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한시(漢詩)

이양구(李養久) 시발(時發)에게 부치다.- 정경세(鄭經世

야촌(1) 2013. 12. 11. 20:27

우복집 제1권>시(詩)

 

●제천(堤川) 동헌(東軒)의 판상(板上)에 있는 시에 차운해 방백(方伯)으로 있는 이양구(李養久)

    시발(時發) 에부치다.

 

지은이>정경세(鄭經世)/ 임인년(1602, 선조35)

 

늙어가매 명예 명성 낮아짐이 싫지 않고 / 垂老聲名不厭低

그윽한 정 갈수록 더 산골짝에 마음 가네 / 幽情去去着巖棲

 

소나무숲 적막한데 골짜기선 구름 피고 / 松杉寂歷雲生壑

버들가지 울창한데 달은 시내 잠겼구나 / 楊柳扶疎月漾溪

 

영성에서 〈백설가〉를 부르지 말지어다 / 莫向郢城歌白雪

내 일찍이 촉도에 청니 있음 알았다네 / 曾知蜀道有靑泥

 

그대 쾌히 나와 심사 같이함이 내 좋나니 / 憐君肯與同心事

봄갈이 때 시냇가서 둘이 함께 밭 가세나 / 要及春耕耦瀼西

 

[주01]이양구(李養久) : 이시발(李時發, 1569~1626)로, 양구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벽오(碧梧), 후영어은(後潁漁隱)이며,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저서로는 《벽오유고(碧梧遺稿)》, 《주변록(籌邊錄)》이 있다. 이때 이시발은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었다.

 

[주01]백설가(白雪歌) :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으로, 최고급의 노래를 뜻한다. 옛날에 초(楚)나라의 서울인 영(郢)에서 어떤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에 보통 유행가인 〈하리(下里)〉나 〈파인(巴人)〉 같은 것을 불렀더니, 같이 합창하여 부르는 자가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러나 정도가 높은 노래를 부르니 따라서 합창하는 자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최고급의 노래인 〈양춘백설곡〉을 부르자 따라 부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주02]청니(靑泥) :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감협(甘陜)에서 촉(蜀)으로 들어가는 요로(要路)인데, 높은 절벽을 끼고 있고 비와 구름이 많아 길 가는 사람들이 진흙 때문에 애를 먹는다고 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청니령은 어쩜 그리 꾸불꾸불한가, 백 발자국에 아홉 번을 꺾이면서 바위 뿌리 감도네.〔靑泥何盤盤 百步九折縈巖巒〕”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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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 제1권>시(詩)

 

●관서 백(關西伯) 이양구(李養久)에게 부치다.

 

지은이>정경세(鄭經世)

 

천리나 먼 관하를 꿈속서도 생각는데 / 千里關河費夢思

진중할사 편지 한 통 그리는 맘 위로하네 / 一書珍重慰調飢

 

근년 들어 부질없는 심상 모두 식었는데 / 年來息盡閑心想

친구 사이 우정만은 쇠해지질 않는구려 / 只有朋情未肯衰

 

향 연기 피어올라 창문 사이 감도나니 / 穗雲飛細遶窓間

마음 맑혀 묵묵히 앉아 보기 정말 좋네 / 正好澄心默坐看

 

무슨 일로 그 당시에 황 태사 그분께선 / 何事當時黃太史

길거리 티끌 속서 한가함을 훔치었나 / 九衢塵裏學偸閑

 

향(香)을 싸서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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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관서백>평양감사 및 평안도관찰사를 말한다. 당시는 겸직이다.

 

[주02]무슨 …… 훔치었나 : 황 태사(黃太史)는 송나라의 시인이면서 태사를 지낸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황정견의 〈화답조령동전운(和答趙令同前韻)〉 시에, “인생살이 중에 정말 한가한 틈 없나니, 총망중에 몇 번이나 한가로움 훔치리오.〔人生政自無閑暇 忙裏偸閑得幾回〕” 하였다.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10년 4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정인홍(鄭仁弘)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 승정원도승지· 의정부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사후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