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시대 생활상

광대(廣大)

야촌(1) 2013. 9. 12. 20:35

■ 광대(廣大)                                      

 

광대란 고려시대까지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사람을 말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점차 탈놀이, 인형극, 줄타기, 땅재주, 판소리하는 사람들도 광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공연하는 내용과 구성원에 따라 정주하거나 유랑하는 두 집단을 이루었는데 유랑집단이 더 많았다. 각 지방 관청에는 재인청(才人廳)을 두어 광대를 국가 행사에 동원시켰다.

 

중국의 사신을 위한 영접행사나 고을 수령의 행차에서 노래와 재주를 부렸다. 

또한 관아와 양반층의 행사가 있을 때도 불려 갔다. 따라서 조선초기까지는 관에 소속된 광대의 수가 많았음을 짐잡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광대들이 직업적으로 쉽게 형성된 배경은

①임진왜란과 두차례의 호란으로 인한 궁중의 악공과 악생들의 분산,

②한양의 산대도감 폐지에 따른 예인(藝人)들의 유랑화,

③폐농으로 인한 농민들의 참여,

④각 고을 재인청에 소속된 자들의 중과세로 인한 도피 등이 있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이들이 쉽게 동류화 될 수 있게 하였다.

 

광대들은 주로 상업이 발달된 곳을 다니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궁중의 행사, 마을의 행사, 환갑과 혼인 등에도 불려 다니며 전문적인 예인 집단으로 발전하였다.

 

예인 집단에는 사당패, 광대패, 남사당패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사당패는 여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주된 공연 종목은 판염불을 중심으로한 춤과 노래였다. 

 

사당패에는 사당과 짝을 이루는 거사들이 있다. 

거사는 악기연주, 사당패의 뒷바라지, 사당의 허우채〔解衣債:몸값〕등을 관리하였다. 광대패는 재인청 출신의 무부(巫夫)들이 떠돌이로 전환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뛰어난 예술적 기능을 지녔고 공연 내용도 풍부하고 종합적으로 진행되었다. 

광대들의 재주는 가곡, 판소리, 곡예, 가면춤, 검무, 꼭두각시놀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소리광대인 가곡과 판소리를 하는 사람의 대우가 가장 좋았다. 

판소리 광대는 대부분 하층계급에서 나왔고 무당의 남편 중에도 훌륭한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다.

 

남사당패는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는데 35~50명의 구성원이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 등 주로 6종류의 놀이를 연출하였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우두머리로 상명하달식의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구성원의 선발은 자진해서 오는 경우도 있으나 유혹 또는 납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철저한 남색조직으로 타인에게 몸을 팔기도 했는데, 연행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사당의 유명한 무동춤은 여장을 한 남자아이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예인집단과 달리 마을 대표의 허가가 없으면 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허가를 얻으면 길놀이를 하며 마을을 몇 바퀴 돌고는 밤에 횃불을 밝히고 남사당 놀이를 진행하였다.

광대와 같은 유랑 집단은 사회적, 자연적 환경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1년의 대부분을 유랑하였으므로 의식주의 해결이 매우 불안정하였다. 

특히 떠돌아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다만 겨울은 광대의 휴식 시간으로 기술연마을 할 수 있는 정주기간이었다.

 

그러나 연행을 할 수 없으므로 한 해 동안 벌어 놓은 것이 없으면 각자 생계를 위하여 집단이 흩어지는 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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