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옛 사람들의 초상화

회와 이인엽 초상화(晦窩 李寅燁 肖像畵)

야촌(1) 2008. 3. 2. 18:06

■  회와 이인엽 초상화 고찰(晦窩 李寅燁 肖像畵 考察)

      30世[경주이씨]

 

↑회와공 이인엽 선생 진영

 

■ 회와 이인엽 선생 초상화 고찰(晦窩 李寅燁 先生 肖像畵 考察)

     [생졸년] 1656(효종 7) ~ 1710(숙종 36)

 

공(公)의 자는 계장(季章), 호(號)는 회와(晦窩), 본관은 경주(慶州)로 1656년(효종 7)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화곡(華谷), 경억(慶億)과 어머니 파평 윤씨(윤두수의 증손)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84년(숙종 10)에 진사(進士)가 되고 1686년(숙종 12)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가 전랑(銓郞)을 지내고 관서 여러 지방에 곡물을 풀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니 공덕비와 생사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응교 벼슬에 있을시 황해감사로 발탁되고, 통정, 비당, 가선, 혜당 등 해마다 특진이 되었으며, 임금으로부터 신임이 각별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전랑을 역임하며 탁지판, 금오전(왕실의 재정담당)의 직책을 거치면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러 1710년(숙종 36) 향년 55세로 졸(卒)하니 부고를 들은 임금께서 매우 슬프 하곤 벼슬이 정승에 이르지 못함을 애석해하며 친필로 만사를 써 보내셨는데 지금까지 후손들이 보존 되어 오고 있다.


이 초상화는 녹색 단령에 사모를 갖춘 관복을 입고 호피를 깐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상이다. 얼굴은 좌안팔분면상이지만 몸체는 거의 구분 면에 가깝다. 대수 포속으로 두 손을 살짝 포갠 편안한 자세이며 혜(鞋)는 족좌대위에 올려놓았다.

 

흉배는 정이품용의 쌍학흉배와 삽금대를 갖추었다. 세선(細線)으로 이목구비와 윤곽을 잡고 콧등을 약간 붉게 칠하는 역명암법을 썼고, 입가와 눈가주름 등에 음영을 넣었다. 시선은 우측면 하단을 내려보고 있어 사색하는 듯한 표정이다.

 

복식선은 선염(渲染)없이 세선으로 처리하였고 옷감의 운보 문(雲寶文)을 정교하게 넣었다.

족 좌대는 부감 법을 이용하였다. 좌측 상단에는 ‘감진어사이공인엽(監賑御使李公寅燁)’이라고 쓰여 있다.

 

감진어사는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왕이 지방에 파견한 특명사신으로, 이인엽은 숙종 23년(1697) 42세때 평안도에 감진어사로 파견되었다. 이 외에도 같이 지정된 편복본의 초상화가 있다.

 

편복(便服)본은 소본으로, 방건에 직령포를 갖춘 반신상이다.

세조대는 당상관용의 홍색을 매었다.

 

얼굴표정과 선염 없는 의습선 표현 등은 전신상과 거의 동일하다.

수염과 안면표현이 전신상보다 섬세하고, 붉은 음영이 다소 가미되었다.


좌측 상단에는 별지로 ‘대제학 회와 이선생상(大提學晦窩李先生像)’이라고 붙여있다.

이인엽은 숙종 33년(1707) 52세 때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회아공 이인엽 영정(晦窩公李寅燁影幀) - 시도 유형문화재 191호(경기도)>

 

 

 

 

 

시도 문화재자료 제123호(경기도 박물관)

 

사방건(四方巾)에 편복을 입고 있는 이인엽의 반신상으로 붉은색 세조대가 인상적이다.

경기도박물관에서 기증받은 이인엽 초상은 관복본과 유복 본 모두 두 점을 기증받았다.

초상의 크기나 옷차림 등은 다르지만 얼굴은 모두 같아서 하나의 본을 놓고 다양하게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