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복수는 효자의 당연한 책무-전통사회

야촌(1) 2013. 12. 6. 22:53

■ 복수는 효자의 당연한 책무 - 송시열의 「김삭주형제복수전」

 

전통시대 아비의 원수를 죽여서 복수하는 일은 효자의 당연한 의무였다. 물론 사적인 복수행위는 금지되었고 국가의 공권력에 의하도록 법제화되었지만, 그러나 공권력은 그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원수를 갚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복수는 효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고, 법을 어긴 민간의 사적인 복수 행위가 칭송되기도 하였다. 그 한 예가 김성일 형제의 복수사건으로, 이에 대해 송시열은 복수전(復讐傳)을 지었고, 이이명(李頤命)과 이재(李縡)는 각각 복수비(復讎碑)를 찬술하여 기렸다.

 

아래는 송시열이 지은 복수전의 결말 부분이다.

삼가 『예기』와 『춘추』를 살펴보니 복수의 의리가 자세하며, 주부자는 그 의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윤리는 무너지고 풍속은 퇴폐해져 이 의리를 아는 자가 없게 되었다.

 

성일 형제가 반드시 『예기』와 『춘추』의 깊은 뜻을 연구한 것도 아니면서 오직 본성(本性)에서 발로하여 죽음을 잊고 의연히 일어나 큰일을 이루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인조대왕께서는 함부로 죽인 죄를 특별히 용서하였고, 효종대왕 또한 벼슬에 제수하였으며, 상공 이경여가 가상히 여겨서 친후하게 대하였다. 심지어는 모든 재판관까지 그를 살리려는 논의를 펴서 교화를 도왔으니, 우리나라의 예절과 의리가 중화(中華)에 비하여 손색이 없이 아름답고 밝다는 말이 더욱 믿을 만하다.

 

더구나 장사를 뒤로 미룬 것은 더욱 주자의 말씀과 꼭 맞는다. 주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춘추필법에 임금이 시해되었는데 적(賊)을 토벌하지 않았다면 장(葬)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바로 복수의 대의는 무겁게 만들고, 일상적인 장례의 예법은 가볍게 만들어서 만세의 신자(臣子)들에게 반드시 적을 토벌해서 원수를 갚은 다음에야 군친(君親)을 장사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원수를 갚지 못했다면 아무리 좋은 관에 모시고 더없이 비싼 수의를 입히더라도, 실상은 시체를 구덩이에 버려서 여우와 너구리가 뜯어 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 먹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것이니, 복수의 의리는 참으로 절실하다 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제 성일 형제의 처사가 은연중에 이와 부합하니, 이는 의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하늘이 내린 천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 기이하도다.

 

[원문]

謹按禮經春秋, 復讎之義詳矣. 而至朱夫子, 益發揮而闡明之. 然世衰俗偸, 知此義者鮮矣. 今成一兄弟非必推究禮經春秋之旨, 特以天畀之性, 忘身奮發, 辦此大事, 豈不偉哉! 仁祖大王特赦擅殺之罪, 孝宗大王又進其官, 李相公敬輿嘉奬而親厚之. 至於讞獄之官,亦皆傅生議, 以助風化. 本朝禮義休明, 無愧中華者, 益可信也.

其以營葬爲後, 尤有符於朱子之說. 朱子蓋嘗曰: “春秋之法, 君弑賊不討, 則不書葬者,正以復讎之大義爲重; 而掩葬之常禮爲輕, 以示萬世臣子必能討賊復讎, 然後爲有以葬其君親者, 不則雖棺槨衣衾極於隆厚, 實與委之壑, 爲狐貍所食蠅蜹所嘬, 無異, 其義可謂深切矣.” 今成一兄弟所行, 與之暗合, 蓋義理之心得於天者如此, 嗚呼奇矣!

 

- 송시열(宋時烈 1607~1689)「김삭주형제복수전(金朔州兄弟復讎傳)」,『송자대전(宋子大全)』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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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송시열 등이 전하는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담양에 사는 김성일은 무과에 응시하러 서울에 가 있었다. 그런데 숙부 김세민의 노비 금이가 세민의 아내와 간통했다. 세민의 형이자 성일의 아비인 준민은 금이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를 알아챈 금이가 제 아비와 동생을 데리고 도리어 밤에 준민을 습격하여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이때가 인조 7년(1629년)이다. 이 소식을 듣고 돌아온 성일은 동생과 장사도 미루고 틈을 엿보다 저잣거리에서 노비 금이와 그 부모를 쳐 죽인 후에 자신이 직접 목을 자르고 간을 도려내어 식구를 시켜 빈소에 매어 달도록 하고는 자신은 그 즉시 관가로 가서 자수하여 투옥되었다.

 

추관인 광주 목사는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것이므로 사형은 면해주라고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형조는 곤장형에 처하려고 하였는데, 인조가 그 효성과 의리를 가상하게 여겨서 특사하였다.

 

송시열은 말한다. 김성일이 무부출신으로 『예기』와 『춘추』를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원수를 갚았으니, 이는 복수설치(復讎雪恥)의 대의를 안 것이다. 더구나 김성일이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장사조차 치르지 않은 채 원수를 찾아 저잣거리를 헤매었으니, 이는 군부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장사를 치러서는 안 된다는 복수설치의 대의를 실천한 것이다.

 

학식이 없는 일개 무부로서 너무도 장한 일이며, 복수설치의 큰 의리가 본성에서 나온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원수의 손에 죽었는데도 복수의 대의를 밝히지 못했다면 아무리 후하게 장사를 치렀더라도 실상은 군부의 시신을 시궁창에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사적인 복수와 군왕을 위한 설욕을 동일한 논리로 구성함으로써 충절의 구현방식으로 복수설치를 제시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왕의 시신이 왜군에 의해 훼손된 이후, 복수는 조야의 주요한 화두였으며, 적개심은 이반된 향촌의 민심을 하나로 묶어내었다. 왜란이 난지 정확하게 44년 만에 호란이 났고, 이번엔 아예 왕이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콩콩 찧는 굴욕을 목도했다. 조정의 자존감은 찢어지고 왕실의 권위도 무너졌다.

 

복수를 외치며 자위하고, 설욕의 감정적 동력인 적개심을 충절로 포장하는 것은 외세의 침입을 받은 왕조의 당연한 선택이었으며, 이를 통해 요동치는 민심을 잡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복수심을 고조시킬수록 필연적으로 열패감은 더욱 깊어지고 내재화되며, 마침내는 역사의 트라우마가 되어 인식을 왜곡한다.

 

스포츠에서조차 역사와 민족을 외치며, 자존감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는 것처럼 사회적 열병을 앓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복수설치를 외치는 왕조적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글쓴이 : 서정문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백동리에 있는 효자광산김씨형제복수비각,

   사진은 지역정보 포털에서 전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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