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진주 대각서원(晉州 大覺書院)

야촌(1) 2014. 4. 22. 01:32

◈소 재 지: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

◈문화재지정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44호(2004. 03. 18.지정)

◈배향인물 : 하항(河沆). 손천우(孫天祐). 김대명(金大鳴). 하응도(河應圖). 이 정(李 瀞) 유종지(柳宗智).

                    하수일(河受一)

◈창건연도 : 1610년(광해군 2)

◈향 사 일 : 3월 13일

 

■연 혁

 

1610년(광해군 2) 지방유림의 공의로 하항(河沆), 손천우(孫天佑), 김대명(金大鳴), 하응도(河應圖), 이정(李瀞), 유종지(柳宗智), 하수일(河受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47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향인물

 

1)주벽-하항(河沆, 1538~1590)

 

하항(河沆, 1538∼1590)의 자(字)는 호원(灝源)이고, 호(號)는 각재(覺齋)이며, 본관(本貫)은 진양(晋陽)이다.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그에 관한 기사는 주로 그의 문집인 『각재집(覺齋集)』과 그와 종유한 인물의 문집 및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 남아 있다. 그의 문집은 사후 후손 진현(晉賢) 등이 1813년 진주(晋州) 대각서원(大覺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분량은 3권 1책으로 총 77판이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김굉이 지은 각재의 「行狀」과 「남명선생년보(南冥先生年譜)」, 『죽각집(竹閣集)』, 『동곡실기(桐谷實紀)』, 『송암선생문집(松 先生文集)』, 『죽각집(竹閣集)』, 『모촌집(茅村集)』,『초료당실기( 堂實紀)』, 『부사집(浮査集)』, 『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 「옥동선생년보(玉洞先生年譜)」를 근거로 하여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20세 이전에 이미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문익성(文益成, 1526∼1584), 오건(吳健, 1521∼1574)과 각별히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남명선생은 각재가 재주가 있고 또 학문에 뜻이 독실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여러 성리서(性理書) 읽기를 권하였다. 

 

이로부터 각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리상의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남명선생이 매양 사람을 얻어 가르친다고 하였다. 1556년 8월에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李光友, 1529∼1619)와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

 

24세 때(1561년, 신유) 오건,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이조(李晁, 1530∼1580), 김우옹(金宇 , 1540∼1603), 유종지(柳宗智, 1546∼1589)와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다. 26세 때(1563년, 계해) 2월에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참배하였고, 강익(姜翼, 1523∼1567)과 더불어 임훈(林薰, 1500∼1584)의 집을 방문할 때에 그는 조종도(趙宗道, 1537∼1597), 하응도(河應圖, 1540∼1610), 유종지, 진극경(陳克敬, 1546∼1617)과 함께 남명선생을 모셨다.

 

27세 때(1564년, 갑자) 겨울에 정사현(鄭思賢, 1508∼1555), 최영경이 박제현(朴齊賢, 1521∼1575)에게 정사시(精舍詩)를 주었다. 29세 때(1566년, 병인) 이정(李楨, 1512∼1571), 김우옹, 노진(盧 , 1518∼1578), 강익, 정유명(鄭惟明, 1539∼1596), 정구(鄭逑, 1543∼1620), 조종도, 이광우와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斷俗寺)에서 모여 산천재(山天齋)로 가서 수학하였다.

 

이 해 봄에 이정(李瀞, 1541∼1613)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임훈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하응도, 유종지도 함께 갔다.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수양하였다.

 

30세 때(1567년, 정묘) 식년 생원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사마방목』), 덕천에서 이광우의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36세 때(1573년, 계유) 유덕룡(柳德龍, 1563∼1644)이 와서 배웠고, 39세 때(1576년, 병자) 최영경, 유종지,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이조, 손천우(孫天祐, 1533∼1594), 이천경(李天慶, 1538∼1610), 이정(李瀞)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으며, 서로 오가며 남명선생의 사우를 배알하였다.

