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묘.
↑망주석
↑남명선생 묘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
↑남명선생신도비/우암 송시열 찬
↑남명선생 배위 숙부인 은진송씨 묘.
1532. 12. 29(중종 27) ~1610. 12. 18(광해군 2)/ 壽79歲
↑숙부인 은진송씨는 18살 때인 1550년(명종 5)에 남명의 측실(側室)로 혼인했다.
ⓒ申祺承의 伸天之路
↑남명선생묘갈명(南冥先生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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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 묘갈명(南冥曺植先生墓碣銘)
우인 창녕성운 찬(友人 昌寧成運撰)
조(曺)씨는 옛 부터 드러난 성(姓)이라 대대로 인물이 났으니 그 선대에 고려 태조 때 벼슬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휘 서(瑞)라는 분이 있었는데 덕궁 공주(德宮公主)가 그 어머니이다. 그 뒤로 서로 이어 현창(顯昌)하여 휘 은(殷)은 중랑장(中郞將)이니 공(公)에게 고조이고, 이 분이 휘 안습(安習)을 낳았으니 성균 생원(成均 生員)이며, 생원이 휘 영(永)을 낳았으니 벼슬하지 않았다.
그 아들 휘 언형(彦亨)은 처음에 재예(才藝)로 뽑히어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꼿꼿하고 남과 어울림이 적어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벼슬로 별세했으며 부인 이씨는 충순위(忠順衛) 국(菊)의 따님으로 곤범(壼範)이 있어 남편을 섬김에 덕을 어김이 없었다.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니 식(植)은 이름이고 건중(楗仲)은 그의 자(字)이다.
공(公)은 태어남에 체격이 우람하고 용모가 빼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정중함이 어른과 같아 또래들을 따라 장난치지 않았고 놀이 도구도 또한 손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판교공(判校公)이 사랑하여 말을 할 때부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시서(詩書)를 가르쳤는데 응대하여 문득 글귀를 외워 잊지 않았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모부인이 근심스런 안색을 지으니 공이 자세를 가다듬고 기운을 내어 거짓 차도를 보이며 고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부여한 바가 있어 저에게 이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찌 오늘 갑자기 요절함을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듣는 이가 비범하게 여겼다. 점점 자람에 온갖 서적을 널리 통달하였고 더욱 좌구명(左丘明) 류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좋아하였으니 이런 까닭으로 문장이 기고(奇高)하고 기력(氣力)이 넘쳤다.
경물(景物)을 읊고 일을 기록함에 처음부터 뜻을 기울이지 않은 듯, 하였으나 말이 엄하고 뜻이 세밀하여 엄연히 법도가 있었다. 과거로 인하여 유사(有司)에서 문예(文藝)를 바치니 유사가 대책(對策)을 보고 크게 놀라 제일(第一) 제이(第二)로 발탁한 것이 무릇 세 번이었으며 고문(古文)을 배우는 이들이 다투어 전송(傳誦)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가정(嘉靖) 5년(1526)에 판교공이 세상을 떠나니 공은 경사(京師)로부터 상여를 받들어 향산(鄕山)에 안치하고 모부인을 맞아 돌아와서 시양(侍養) 하였다. 공이 어느 날 글을 읽다가 노재 허형(魯齋 許衡)의 말 중에 “이윤(伊尹)의 뜻을 뜻 삼고 안연(顔淵)의 학문을 배우라”는 글귀를 보고는 깊이 깨달아 발분하고 뜻을 가다듬더니 육경(六經) 사서(四書)및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의 유서(遺書)를 강송하며 이미 하루해를 다하고 또 밤중까지 계속하면서 힘을 다하고 정신을 쏟아 연구 탐색하였다.
공은 학문에는 경(敬)을 지니는 것보다 요긴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일(主一)공부에 전념하여 밝게 깨어 혼매(昏昧)하지 않았으며 몸과 마음을 거두어 지켰다. 또 학문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기(克己)에 힘써서 찌꺼기를 씻어 내고는 천리(天理)를 함양하였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였고 깊은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성찰하여 앎이 이미 정묘한 가운데 더욱 그 정묘함을 구하였고 행함에 이미 힘쓴 가운데 더욱 그 힘을 기울였으며 몸소 돌이켜 체험하고 실지를 밟는 것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그 경지에 도달함을 구하였다. 중종(中宗) 24년에 모부인 상을 당하여 선친의 묘 왼편에 장사하였다.
