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와시고(晦窩詩稿)
■ 형태서지
◈간종 : 사본(寫本)
◈간행년도 : 筆寫年未詳
◈권책 : 不分卷 1책
◈행자 : 10행 20자
◈규격 : 25㎝ × 17.5㎝
◈소장처 : 서울대학교규장각. 진천완위각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172
■ 저자
◈성명 : 이인엽(李寅燁)
◈자 : 계장(季章),
◈호 : 회와(晦窩).
◈본관 : 경주(慶州)
■ 행력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
효종 | 7 | 1656 | 병신 | 順治 | 13 | 1 | 3월 1일, 태어나다. |
현종 | 14 | 1673 | 계축 | 康熙 | 12 | 19 | 부친상을 당하다. 鎭川에 장사 지내다. |
숙종 | 10 | 1684 | 갑자 | 康熙 | 23 | 30 | 사마시에 합격하다. ○ 先親을 淸安 茅山으로 移葬하다. |
숙종 | 12 | 1686 | 병인 | 康熙 | 25 | 32 | 文科에 乙科로 급제하다. |
숙종 | 14 | 1688 | 무진 | 康熙 | 27 | 33 | 10월, 검열이 되다. |
숙종 | 15 | 1689 | 기사 | 康熙 | 28 | 34 | 吳斗寅, 李世華 등과 廢妃 반대상소에 참여하다. |
숙종 | 16 | 1690 | 경오 | 康熙 | 29 | 35 | 6월, 弘文錄에 뽑히다. ○ 병조 좌랑이 되다. |
숙종 | 17 | 1691 | 신미 | 康熙 | 30 | 36 | 12월, 全羅右道 暗行御史로 뽑혀 수령을 염찰하다. |
숙종 | 18 | 1692 | 임신 | 康熙 | 31 | 37 | 3월, 어사로 復命하였는데 全羅道 觀察使 李玄紀의 상소로 拿問당하고 파직되다. |
숙종 | 20 | 1694 | 갑술 | 康熙 | 33 | 39 | 4월, 수찬, 교리가 되다. ○ 6월, 청대하여 南九萬, 尹趾完의 소환과 閔黯, 張希載의 처형을 건의하다. ○ 8월, 이조 좌랑이 되다. ○ 吳道一이 상소하여 李師命의 인척이란 이유로 배척하다. ○ 9월, 헌납이 되다. ○ 모친상을 당하다. |
숙종 | 22 | 1696 | 병자 | 康熙 | 35 | 41 | 11월, 부응교, 겸필선이 되다. ○ 12월, 關西 御史로 차출되다. 海西의 田稅를 관서로 보내어 賑恤에 쓸 것을 청하다. 箕子廟에 제사를 지내다. |
숙종 | 23 | 1697 | 정축 | 康熙 | 36 | 42 | 7월, 平安道 監賑御史로 복명하다. 奴婢貢을 탕감하고 宮家의 堤堰을 혁파하기를 청하다. ○ 8월, 휴가를 얻어 湖西와 湖南을 다녀온 뒤 연석에서 농사의 작황을 아뢰다. ○ 9월, 상소하여 君德에 힘쓸 것, 인재를 등용할 것, 낭비를 줄이고 실질적인 혜택을 펼 것 등을 아뢰다. ○ 10월, 黃海道 觀察使가 되다. |
숙종 | 25 | 1699 | 기묘 | 康熙 | 38 | 44 | 예조 참의가 되다. |
숙종 | 26 | 1700 | 경진 | 康熙 | 39 | 45 | 6월, 호조 참판이 되다. ○ 상소하여 糴穀과 身布의 탕감을 청하다. ○ 11월, 이조 참판이 되다. |
숙종 | 27 | 1701 | 신사 | 康熙 | 40 | 46 | 2월, 大同田稅의 징수, 龜城의 築城 등을 청하다. ○ 3월, 이조 참판으로 동지경연을 겸하다. ○ 北方의 關防에 대해 논하다. 이후 직책에 관계없이 항상 軍政을 자임하여 논의하다. ○ 9월, 대사간이 되다. ○ 10월, 行 司直이 되다. ○ 12월, 漢城 左尹이 되다. |
숙종 | 28 | 1702 | 임오 | 康熙 | 41 | 47 | 1월, 공조 참판이 되다. ○ 南漢山城의 군량비축을 논하다. ○ 3월, 漢城 判尹이 되다. ○ 8월, 왕비간택이 예에 어긋난다고 상소하니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다. ○ 行 副護軍이 되다. 彰義門 外城의 축성을 논하다. ○ 10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어 司直이 되다. |