 

8월에 덕천에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세웠고, 최영경,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권세륜(權世倫, 1542∼?), 이광우 등이 힘을 합쳤다. 40세 때(1578년, 무인) 1월 11일에 경상 감사가, "진주(晋州)에서 사는 생원(生員) 하항(河沆) 등은 학식이 정밀하고 밝으며 조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것으로 계본을 올렸다."(『선조실록』 11년) 41세 때(1579년, 기묘) 봄에 수곡으로 이광우가 방문하였고, 46세 때(1584년, 갑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를 방문하였고, 47세 때(1585년, 을유) 이정(李瀞),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을 입고, 덕천서원의 원장이 되어서는 일시의 사표가 되었다. 『서원지』와 『산해연원록』을 찬술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경인)에 12월 19일에 내복재(來復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3세였다. 부인은 대구 유(柳)씨로 현감 예원(禮源)의 딸이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소(鏡昭)이고, 딸은 사인(士人) 유덕룡(柳德龍)에게 시집갔다.

 

그는 음양, 의학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특히『소학』과『근사록』을 존신(尊信)한 것으로 보아 남명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제자교육을 통해서 스스로 남명의 실천적 학풍을 전수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남명선생이 그를 설중한매(雪中寒梅)라고 하였고, 최영경은 사상백로(沙上白鷺)라고 하였으며, 오건은 기상항정(氣象沆靜), 처사종용(處事從容)이라고 하였고, 정구(鄭逑)는 각재와 수우당은 기상은 비록 같지만, 대절에 임하는데 있어서는 가히 뺏지 못하는 것이니 각재 역시 그러하다. 학문에 있어서는 더욱 공(功)이 있다고 하였다.

 

2)손천우(孫天祐, 1533~1594)

 

자는 군필(君弼)이고 호는 무송(撫松)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3년(중종 28년)에 광후(光後)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손천우는 남명선생이 삼가(三嘉)에서 덕산(德山)으로 옮기자 그는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이에 남명선생은 그의 원대한 뜻을 헤아리고, 소학, 근사록 등의 각종 성리서를 가르쳤는데, 이를 열심히 익힌 그는 부귀 현달을 구하기보다는 평생 동안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자주 ‘깊은 학문의 경지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까운 데부터 착실히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과정을 뛰어 넘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고 차근차근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를 본 남명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훗날 자신의 뒷일을 부탁하기도 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3, 「門人」 孫天祐).

 

손천우의 하루 생활은 아침에 닭이 울면 일이나 세수하고 옷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참배한 후, 바로 앉아 종일토록 책을 읽는데 남이 보나 안보나 상관없이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다. 당시 선비들은 이를 보고 감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여 하나 뿐인 동생 천뢰(天賚)와 음식과 침식을 함께 하였다.

 

39세(1571년)에는 퇴계선생의 부음(訃音)을 듣자 남명선생은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도 이 세상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고 하고는 선비의 장례에 필요한 요점을 뽑은 「사상례절요(士喪禮節要)」라는 책을 그와 하응도, 유종지 등에게 주면서 자기가 죽으면 그 책에 따라 장례를 치룰 것을 명하였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안 남명선생은 제자들에게 장례 절차를 당부하였던 것이다.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을 3년 하고, 장례절차는 남명선생이 생전에 남긴 「사상례절요」에 따라 진행하였다. 그는 하항(河沆), 최영경, 이광우, 이천경, 이로, 이조, 유종지, 하응도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참여하였고(?竹閣集?; ?桐谷實紀?), 44세(1576년) 8월에는 덕천에 남명선생의 서원이 세워졌다.

 

어릴 때부터 부모을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부모의 상중(喪中)에는 산소 곁에서 하루 세 번 음식을 올렸으며, 아무리 더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부모의 신위(神位)를 상자에 모시고 피난을 다니면서 양식을 빌어 죽을 끓여 음식을 올렸으며, 함경도 땅까지 피난을 가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자 함경도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감복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화조사(花鳥祠)라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손천우가 세상을 떠나자 대각서원(大覺書院)이 창건되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가 모셔졌다.