공은 지혜가 밝고 식견이 높아 진퇴의 기미를 잘 살폈으니 일찍이 스스로 보건대 세도(世道)가 상실되어 인심이 이미 그릇되고 풍속이 각박해져 대교(大敎)가 침체 되었으며 또 현인의 벼슬길이 기구하여 재앙의 기미가 은밀히 드러나니, 이 때를 당해서는 비록 교화를 만회시킴에 뜻을 둔다 해도 도(道)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결국 내가 배운 바를 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과시에도 나가지 않고 벼슬도 구하지 않았으며 뜻을 거두어 산야에 은둔하였으니 남명(南冥)이라 자호(自號)하고 그 정자를 산해(山海)라 일컬었으며 사(舍)를 뇌룡(雷龍)이라 하였다. 최후에는 두류산 수굴운동(水窟雲洞)으로 들어가 8∼9개의 서까래를 얽어매고 산천재(山天齋)라 편액 하였으니 몸을 깊이 감추어 스스로 닦은 지 수년이 되었다.
중종(中宗朝)에 천거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제수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朝)에 또 유일(遺逸)로서 재차 전생서(典牲署)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제수하고 이어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옮겼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하여 글을 올려 이르기를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민심이 이미 떠났으니 그 반전의 기틀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또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 들여 전전(前殿)에서 인견할 때에 주상(主上)이 치도(治道)를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은 책 속에 실려 있으니 신(臣)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 컨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情義)가 서로 부합하여 환연히 틈이 없어야 더불어 다스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신하 대접하기를 벗과 같이하여 더불어 치도(治道)를 밝혔으니 신하의 말을 듣고 칭찬하며 감탄한 성대함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야흐로 이제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서로 흩어짐이 마치 어지러이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마땅히 서둘러 구하기를 불난 집에 불을 꺼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인주(人主)의 학문은 다스림을 내는 근원이고 학문은 마음으로 체득함이 제일 귀합니다. 마음으로 체득하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 있고 사물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 만 가지 기미를 모두 잡아 스스로 무사할 것이니 그 노력은 단지 경(敬)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으며, 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일을 묻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인물을 얻어야 한실(漢室) 회복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이나 찾아간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칭찬하였다.
융경원년(隆慶元年, 1567)에 선조(宣祖)가 자리를 이어 받아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였고 이어 징명(徵命)이 있었지만 또 사양하면서 소를 올려 “청컨대 구급(救急)이란 두 글자를 받쳐 몸 바침에 대신합니다.”하고 시폐(時弊) 열 가지를 진언했다.
선묘(宣廟) 2년에 부름을 입었으나 사양하고 또 봉사(封事)를 올려 말하기를 “도(道)는 인주(人主)의 명선성신(明善誠身)에 있으니 명선성신은 반드시 경(敬)으로써 주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인하여 서리(胥吏)의 폐단을 극언하였다.
한참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또 사양하였으며, 신미(辛未, 1571)에 큰 흉년이 들어 임금이 곡식을 내리자 글로써 감사를 드리고 인하여 말하기를 “여러 번 소(疏)를 올려 말씀을 드렸으나 말이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하였으니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임신년(壬申年, 1572)에 병이 심해지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병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 그 해 2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이다. 산천재 뒷산에 자리 잡아 4월 6일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자(天資)가 영달(英達)하고 기우(氣宇)가 고매하며 단엄방직(端嚴方直)하고 강의정민(剛毅精敏) 하였다. 조행이 확고하여 움직임에 법도를 따랐으며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엿듣는 일이 없었다. 장중한 마음을 항상 흉중에 지니고 태만한 모양을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항상 깊은 방 안에 조용히 거처하여 발걸음이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니 비록 기둥을 연하여 사는 이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일어나 관을 쓰고 띠를 두르고는 자리를 바로 하여 시동(尸童)처럼 앉아 어깨와 등이 꼿꼿하였으니 바라봄에 마치 도형이나 조각상 같았다. 책상에 먼지를 털고 책을 펴면 심안(心眼)이 집중되고 묵관 잠사(默觀潛思)하여 책 읽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니 방안이 적적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위의(威儀)와 거동이 느긋하고 한가하여 스스로 법도가 있었으며 비록 급하고 놀란 때를 당해도 법도를 잃지 않았으니 매우 볼 만 하였다. 집에서는 엄하게 가족을 다스려 규문(閨門)과 외정(外庭)의 남녀 모두가 정숙하였으니 가까이 뫼시는 몸종들도 머리를 거두어 쪽을 단정히 아니하면 감히 나오지 못했으며 비록 부부 사이라도 또한 그러했다.
