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엉터리' 발굴…끊이지 않는 저주
2014-04-09 10:32 > 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⑬]
최초의 '처녀 왕릉' 발굴…파국으로 끝나다.
◈도굴을 면하고 처녀분으로 남은 '무령왕릉' 자태를 보이다.
↑현재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1호분부터 6호분까지 일제에 의해 파헤쳐졌다.
유일하게 온전한 자태가 남은 무령왕릉은 졸속으로 발굴되었다.
(사진=공주시 제공)
◇“사마왕?
아! 무령왕이다”=1971년 7월 8일 오후 4시15분, 1,450년간 묻혀있던 무령왕의 혼이 깨어나는 역사적인 순
간이었다. 발굴단장이던 김원룡의 술회.
●장면1
"어~ 이게 뭐지?"
일본인 교사 카루베가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제6호분을 파헤친 후 39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 6호분의 뒷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그것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조금씩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카루베가 죄다 도굴해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고 도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다.
또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이슬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인부의 삽날에 왕릉 입구의 전돌이 걸린 것이다.
인부들은 서둘러 공사 책임자인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을 찾았다.
●장면 2
김영배 관장은 이날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무슨 짐승일까?'
이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공사현장에서 점점 파내려가니 벽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다음날까지 흙을 파헤치니 이 구조물이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서둘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를 했다.
● 장면 3
보고를 받은 문공부장관은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다.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다.
↑1442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 입구(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러나 이날 밤 큰 비가 내리면서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 설치공사를 밤 늦게까지 벌였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이때만 해도 발굴단은 무덤은 맞지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제고분은 신라고분과는 달리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됐기 때문이다.
또 이번 발굴 작업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참사로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된 발굴현장
7월 8일 어떻게 알았는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가 공주에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보도를 냈다.
이 바람에 보도진과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송산리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아침 8시쯤부터 인부를 투입해 무덤 입구로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일단 막걸리와 수박, 북어를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이어 김원용과 김영배는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다.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1,400년 이상을 밀폐상태로 갇혀 있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무령왕릉의 문을 열자 나타난 장면(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침내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무덤이 조성된 뒤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 분을 만난 것이다. 김영배는 꿈에 본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을 보고 크게 놀랐고, 김원룡은 입구에 놓인 무령왕의 지석을 보고 놀랐다.
'석수'라고 불리는 돌짐승은 악귀를 쫒아 죽은 이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지석은 왕릉 주인공의 신원과 조성 연도 등을 새긴 돌이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좌)과 석수.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때부터 발굴 책임자들을 시작으로 다들 흥분하면서 이성을 잃었다.무덤에 들어간 지 20분 후에 두 사람이 나와 무령왕릉 발견 사실을 발표했다. 발굴 현장은 집단 패닉(panic)에 빠졌다. 보도진들이 앞다투어 들어가려고 하자,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당 서너컷만 찍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덤 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뒤늦게 도착한 모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 연락이 늦었다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구경꾼을 통제해야 할 경찰들마저 "나도 한번 구경해보자"며 대열의 앞장에 섰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철조망을 둘러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 뒤 몇달이고 몇년이고 눌러 앉아 연구를 했어야 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안쪽에서 발굴단은 긴급 회의를 가진 끝에 사고 방지를 위해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했다. 있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17시간 만에 끝난 무령왕릉 발굴...천추의 한으로 남다.
↑날림공사 하듯이 하룻밤만에 끝낸 발굴작업.
발굴단은 급조된 발전기로 마련한 전등 2개를 갖고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조사팀을 2개로 나눠 한 팀은 왕 쪽을, 다른 팀은 왕비 쪽을 맡아 사진 촬영과 실측 작업을 벌였다.
속전속결로 진행한 작업은 밤 10시쯤 마무리됐다고 하니 이건 그냥 통에다 유물을 쓸어담은 셈이다.
자정쯤부터 유물을 밖으로 반출하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
처음 무덤에 들어간 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내는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다.