 

3)김대명(金大鳴,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울주(蔚州). 자는 성원(聲遠), 호는 백암(白巖). 아버지는 찰방 추(樞)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이 되고, 1570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도사(都事)를 거쳐 풍기군수를 지냈다.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약관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돌아가서 날마다 시골 자제들과 더불어 강학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두류산 묵계동에서 병든 몸을 수양하던 중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도소모장(都召募將)을 삼으니, 고성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4)하응도(河應圖, 154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룡(元龍). 아버지는 부장(部將) 박(泊)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 천거로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이 되고, 이어 능성현령(綾城縣令)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진주판관이 되어 흩어진 부민을 수합, 안집(安集)하게 하였다. 실천궁행(實踐躬行)에 힘썼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5)이정(李瀞, 154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함(汝涵). 부제학 중현(仲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건국원종공신 무(珷)이고, 아버지는 경성(景成)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진해·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령현감으로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의령에 침입한 나베시마(鍋島直茂) 휘하의 왜군을 격파하였으며, 1602년 상주목사,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릴 때 조식 문하에서 배운 까닭에 병란 중 파괴된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을 다시 중창해서 옛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 진주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되었다.

 

6)유종지(柳宗智, 1546~1589)

 

자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조계(潮溪)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로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6년(명종 1년)에 성(誠)의 아들로 수곡 원당리(元塘里) 모회당(慕晦堂)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긴 자료는 ?조계실기(潮溪實紀)? 2권 1책이 전한다.

 

유종지는 18세(1563년)에 산천재로 남명선생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남명선생에게 ?소학?, ?근사록? 등의 책을 배우면서 묻고 답하는 것이 아주 지극하여 남명선생이 ‘너의 자질이 정밀하고 민첩하면서 독실하니 앞으로 발전이 있을 것을 알겠다(?德川師友淵源錄?, 卷3, 「門人」 柳宗智)’고 하면서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남명선생을 모시면서 어진 선비들과 많은 교유를 하였다.

 

15세(1560년)에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으나, 과거장에서의 부정을 보고 선비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며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6세(1561년)에 최영경, 이조, 오건, 하항(河沆), 김우옹 등과 서로 강마하였고(?桐谷實紀?), 18세(1563년) 2월에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배알하였고, 강익과 더불어 갈천선생의 집을 방문할 때에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진극경 등이 모시고 갔다(「南冥先生年譜)」. 이 해에 하항(河沆), 하응도 등의 동문들과 남명을 모시고 함양으로 가서 그 곳 선비들과 강학을 하였다.

 

19세(1564년)에는 하항(河沆), 이정(李瀞) 등의 동문들과 함께 함양으로 가서 노진, 강익 등을 만나고 안음으로 가서 갈천선생의 형제를 만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18~19세의 젊은 나이로 남명선생을 따라 당대 어진 선비들을 만나 학덕을 익히게 되었다. 이 때 유종지와 같이 남명선생을 따랐던 제자들은 대부분 덕산 가까이 살면서 남명선생이 임종할 때까지 곁에서 학문을 익힌 선비들이다.

 

21세(1566년)에는 이정(李瀞)이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갈천선생을 방문하였는데,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등과 함께 갔다.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과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茅村集?).

 

40세(1585년)에는 하항(河沆), 이정(李瀞) 등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茅村集?). 31세(1576년) 8월에 최영경, 하항(河沆), 하응도, 손천우, 성여신, 이조, 이천경, 이로, 이광우 등과 더불어 스승을 위해 덕산에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앞장섰다(?浮査集?; ?桐谷實紀?; ?竹閣集?).

 

1589년(선조 22년)에 세상을 떠나자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되었다.

 

7)하수일(河受一, 1553~16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이(太易), 호는 송정(松亭). 고려 문신 공진(拱辰)의 후손이며, 황간현감 형(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희서(希瑞)이고, 아버지는 면(沔)이며, 어머니는 조정견(趙庭堅)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형조좌랑·형조정랑을 거쳐 현감까지 지냈다. 문장(文章)과 사장(詞章)이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송정문집≫이 그의 6세손 달중(達中) 등의 주선으로 1785년(정조 9)에 판각, 간행되었다. 진주의 대각사우(大覺祠宇)에 제향되었다.

 

●건축물

 

서원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후 툇집 형식이며 정면의 기둥은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으로 단면의 크기도 크고 훤칠하다. 가구는 5량 구조로 장식이 잘되어 있다. 양 툇간에는 툇보를 걸었으며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다.

 

서원으로서 전체적인 배치가 무난하며 부재의 사용이나 적절한 비례의 적용, 그리고 동재의 여러 가지 기술적인 수법 등 조선후기 건축의 여러 기법들을 볼 수가 있어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진양지(晋陽誌)의 대각향현사에 관한 기록

 

진양지 제2권 서원(書院)편에 대각향현사(大覺鄕賢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다음은 대각향현사에 대한 기록이다.

