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성서문집(城西文集) - 李尙彦(제정공후손)

야촌(1) 2014. 3. 5. 03:30

필자소장본

 

 

 

 

 

 

 

 

 

 

성서문집(城西文集)

◈저자 : 28世 이상언(李尙彦)

◈간행연도 : 金晦鎭(1882~1965)이 跋文을 쓴 것이 1955년 정월이므로 이해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 판 종 : 석인본

◈ 크 기 : 20㎝(가로) x 30.5cm(세로)

◈ 권차 및 발행사항 : 6권 3책

◈ 내용

6권 3책. 석인본. 10대손 운호(雲護)· 진호(進護)와 12대손 명직(明職) 등이 편집, 간행하였고, 간행연도는 미상이다.

권두에 정종호(鄭宗鎬)의 서문과 권말에 김회진(金晦鎭)·운호·진호의 발문이 있다. 필자 소장본이다.

 

권1∼3에 詩 340여수, 부(賦) 1편, 서(書) 5편, 잡저 3편, 권4에 정문(呈文) 3편, 상량문 1편, 축문 11편, 제문 14편, 묘갈명 1편, 권5에 행장 2편, 권6에 가장 2편과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제재가 매우 다양하여 「설적(雪積)」·「산거자미(山居滋味)」·「종시결실이숙(種枾結實已塾)」 등 생활의 정서를 읊은 것도 있고, 「이제(夷齊)」·「굴원(屈原)」·「부소(扶蘇)」·「사호(四皓)」·「제갈량(諸葛亮)」 등 역사적 인물들을 논평한 시, 「고죽(枯竹)」·「왜송(矮松)」·「병매(病梅)」 등 고통 받는 자연물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표현한 특이한 작품도 있다.

 

부(賦)의 「부금강산유력(賦金剛山遊歷)」은 보기 드문 장편의 기행문이다.

잡저의 「광서기사(廣西記事)」는 이흥상(李興商)과 나만갑(羅萬甲) 등에 대한 기록이다.

 

정문의 「보순영문(報巡營文)」은 1664년(현종 5) 함안수령으로 재임하면서 조임도(趙任道)의 학행과 충성심을 보고, 그에게 정려(旌閭)를 내릴 것을 청한 내용이다. 이밖에도 수령으로서 임무에 충실하려 함이 나타난 「천정고유문(穿井告由文)」 등이 있다.

 

■ 이상언(李尙彦)

 

   [진사시]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14위(44등/100명)/ 합격연령 37歲

   [문과]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정시(庭試) 을과(乙科) 1[亞元]위(2명/9명)/합격연령 52歲

--------------------------------------------------------------------------------------------------------------------------------------

정유(丁酉) 1597년(선조 30)~1666(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수(溶叟), 호는 성서(城西). 제정공 후 성오당(省吾堂) 개립(介立)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휘음(徽音)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두문(斗文)의 딸이다.

 

164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正六品)에 제수되었고, 그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正四品). 병조정랑(兵曹正郞-正五品). 등을 역임하고 정선군수(旌善郡守-從四品)를 거쳐 1654년(효종 5). 영광군수(靈光郡守-從四品), 1656년 다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正五品)에 임명된 뒤 안악군수(安岳郡守-從四品)·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을 역임하였고, 2년 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영암군수(靈巖郡守-從四品)가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선정으로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다음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從三品)로 재직하다가 1661년(현종 2)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후진들을 교육시키며 김응조(金應祖)·조임도(趙任道) 등과 산수를 유람하면서 세사를 잊고 지냈다.

 

그뒤 1664년 함안군수(咸安郡守-從四品)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년 후 병으로 인하여 사직하고 고향 영천(榮川=榮州) 로 돌아와 다음해에 죽었다.

 

◈가족사항

◇조부 :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아버지 : 현감(縣監) 이휘음(李徽音)

◇형 : 추재(追齋) 이숭언(李崇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