◈발굴 이후의 혼란…
이 혼란의 와중에 김영배 관장은 몰래 중요 유물을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은팔찌 같은 걸 휘어보고 해서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유물을 갖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로 돌아왔다.
국보급 유물을 운송 차량이나 호위 없이,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로 이동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편 대통령이 유물을 갖고 노는 것을 TV로 본 공주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공주서 출토된 유물은 우리 고장의 소중한 재산인데 멋대로 서울로 가져가다니...
"주민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유물의 서울 반출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급하게 내려온 허련 문화재관리국장과 김원용이 주민 대표들과 협상을 벌여 이렇게 합의를 봤다.
1.공주에 무령왕릉 출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다.
2.그전에 유물의 보존 처리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임시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한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 유물보존을 위한 국립공주박물관이 다음해 준공됐다.
◈2천여 점의 유물 서울로 이송‥…
끊이지 않는 저주 7월 16일 새벽 무장경관들의 호위 속에 유물을 실은 차가 공주를 떠났다.
차량들이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출발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화재관리국장 차량의 운전기사가 넘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엉덩이 정맥이 터져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단 유물차량과 호송차량이 먼저 출발했다.
이번에는 모 신문기자에게 뺨을 맞은 장인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지프차 운전기사가 동대문 근처에서 어린애를 다치게 하는 사고를 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무령왕릉
유물들(사진=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다음해 서울대로 복귀한 김원룡 교수는 어쩌다가 빚더미를 떠안아 살던 집을 처분해야 했다.
고고학계에서는 큰 무덤,즉 왕릉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렇게 해서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수많은 정보가 엉터리 발굴 과정에서 영원히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씨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공개 독촉과 공주읍민 등 현장에 몰려든 일반인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공주경찰서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리듯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준비 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 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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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武寧王)
[시대] 삼국시대(신라. 고구려. 백제)
[출생] 62년(개로왕 8)
[사망] 523년(무령왕 23) 5월 7일
[경력] 백제 제25대 국왕(재위: 501∼523년)
삼국시대 백제의 제25대(재위 501∼523) 왕.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동성왕(東城王)의 둘째아들, 또는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무령왕 정권의 탄생은 동성왕의 시해라는 정변을 통해 이루어졌다. 501년 12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정변에는 왕족과 한성(漢城)에서부터 내려온 귀족, 웅진(熊津)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연루되었다.
무령왕은 이듬해 1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해 저항을 꾀하던 백가를 토벌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501년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고, 503년 마수책(馬首柵)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 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 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해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말갈과의 싸움은 그 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합세해 한성을 치고자 횡악(橫岳)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에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해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는데, 이 때 이를 독려하기 위해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 유역의 어느 곳이거나 가야 지역으로 짐작된다. 513년과 516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였다.
무령왕은 정치 형태를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무령왕 때 추진된 정치적 변화 중의 하나는 직책을 가진 좌평이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천도 이후 일어난 두 차례 반란은 모두 병관좌평(兵官佐平), 위사좌평이라는 관직을 가진 좌평에 의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지배귀족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좌평이 되었고, 다시 좌평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구조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좌평제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좌평을 지배귀족들의 신분서열을 나타내는 관등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행정 업무는 22부사(部司)가 전담할 때 최고의 신분을 가진 귀족이 실권마저 장악하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좌평제를 22부사제로 개혁하는 안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지배층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했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망(流亡)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진휼을 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고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완비함으로써 금강유역권을 개발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왕정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또 무령왕 9년(509)에는 임나(任那) 지역에 도망가서 호적이 끊긴지 3∼4세대가 지난 자를 찾아내서 호적에 올리도록 하였다. 도망간 백제의 백성을 찾아내서 다시 백제로 옮기어 호적에 편입시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나 지역에 대한 호구조사(戶口調査)를 하고 있다면 백제 영역 내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 이전부터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드는 조치들이 이미 실시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령왕 때에는 전국적인 호구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호적체계를 정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정책의 추진으로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승하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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