벗을 사귐에 반드시 단정하여 그 사람이 벗 할 만하면 비록 포의(布衣)라도 왕공(王公)처럼 높여 반드시 예로서 공경했고 벗하지 못할 사람이면 비록 벼슬이 높고 귀하여도 흙으로 만든 인형같이 여겨 함께 앉기를 부끄러워하였다.
이 때문에 사귐이 넓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더불어 아는 이는 학행과 문예를 지니어 모두 당세의 이름난 선비 중에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환하게 밝아서 사람들이 숨길 수 없었으니 어떤 신진(新進) 소년이 청반(淸班)에 올라 명성이 드러났거늘 공이 한 번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재주를 끼고 스스로 뽐내며 기세를 부려 사람 대하는 것을 보니 뒷날 어질고 능한 이를 해치는 일이 반드시 이 사람을 연유할 것이다.”하였으니, 그 후 과연 높은 벼슬에 올라 몰래 흉악한 괴수와 결탁하여 법을 농간하고 위세를 부려 사류(士類)를 섬멸하였다.
또 어떤 선비가 글재주는 있으나 급제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됨이 음험하고 시기심이 많아 어진 이를 원수같이 여겼다.
공이 우연히 모임 중에서 보고 물러나 친구에게 말하기를 “내 그 사람의 미간을 살펴보고 그 사람됨을 짐작컨대 외모는 호탕하지만 흉중에 남을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만일 벼슬을 얻어 심술을 부리면 선인(善人)들이 위태할 것이다.”하니 친구가 그 밝음에 탄복했다.
매양 국기일(國忌日)을 당하면 풍악을 듣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더니 하루는 두 셋 높은 관리가 공을 청하여 절에 모여 술자리를 벌였다.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아무 대왕의 기일(忌日)이 오늘인데 여러분은 어찌 잠시 잊었는가?”했더니, 좌우가 깜짝 놀라 사과하고 서둘러 풍악과 고기를 물리고는 술만 한두 잔 돌리다가 이내 헤어졌다.
천성이 효우(孝友)에 돈돈하여 어버이 곁에 있을 때는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잘 봉양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또한 두루 갖추었다. 상(喪) 중에는 애모(哀慕)하여 피눈물을 흘렸으며 질대( 帶)를 벗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떠나지 않았으니 비록 병이 들어도 또한 즐겨 빈소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알맞게 익었는지 깨끗하게 씻었는지를 부엌 하인에게만 맡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몸소 살폈다. 조문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엎드려 곡하고 절할 뿐 함께 앉아 말하지 않았으며 하인에게 분부하여 상을 마치기 전에는 집안의 번잡한 일로 찾아와 고하지 말게 하였다.
그 아우 환(桓)과 더불어 우애가 매우 두터웠으니 말하기를 “지체(支體)는 떨어질 수 없다”하고 한 울 안에 같이 살면서 출입에 문을 달리 하지 아니하고 밥상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즐겁게 지냈다.
재산을 덜어 형제 중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털끝만큼도 스스로 갖지 않았으며 남들이 상사의 슬픔을 당했다고 알리면 자기가 당한 듯 아파하면서 달려가 도우기를 수화(水火)의 재난을 구하듯 하였다. 능히 세상을 잊지 못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하더니 매양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하고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렸으나 곁에 있는 이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공은 만년에 학문이 더욱 진보하고 조예가 정심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각기 그 재능에 따라 독실하게 하였으니,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의심스런 뜻을 분석하여 그 말이 추호도 남김이 없어 듣는 이로 하여금 환히 통달하게 한 다음에야 그만 두었다.