숙종 | 29 | 1703 | 계미 | 康熙 | 42 | 48 | 1월, 李濡, 閔鎭厚 등과 良役의 변통을 勾管하다. 屯田의 설치, 禁衛營의 혁파 등을 주장하고, 流民의 刷還을 실시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논박을 당하다. ○ 4월, 상소하여 「思辨錄」 때문에 배척을 받던 朴世堂을 구원하다. ○ 5월, 공조 판서가 되다. ○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客使가 들어오자 사직하다. ○ 9월, 대사헌이 되다. |
숙종 | 30 | 1704 | 갑신 | 康熙 | 43 | 49 | 2월, 江華 留守가 되어 江華의 內城을 쌓기를 건의하다. ○ 7월, 海防과 固圉의 방책에 관한 책자를 올리다. ○ 12월, 釐正廳에서 五軍門의 軍制와 兩南의 水軍 변통에 대해 의논하다. |
숙종 | 31 | 1705 | 을유 | 康熙 | 44 | 50 | 3월, 우참찬이 되다. ○ 7월, 형조 판서가 되다. ○ 11월, 이조 판서가 되다. |
숙종 | 32 | 1706 | 병술 | 康熙 | 45 | 51 | 3월, 상소하여 修養과 操存에 힘쓸 것을 진계하다. ○ 8월, 冬至使로 차출되었다가 淸의 황제와 이름자가 같다는 이유로 改差되다. ○ 朴世堂의 복관을 청하다. ○ 李三碩을 의망한 것 때문에 李喬岳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다. ○ 11월, 知敦寧이 되어 시골로 내려가다. ○ 12월, 판의금이 되었으나 崔錫鼎과 인척이라는 이유로 相避하다. |
숙종 | 33 | 1707 | 정해 | 康熙 | 46 | 52 | 9월, 대제학이 되다. 여론이 만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되다. ○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申鐔의 疏斥으로 사직하다. ○ 12월, 지중추로서 상소하여 鳥嶺과 竹嶺의 防守를 논하다. |
숙종 | 34 | 1708 | 무자 | 康熙 | 47 | 53 | 1월, 예조 판서가 되다. ○ 2월, 詳定法의 실시를 건의하다. ○ 3월, 이조 판서가 되다. ○ 9월, 李健命과 權益平의 상소로 사직하다. ○ 10월, 예조 판서가 되다. ○ 12월, 병조 판서가 되다. |
숙종 | 35 | 1709 | 기축 | 康熙 | 48 | 54 | 1월,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이 되다. ○ 築城의 役事로 李觀命이 상소하자 사직하다. ○ 5월, 수찬 李澤이 상소하여 논척하자 都城 밖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兵符를 반납하다. ○ 6월, 형조 판서가 되다. ○ 8월, 호조 판서가 되다. ○ 江都의 築城을 다시 건의하다. |
숙종 | 36 | 1710 | 경인 | 康熙 | 49 | 55 | 6월, 守禦使가 되다. ○ 7월 23일, 병으로 졸하다. 용인 陽智 新倉里에 장사 지내다. |
■ 편찬 및 간행
저자가 李時發, 李慶億을 잇는 少論系의 명문으로 주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군국의 정책을 전담해왔음에도 불구하고 實錄을 제외하고는 저자에 대한 기록이나 저술을 거의 찾기 힘든 실정이다. 또한 저자의 아들인 澹軒 李夏坤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孫子인 李錫杓도 영조 시대에 대사간과 대사성, 제학 등을 역임하였는데 先祖의 저술을 정리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저자의 저술로 남아 있는 것은 본 「晦窩詩稿」와 「晦窩筵奏」인데, 「晦窩詩稿」 1책은 규장각(古3447-42)에 소장되어 있고, 「晦窩筵奏」 3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둘다 필사본으로 序跋이 없어 편찬 정리한 주체나 시기를 짐작할 수 없다.
한편 저자의 祖父인 李時發의 「碧梧遺稿」와 李慶億의 「華谷遺稿」도 모두 필사본인 不分卷 1책의 90여 장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둘다 일제시기에(1928년경) 鎭川 李鍾景의 소장본을 謄寫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碧梧遺稿」의 경우는 疏箚와 書, 墓誌, 散文 등이 고루 들어 있는데 반해 「華谷遺稿」는 疏箚만 실려 있는 奏議類로서 「晦窩筵奏」와 비슷한 성격이다.
