 조선초기

  이행 관찰사가 벽오동나무가 가까이 있어서 벽오헌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합니다.

 

↑측면에서 바라본 금성관의 벽오헌(碧梧軒) 

 

 

 

 ↑현재의 금성관 모습은 완전히 복원된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직도 주변 정리를 비롯하여

   내부도 복원중입니다. 우선 외상문인 망화루 복원과 동익헌. 서익현 그리고 중삼문까지 복원이 되었

  습니다. 내삼문은 현재 터만 닦여 있는 상태입니다.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2그루

 

↑금성관(錦城館)

 

금성관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칸 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는

규모가 커서 정청으로서의 위엄이 느껴진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금성관의 내부모습 

 

↑금성관을 나와 당시 나주목사의 관사인 금학헌 사이에는 정수루가 있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정수루의 좌우를기준으로해서 성이 빙 둘러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금학헌(琴鶴軒)

 

 

금학헌의 정확한 초기건립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단 본 건물은 1825년 7월 1일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조선 초기의 건물을 이때 다시 복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제 강점기엔 금성관이 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이곳은 군수의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사진>ⓒsimproㅣ [전남여행], 블로그기자단 등 기타 인터넷 사진 수집하여 편집함.

 

●이유인(李有仁)

   [문과] 세조(世祖) 5년(14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3위(13/33)

   [생원시]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9위(6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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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세종 13)∼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덕림(德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안찰사(按察使) 신(伸)이고, 아버지는 낙안군수(樂安郡守) 계번(繼蕃)이고, 어머니는 현감(縣監) 윤상(尹常)의 딸 정부인(貞夫人) 무송윤씨(茂松尹氏)이다.

 

1459년(세조 5)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에 급제하였다. 세조대부터 성종 대에 걸쳐 1465년(세조 11)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正五品),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正三品堂下衙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정3품)·1477년(성종 8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사복시정(行司僕寺正-正三品), 1478년(성종 9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正三品), 1479년(성종 10년) 통정대부 전주부윤(全州府尹-從二品)·행 호군(行 護軍-正四品), 1484년(성종 15)《구양수집(歐陽脩集)》글자주조의 감독직을 맡다.

 

1485년(성종 16)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兵曹參知-正三品堂上官), 통정대부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 9월 29일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제수되고. 1487년(성종 18) 3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로 4월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나주목사(羅州牧使-正三品) 등을 두루 거치면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1491년(성종 22)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從二品)이 되고 재임 중 발병하여 사임하자, 곧바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로 옮기고, 치유 후 다음해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從二品)에 제수되었다. 오늘날의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에 위치한 나주금성관 (羅州錦城館)은 그가 나주목사로 재임중[1475(성종 6)~1479(성종 10)] 건립하였다. 모양사우(牟陽祠宇)에 배향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