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명재 윤증선생 묘(明齋尹拯先生墓)

야촌(1) 2014. 5. 17. 02:31

↑ⓒ草阿(초아)의 삶과 그리움> 고택과 문학관

 

↑ⓒ草阿(초아)의 삶과 그리움> 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11-11번지 / ⓒ나홀로테마여행

 

윤증(尹拯)의 묘는 사후 32년 때인 1746년(영조 22년) 윤 3월에 니산현(尼山縣=오늘날 논산시 상월면) 두사촌(杜

寺村)에 이장하였다가 1765년(영조 41)에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문인석. 무인석은 물론 석주나 석등도 없으며, 오직 비석 하나만 있다.묘의 주인을 알리는 비(碑)에'유명조선국

사파평윤공휘증지묘(有明朝鮮國徵士坡平尹公諱拯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윤증(尹拯)선생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묘비를 세우지 말라하셨다 한다.

 

 

↑뒤에서 바라본 전경/사진ⓒ나홀로테마여행

 

●윤증(尹拯)

 

1629(인조 7)∼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1642년(인조 20) 아버지 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9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는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하고,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그를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그를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최신(崔愼)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그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그가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 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그를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그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선거가 그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선거가 죽은 후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그는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그는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사간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저서로는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1722년(경종 2)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직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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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은 뛰어난 학풍과 고결한 인품을 가져, 숙종은 단 한 번도 그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정승 벼슬을 내렸으며, 1714년(숙종 40년)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죽음을 애도하는 조사(弔辭)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 했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 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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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연보에 의하면 그의 장례 때 조문한 인사가 무려 2천3백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그야말로 당대에 이름깨나 있던 선비들은 대부분 조문한 것이다. 윤증이 죽은 뒤 9년이 지난 경종 3년(1723) 정월에 승지가 파견되어 치제(致祭)를 올렸다.

 

그 뒤 윤증에게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江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윤증의 의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윤증이 김포에서 풀려났을 때 어린 그를 업고 다닌 인물은 여종 동절(冬節)이었다 한다. 동절은 윤선거가 강화도로 피난 와서 거주하던 집의 주인인 정파종의 소실이었으며,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관을 내주어 빈소를 차리게 한 사람도 이 동절이었다.

 

그런 동절이 늙어 죽은 후 제상(祭床)을 차릴 아들이 없자 윤증은 몸소 제상을 차려 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윤증이 기력이 남아 있던 85세까지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하니 그의 의(義)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85세는 그가 몸이 쇠약해져 새벽에 가묘(家廟)에 참배하는 것을 그만 둔 해이니 조상을 지내는 정성으로 여종의 은혜를 기린 것이다.사람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의(義)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