 

『주의 서쪽 이하리에 있다. 만력 경술년(1610)에 창립했는데 오래되지 못해 무녀졌고 기미년에 중건했다. 도사 하수일의 봉안서에 이르기를 ‘각재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6년만에 문인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조두 드릴 곳을 세우고자 의논하니 이 계획이 한 고을에 미치자 온 고을이 모두 좋다고 했고 그 계획이 이웃 고을에 다시 미치자 이웃 고을이 또한 옳다고 하여 선생의 정사를 옛터에 개축하기로 했다.

 

7월에 시작하여 8월 11일에 상량하고 또 문장을 쌓으며 제포를 갖추어 다듬었다. 이렇게 다스리기를 수년을 한 뒤에 사우가 이루어져서 금년 9월 5일 정미에 봉안하니 원근에서 모인 사람이 칠십명이었다. 변두가 정결하고 가미로운데 등강에 수가 있고 의관이 제제하여 사문이 많았으니 예의에 밝은 좌랑 오장이 위판을 쓰고 축문을 지었다.

 

그리고 경영이 시작될때 하윤, 정대수순, 조경윤이 그 일을 돈독하게 하였고 봉안할때는 손탄, 류이영이 그 일을 맡았더니 모두 일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아하! 도란 천하에 있는 것이니 그 빛은 해와 달이 빛나는 것과 같고 그 소리는 뇌정이 하늘에서 행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눈 먼자는 보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요, 귀가 먹은 자는 듣지 못하는 바가있는것이니 어찌 해와 달과 뇌정의 허물이겠는가? 지금에 있어 무릇 심지의 백체를 누구인들 가지지 아니했겠는가마는 가지고 있으면서 기르고 키우는 자가 적고 시서와 역과 예를 누군들 배우지 아니했겠는가마는 배우고서도 행하는 자가 적다. 그렇지만 우리 선생님께서는 가지고서 기르셨고 배우고서 행하였으며 해와 달의 빛을 보셨고 뇌정의 소리를 들으셨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학업을 남명 아래에서 받고 수우당과 한강 등 제현으로 더불어 일시에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으니 학문은 존주로써 임하에 한 궁유가 되기에 족하였고, 문은 경세로써 지상에 한 공언이 되기에 족하였다. 그 유풍과 여운은 한갓 오도로 하여금 기세의 뒤에까지 경모케 하니 어찌 시운의 성쇠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는가?

 

뒷날 선생께서 구하려는 자는 사연과 우원이 이어진데서 구하고 또 시운의 성쇠에서 구한다면 여기에 얻어질 것이다. 만약 그 사우가 다하지 못하고 제도가 갖추어지지 못했다면 뒷날의 군자를 기다릴 것이다‘하였다.』

 

(都事河受一奉安序曰覺齋先生旣沒之十六年門人弟子追慕先生議欲立俎豆之所謀及一鄕一鄕皆善之謀及隣邑隣邑亦義之遂改築先生之精舍舊址秋七月始經營八月有一日上樑又築門墻具齋庖繕治數載而後祠宇成今年九月五日丁未乃奉安焉遠近會者七十餘人籩豆靜嘉登降有數衣冠濟濟多有斯文晟儀佐郞吳長題位板作祝文經營之初河潤鄭大淳曺敬潤敦其事奉安之時孫坦柳伊榮掌其事咸一心極力終始以成焉嗚呼道之在天下其光也若日月之麗乎天其聲也若雷霆之行乎天然瞽者有所不見聾者有所不聞豈日月雷霆之過也今夫心智百體孰不以存存而養之者鮮矣詩書易禮孰不以學學而行之者亦鮮矣若我先生其存而養學而行見日月之光而聞雷霆之聲者歟蓋先生嘗受業於南冥與守愚堂寒岡諸賢齊名一時學足以尊主而爲林下一窮儒文足以經世而爲紙上一空言其遺風餘韻徒使吾徒景慕於旣世之後豈非關時運之盛衰哉後之求先生者求於師源友源之所自又求於時運之盛衰則斯可得矣若其祠宇之未盡制度之未備者以俟後之君子云)

 

◇참고-남명을 찾아서 http://nammyung.org 

◇진주시 문화관광 http://tour.jinju.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한국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