또 배우는 이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학자들이 지극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높고 먼 것을 좆으니 병통이 적을 뿐만 아니다. 학문이란 처음부터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에게 공손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명(性命)의 오묘함을 궁구하고자 하면 이것은 인사(人事) 상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결국 실지로 얻음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그려 놓고 아침마다 배알하며 엄숙히 공경하기를 스승 앞에 앉아 가르침을 듣는 듯이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는 잠을 많이 자지 말 것이니 사색 공부는 밤중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하였다. 매양 글을 읽다가 긴요한 말이 있으면 반드시 세번 거듭 읽었으며 붓으로 이를 기록하여 『學記』라 이름 했다. 손수 신명사(神明舍)를 그리고 인하여 명(銘)을 지었으며 또 천도(天道)· 심(心)· 성정(性情) 및 도(道)와 덕(德)에 나아가는 당실(堂室)과 등급을 그렸으니 그런 것이 하나 만이 아니었다.
또 창과 벽 사이에 경의(敬義) 두 글자를 크게 써서 학자에게 보이고 또 스스로 경계하였으며 병이 위독함에도 오히려 경의설(敬義說)을 들어 간곡히 문생(門生)에게 훈계하였다. 임종시에 부인들을 물리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죽음을 편안히 여겨 마음의 동요 없이 조용히 잠자듯이 하였다.
주상이 제문을 내리고 곡식을 부의했으며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증직하였다.
부인은 남평조씨(南平曺氏)로 충순위(忠順衛) 수(琇)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아들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일찍 죽었고 딸은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이녀(二女)를 낳았으니 맏사위 김우옹(金宇 )은 현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이고 둘째 사위 곽재우(郭再祐)는 학문을 닦고 있다. 방실(旁室)에서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낳았으니 아들은 차석(次石) 차마(次磨) 차정(次 )이고 딸은 제일 뒤에 태어나 어리다.
아! 공은 학문에 독실하고 실행에 힘썼으며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가 깊은 조예와 넓은 견문은 비견할 이 드물었으니 또한 전현(前賢)에 미루어 짝이 되고 후세 학자의 종사(宗師)가 될 만하나 혹자들이 알지 못하여 그 논평이 상이하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금일의 사람에게만 알아주기를 구하겠는가! 단지 백 세(百世)를 기다려 아는 이만이 알아 줄 뿐이다.