또 저자의 아들인 李夏坤의 「두타초(頭陀草)」 또한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손자인 李錫杓의 「남록유고(南麓遺稿)」 역시 필사본으로만 남아 있다. 따라서 저자 집안의 시문은 조선 후기까지 간행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전해졌던 듯하다.
본 詩稿의 경우 卷尾에 있는 〈次玉堂諸學士韻〉의 원문이 빠진 채 제목만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락장(落張)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目錄이 없어서 전체의 규모도 알 수가 없다. 또 ‘又次’ ‘又得’ ‘再疊’ ‘三疊’ 등과 같이 제목의 손질이 적절하지 못하고 〈宋奎濂挽詩〉의 경우 7首가 모두 실려 있는 등 刪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자의 시를 있는 대로 수집하여 연대순으로 수록해 놓고 교정을 보던 중의 未定稿本으로 보인다.
본고에 간간이 원문이 빠지거나 제목이 빠진 시가 있고, 또 〈寺樓晚望憶仲氏〉는 〈遊苕麻寺〉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수록 순서의 수정을 지시하는 註가 자주 보이는 것도 그 증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저자의 글은 본 詩稿와 疏箚集인 「晦窩筵奏」 뿐이지만 文衡까지 역임했던 만큼 다른 문집을 통해 볼 때 저자의 글이 상당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先祖인 李齊賢의 「益齋集」 跋文을 비롯해 南九萬, 崔奎瑞, 崔錫鼎, 鄭齊斗와의 편지 왕래도 있었으며, 朴泰輔의 祭文도 있다. 따라서 本稿가 원래 詩만을 모은 詩稿로 편집되었는지 아니면 뒷부분에 文稿도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별도로 소장된 저자의 詩文은 찾아볼 수 없고, 필사본도 확인된 것은 규장각장본뿐이다.
본서의 저본은 위의 필사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내용
본집은 불분권 1책 92장의 필사본으로 권말에 일부 落張이 있는 缺本이다. 序跋이나 目錄, 附錄文字 없이 全文이 시로만 구성되어 있는 詩稿이다. 총 388題의 시가 詩體에 관계없이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간간이 詩錄이 섞여 있다.
1685년작인 〈三藐寺次存窩韻〉으로 시작해서 1704년 李德成의 挽詩로 끝나는데, 중간에 1709년 졸한 宋奎濂의 挽詩나 1708년 졸한 金昌協의 挽詩도 실려 있는 등 저작 연도가 뒤섞여 있어 아직 배열이 끝나지 않은 교정본으로 보인다. 이는 곳곳에 “當在下” “當在上” 등 배열의 위치를 수정하는 편자 주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少論의 名門으로 주로 崔錫鼎, 崔昌大, 延世華, 徐宗泰 및 형제들과 자제, 조카 등과 함께 詩를 酬唱하였는데, 老論인 宋相琦, 閔蓍重과 인척간이고 金昌協, 鄭齊斗와도 교유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1688년~1690년 동안은 형제들과의 차운시가 많고, 1691년 매산(茅山)에서 지은 시가 많은데 茅山은 저자의 선영이 있는 곳이다.
1691년 가을의 東遊錄에는 관동지역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 92수가 실려 있다. 洪川, 葛川, 永郞湖, 洛山寺, 〈水城八詠〉 등 강원도의 명승지를 읊은 시가 많으나 원문이 빠진 곳이 종종 있다. 1697년의 海西錄은 黃海道 觀察使로 나가 지은 詩錄으로 濯熱亭, 觀風閣, 望月樓, 芙蓉堂 등에 대한 차운시가 실려 있고, 이어서 仁顯王后 挽詩를 비롯해 李世白, 洪受疇, 金昌協의 挽詩가 실려 있다.
마지막의 〈次玉堂諸學士韻〉은 제목만 남아 있고 원문은 없다. 저자 시의 제목 중에 “又用某字” “又得某字” “又疊某字”와 같은 제목이 많은데 이는 여러 사람이 모여 시를 지을 때 유명한 싯귀의 글자를 나누어 자기가 맡은 글자를 운으로 짓는 경우에 많이 쓰인다. 이 또한 본 詩稿가 제목의 손질과 산절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 : 金成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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