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옛 사람들의 초상화

황진이 초상화 발견

야촌(1) 2014. 4. 29. 00:55

 

황진이에 관해서 글을 쓰면서 수시로 인터넷을 검색하곤 한다. 황진이에 관해 혹시나 새로운 게 있나 해서다. 이를테면 “황진이 이야기”라거나 “황진이 초상화”를 수시로 검색해 보곤 한다.

 

그러다가 어제는 한 건 올렸다. 드디어 황진이의 초상화를 발견한 것이다. 진짜인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보통 황진이 초상화를 검색하면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윤복은 1758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황진이보다 200년 이상 늦게 태어난 그가 황진이를 보았을 리가 없다. 더구나 그의 작품명은 ‘미인도’이지 ‘황진이 초상화’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황진이 초상화에 목말라 하다 보니 조선 후기의 대표 화가 중 한 사람인 혜원의 그림으로라도 대리만족을 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다음과 같은 황진이 초상화를 발견했다.

그림 오른쪽에 ‘송도명기 황진이’(松都名妓 黃眞伊)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지 않은가!

 

그림의 보존상태는 썩 좋지 않다. 그림 여기저기 반사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리 액자에 들어있는 그림을 실내에서 플래쉬를 사용하여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의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제목 다음 줄의 설명을 보자.

 

옥당전랑노촌탁낙파이경윤화모사(玉堂銓郞老村託駱坡李慶胤畵模寫)

뜻은 아마 “옥당전랑 노촌의 부탁으로 낙파 이경윤의 그림을 모사했다.”는 것 같다.

그럼 낙파 이경윤이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낙파 이경윤이 이름 있는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체 높은 신분이다.

성종의 후손으로 왕족이었다. 처음에는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았다가 나중에 학림정(鶴林正)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학림수는 벽계수와 같은 등급이다.)

 

이경윤은 1545년생이다. 1520년경 태어난 황진이보다 25년 가량 연하다. 황진이가 40 무렵에 세상을 떴으므로 나이 어리고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인 이경윤이 황진이를 실제로 봤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지만 그가 황진이 초상화를 남겼다는 것은(만일 사실로 입증된다면) 황진이가 그만큼 유명한 인사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림에 나타난 황진이의 옷차림은 당시 기생의 복색을 고증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그림을 모사해 주기를 부탁한 옥당전랑노촌(玉堂銓郞老村)이 누구인지 알아볼 차례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그 역시 유명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노촌(老村)은 숙종 때 대사간을 지낸 임상덕(林象德)이란 분의 호다. 이 분은 숙종 9년(1683년)에 태어나 23세 때인 1705년(숙종 31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임상덕은 주로 홍문관(弘文館)과 이조(吏曹)에서 근무를 했다.

알다시피 옥당(玉堂)은 홍문관의 별칭이다. 그리고 그가 이조에서 여러 번 맡았던 직책이 이조정랑이었다. 전랑(銓郞)은 이조정랑 또는 병조정랑의 별칭이다. 그러므로 옥당전랑노촌(玉堂銓郞老村)이 노촌(老村) 임상덕 선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촌(老村)은 학문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으나 불행히도 37세에 병사하고 말았다. 39세로 요절한 백호 임제(林悌) 선생과 같은 나주 임씨이니 백호의 직계 후손은 아닌 듯하나 방계 후손인 것 같다.

 

내 추측이지만 임백호 선생의 방계 후손인 노촌 선생이 황진이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은 분명하다.

임백호 선생이 황진이 무덤에 가서 시조 한 수 읊었다가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좌천된 사실은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낙파 이경윤 선생이 그린 황진이의 초상화가 남아있다는 말을 듣고 당대의 실력있는 화가에게 부탁해서 그 그림을 모사해 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