내 외람되이 벗의 반열에 끼어 종유(從遊)한 지 제일 오래인지라 전후에서 덕행(德行)을 보아 또한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한 바가 있다. 이는 모두 눈으로 본 것이지 귀로 들은 것이 아니기에 가히 믿고 전할 수 있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덕(德)을 내려 어질고 곧았으니, 거두어 몸에 지녀 자용(自用)하기 넉넉했네. 남에게 펴지 못해 은택 보급 못했으니, 시세(時勢)인가 명운(命運)인가 백성 무록(無祿)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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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南溟 曺植 先生 墓碣銘 - 成運
曺故爲著姓。稱世有人。其先有仕高麗太祖時爲刑部員外郞諱瑞者。德宮公主其母也。其後相繼昌顯。至諱殷。爲中郞將。於公爲高祖。是生諱安習。成均生員。生員生諱永。不仕。其嗣曰諱彥亨。始以才藝。選爲吏曹正郞。狷介寡合。官止承文院判校以卒。其配李氏。忠武衛菊之女。有閫範。事君子無違德。公其第二子。植名而楗仲其字也。生而岐嶷。容貌粹然。自爲兒齒。靜重若成人。不逐輩流與戲。游弄之具。亦莫肯近其手。判校公愛之。自能言。抱置膝上授詩書。應口輒成誦不忘。年八九歲。病在席。母夫人憂形於色。公持形立氣。紿以小間。且告之曰。天之生人。豈徒然哉。今我幸。而生得爲男。天必有所與責我做得。天意果在是。吾豈憂今日遽至夭歿乎。聞者異之。稍長。於書無不博通。尤好左柳傳文。以故。爲文奇峭有氣力。詠物記事。初不似經意。而辭嚴義密。森然有律度。因國策士。獻藝有司。有司得對語大驚。擢置第二第三者凡三焉。學古文者爭相傳誦以爲式。嘉靖五年。判校公捐館。公自京師奉裳帷。安措于鄕山。迎歸母夫人侍養焉。公一日讀書。得魯齋許氏之言曰。志伊尹之志。學顏淵之學。惕然覺悟。發憤勵志。講誦六經四書及周程張朱遺籍。旣窮日力。又繼以夜。苦力弊精。硏窮探索。以爲學莫要於持敬。故用工於主一。惺惺不昧。收斂身心。以爲學莫善於寡欲。故致力於克己。滌淨査滓。涵養天理。戒懼乎不覩不聞。省察乎隱微幽獨。知之已精而益求其精。行之已力而益致其力。以反躬體驗脚踏實地爲務。求必蹈夫閫域。二十四年。丁母夫人憂。祔葬于先大夫墓左。公智明識高。審於進退之幾。嘗自見世衰道喪。人心已訛。風漓俗薄。大敎廢弛。又況賢路崎嶇。禍機潛發。當是時。雖有志於挽回陶化。然道不偶時。終未必行吾所學。是故。不就試不求仕。卷懷退居山野。名其所築亭曰山海。舍曰雷龍。最後得頭流山。入水窟雲洞。架得八九椽。扁曰山天齋。深藏自修。年紀積矣。在中廟朝。以薦拜獻陵參奉不起。明廟朝。又以遺逸。再除爲典牲宗簿主簿。尋遷丹城縣監。皆不起。因上章曰。國事日非。人心已離。其轉移之機。非在於區區之政刑。惟在於殿下之一心。其後拜司紙。以疾辭。又以尙瑞判官徵入。引對前殿。上問治亂之道。對曰。君臣情意相孚。可以爲治。問爲學之方。對曰。人主之學。出治之源。而其學貴於心得。又問三顧草廬事。對曰。必得英雄。可以圖復漢室。故至於三顧。上稱善。翌日還山。隆慶元年。今上嗣服。有旨召辭。繼有徵命。又辭。奏疏請獻救急二字。以代獻身。陳時弊十事。二年。被召辭。又上封事。言爲治之道。在人主明善誠身。明善誠身。必以敬爲主。因極陳胥吏姦利事。久之。受宗親府典籤又辭。辛未。大饑。上賜之粟。以書陳謝。因累章獻言。言不施用。辭甚切直。壬申。病甚。上遣醫治疾。未至。以其年二月八日終。享年七十有二。卜宅于山天齋後山。葬用四月六日。公天資英達。器宇高嶷。端嚴直方。剛毅精敏。操履果確。動循繩墨。目無淫視。耳無側聽。莊敬之心。恒存乎中。惰慢之容。不形于外。常潛居幽室。足不躡門墻之外。雖連棟而居者。罕得見其面。聽鷄晨興。冠頂帶腰。正席尸坐。肩背竦直。望之若圖形刻像。拂床開卷。心眼具到。默觀而潛思。口不作吾伊之聲。齋房之內。寂然若無人。威儀容止。舒遲閑雅。自有準則。雖在匆卒驚擾之際。不失常度。甚可觀也。賓侶之就省者。見公神色峻厲。簡默少言。必斂容曲膝。慄然敬畏。終莫敢與之闌語譁笑。其於家。莊以莅衆。閨庭之間。內外肅整。其室婢之備近侍者。不斂髮整髻。不敢進。雖其配偶之尊亦然。聞人之善。喜動於色。若己有之。聞人之惡。恐或一見。避之如仇。取友必端。其人可友。雖在布褐。尊若王公。必加禮敬。不可友。官雖崇貴。視如土梗。恥與之坐。以此交游不廣。然其所與知者。有學行文藝。皆當世名儒之擇也。藻鑑洞燭。人無能廋匿。有新進少年。踐淸班擅盛譽。公一見告人曰。觀其挾才自恃。乘氣加人。異日賊賢害能。未必不由此人。