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시대 생활상

백정(白丁)

야촌(1) 2013. 9. 12. 20:07

■ 백정(白丁)                                             

 

조선시대의 백정은 대개 북방의 유목민족 출신으로 조선초기에 유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선사회에 정착하면서 수렵, 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의 도살법을 이용하여 가축의 도살과 육류 판매업을 하였다. 이외에 버들고리를 이용한 바구니 제조와 가죽신을 만들거나 농경에도 종사했으나 도살을 겸하는 수준이었다.

 

백정은 소와 말의 도살과 판매를 독점적으로 하였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평민 중에서 생활이 어려운 자들은 백정으로 업종을 바꾸기도 하였다. 

 

개, 돼지, 양은 일반 백성이 잡을 수 있었지만 보통 백정에게 맡기는 형편이었다. 

이때 작업 도중 발생하는 가죽, 내장, 뼈 등을 보수로 받았다.

 

백정은 거주 이전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웠다. 

조선초부터 정부에서는 이들을 평민과 강제로 결혼시켜 유목민적 기질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평민들은 천한 백정과의 결혼을 회피하였고, 백정들은 농경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도살업과 육류 판매를 겸하면서 자신들의 집단촌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마을에는 백정이 아니면 들어가 살 수 없었고, 백정이 그곳을 벗어나 살수도 없는 특수부락이었다.

 

조선사회에서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므로 조세와 군역, 부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노비도 기재되는 호적은 물론 호패도 쉽게 발급해주지 않는 차별정책을 펴서 사회적인 고립과 멸시를 받게 하였다. 백정의 집은 기와를 올릴 수 없었고 비단옷과 두루마기를 입지 못하였다. 

 

그리고 관혼상제에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유교적 예법을 행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초상을 당해도 상복은커녕 상여도 쓸 수 없었고, 결혼식에는 말이나 가마 대신 소와 널판지를 이용하였다. 

 

또한 남자들은 상투를 묶지 못했고 여자들은 비녀를 찌르지 못했다. 

그밖에 일반인 앞에서 음주와 흡연은 물론 대중모임에 쉽게 참석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일반 백성들도 연령에 관계없이 백정에 대해서는 반말을 했으며,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집단 구타를 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백정은 사회의 제일 밑바닥 신분으로 평민의 아이들도 그들의 상전이었다.

 

조선 사회의 백정에 대한 차별은 갑오개혁의 신분제 혁파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도 지속되었다. 

결국 백정에 대한 차별은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의 학교 통학문제가 확산되어 발생한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을 계기로 겨우 완화되게 된다.

'■ 역사 > 조선시대 생활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녀(妓女)의 자질(姿質)  (0) 2013.09.12
광대(廣大)  (0) 2013.09.12
기녀제도(妓女制度)  (0) 2013.09.12
조선 여성의 삶  (0) 2013.09.11
주막(酒幕)  (0) 2013.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