其後果登崇位。陰結凶魁。弄法行威。士類殲焉。又有士子。有文才未第。其人陰猜媢嫉。仇視賢人。公偶見於群會中。退而語友人曰。吾察於眉宇之間。而得其爲人。貌若坦蕩。中藏禍心。如使得位逞志。善人其殆乎。友人服其明。每値國諱。不聆樂啖肉。一日。有二三名宦請公會佛寺張飮。公徐言曰。某大王諱辰。今日是也。諸公豈偶忘之耶。左右失色驚謝。亟命退樂去肉。酒一再行乃罷。天性篤於孝友。居親之側。必有惋容。以善爲養。悅其心志。衣柔膳甘。亦莫不具。其在服。哀慕泣血。不脫絰帶。晨夜。身未嘗不在几筵之側。雖遘疾。亦莫肯退就服舍。祭必備物。烹調之宜。滌拭之潔。不以獨任廚奴。必躬親視之。有弔慰者。必伏哭答拜而已。未嘗坐與之語。戈僮僕。喪未終。勿以家事宂雜者來諗。與弟桓友愛甚篤。以爲支體不可解也。同居一垣之內。出入無二門。合食共被。怡怡如也。捐家藏。分與兄弟之貧乏者。一毫不自取。聞人遭死喪之威。痛若在己。狂奔盡氣。如救水火。輕出貨力。猶棄粃粺。不能忘世。憂國傷民。每値淸宵皓月。獨坐悲歌。歌竟涕下。傍人殊未能知之也。公晩歲。學力益進。造詣精深。其敎人。各因其材而篤焉。有所質問。則必爲之剖析疑義。其言細入秋毫。使聽者洞然暢達而後已。嘗語學者曰。今之學者。捨切近趨高遠。爲學初不出事親敬兄悌長慈幼之間。如或不勉於此。而遽欲窮探性命之奧。是不於人事上求天理。終無實得於心。宜深戒之。畫古聖賢遺像。張在座隅。目存而心思。肅然起敬。如在函丈間耳受面命之誨。嘗曰。學者無多著睡。其思索工夫。於夜尤專。以故常自佩金鈴。號曰惺惺子。時振以喚醒。每讀書。得緊要語言。必三復已。乃取筆書之。名曰學記。手自圖神明舍。因爲之銘。又圖天道,天命,理氣,性情與夫造道入德。堂室糾級者其類非一。又於窓壁門。大書敬義二字。以示學者。且自警焉。病且亟。復擧敬義字。懇懇爲門生申戒。其歿也。斥婦人令不得近。安於死。心不爲動。怡然如就寢。上賜祭賻粟。贈司諫院大司諫。故友諸生宗人外姻號慟會送者幾數百人。夫人南平曺氏。忠順衛琇之女。先公沒。生男女二人。男早夭。女歸于萬戶金行。生二女。其壻之長曰金宇顒。今爲承文院正字。次曰郭再祐。方學文。旁室生三男一女。男曰次石,次磨,次矴。女最後生。幼。嗚呼。公篤學力行。修道進德。精識博聞。鮮與倫比。亦可追配前賢。爲來世學者宗師。而或者之不知其論有異焉。然何必求知於今之人。直百世以俟知者知耳。運忝在交朋之列。從游最久。觀德行於前後。亦有人所不及知者。此皆得於目而非得於耳。可以傳信。其辭曰。
天與之德。旣仁且直。斂之在身。自容則足。不施于人。澤靡普及。時耶命耶。悼民無祿。<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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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은진송씨 묘갈명
아 ! 우리 어머니 송씨가 이 처럼 숙부인에 봉해진 것은 큰아들 次石이 부모의 공덕으로 대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별한 은전이 있었다. 그 선조는 恩津 사람이니 증조의 휘는 여립이며 군수다. 의정 김국광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의정은 영의정 익성공 황희의 손서이다.
군수가 세적을 낳으니 부사직이요 이분이 인을 낳으니 부사정이다. 부인은 부사정의 따님이다. 외조부는 김맹손이니 부사과이다. 가정임진(1532)12월 29일에 부인이 태어났다. 나이 14~5세에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 미덕을 일컬었다.
부인이 18세(1550)에 선정승 부군에게 시집오니 행동이 단아하면서도 무거웠고, 성품이 성실하면서도 고상하여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대 할때 한결 같이 온화 엄중하였다. 향년이 79이니 만력 경술(1610)12월 18일로 考終하여 이듬해 봄에 선부군 묘 아래에 장례하였다.부인은 三子 1女를 낳았다.
장남 차석이 세 번이나 현감이 되었고, 그 다음은 차마이니 또한 현감이 되었으니 곧 불초이다.
그 다음은 차정이니 만호이고 경덕궁위상이요 딸은 군수 조신도에게 시집가서 무후하고, 현감이 아들 둘과 딸하나 2자 1녀를 낳으니 딸은 만호 성기수에게 시집가서 무후하고 아들 진명은 부 주부다.
3녀 1자을 낳으니 큰딸은 사인 정온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과 두딸을 낳았다.다음은 사인 여수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다음은 사인 정일장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어리다. 그 다음 도명은 서이다. 나는 5자 1녀를 낳으니 장자는 죽고 다음은 경명이니 사과인데 5자 3녀를 낳았다.
딸은 부참봉 정이례에게 시집가서 한 아들을 낳았다. 다음은 익명이니 1녀1자를 낳았고, 다음은 복명과 하명이다.
차정의 위장은 2자 1녀를 낳았다.아들 준명은 생원인데 6자1녀를 낳았고 딸은 정위에게 시집가서 2아들을 낳았다.
다음 극명은 3자1녀를 낳았고 딸은 사인 심자엽에게 시집가서 1녀를 낳았다.
아! 선자께서 일찍이 큰아들 차산을 잃고 늦게야 불초 등 세 아들을 두어 자손이 50여 인이다.하늘이 선자로 하여금 뒤가 없지 않게 한 것이니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다음과 같이 명하노라
부인의 근본인 본종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네.
우리 선자를 모시어 아름다운 덕 거듭 무성하셨네.
옛날에 어진아내로 이름난 맹 광이 있었다더니
오늘 내가 몸소 뵙게될 줄이야
백천년 만에 마땅히 아름다운 법도를 구했다네,
나의 명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목에 있는 것이라네.
묘석에 새기어 다함없기를 보이고자 하노라
숭정2년(1629)3월 일에 아들 차마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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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선생가계도(南冥 曺植先生 家系圖)
조영(曺永)
봉사(奉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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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曺彥亨)
承文院 判校
║
인천이씨(仁川李氏)
忠順衛 李菊의 女
ㅣ
├──조식(曺植)
ㅣ ║
ㅣ 남평조씨(南平曺氏)
ㅣ 忠順衛 曺琇의 女
ㅣ ║ ㅣ
ㅣ ║ 曺次山
ㅣ ║ 早夭(요절)
ㅣ ║ ㅣ
ㅣ ║ 여(女)
ㅣ ║ ║
ㅣ ║ 김행(金行)
ㅣ ║ ㅣ
ㅣ ║ ├──여(女)
ㅣ ║ ㅣ ║
ㅣ ║ ㅣ 김우현(金宇顒)
ㅣ ║ ㅣ 동강집(東岡集)
ㅣ ║ ㅣ
ㅣ ║ └──여(女)
ㅣ ║ ║
ㅣ ║ 곽재우(郭再祐)
ㅣ ║ 망우집(忘憂集)
ㅣ ║
ㅣ ║
ㅣ 側室 恩津宋氏
ㅣ 송린(宋璘)의 女
ㅣ ㅣ
ㅣ ├──조차석(曺次石)
ㅣ ㅣ 현감(縣監)
ㅣ ㅣ
ㅣ ㅣ
ㅣ ├──조차마(曺次磨)
ㅣ ㅣ 현감(縣監)
ㅣ ㅣ
ㅣ ㅣ
ㅣ ├──조차정(曺次矴)
ㅣ ㅣ 호군(護軍)
ㅣ ㅣ
ㅣ ㅣ
ㅣ └──여(女)
ㅣ ║
ㅣ 조신도(趙信道)
ㅣ
ㅣ
├──조환(曺桓)
ㅣ
ㅣ
├──여(女)
ㅣ ║
ㅣ 정운(鄭雲)
ㅣ
ㅣ
├──여(女)
ㅣ ║
ㅣ 이송량(李公亮)
ㅣ
ㅣ
├──여(女)
ㅣ ║
ㅣ 정백영(鄭白氷)
ㅣ
ㅣ
└──여(女)
║
정사현(鄭師賢)
[고증자료]
行狀(鄭仁弘 撰), 神道碑銘(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154), 曺彥亨墓碣銘(曺植 撰) 등에 의함
作成者>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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