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신라사(新羅史)

금관의 장식품은 무엇을 뜻할까?

야촌(1) 2012. 8. 27. 23:02

 금관의 장식품은 무엇을 뜻할까?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곳은 신라 1000년 역사 중에서도 김알지의 후예들인 김씨 마립간들이 통치하던 5~6세기의 적석목곽분이다.

 

형태는 크게 외관과 내관으로 구분하는데, 외관은 신비로울만치 화려하다. 한자 ‘산’(山)자(‘出’자라고도 함) 3~4개를 위에서 아래로 붙여놓고(세움장식) 그 좌우에 사슴뿔 모양의 장식가지를 세워 ‘산’자와 함께 금관의 골격을 이룬다. 거기에 곡옥(곱은옥)이나 영락(瓔珞, 달개장식), 새의 날개 같은 장식이 달려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이러한 형태의 관을 수지녹각형관(樹枝角形冠)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주변 지역에서는 유사품을 찾아볼 수 없다. 금관의 무게를 따져보면 1Kg이 넘는다. 평상시에 이런 금관을 쓰고 다닐 수 있었을까. 또 허리띠는 무게가 4Kg에 이른다. 금동신발도 평소 신고 다니기에는 굉장히 크다

 

 

 금관의 장식품은 무엇을 뜻할까! 

 

↑금관의 구조 및 명칭

 

왕관의 나뭇가지 모양새는 한자 출(出)자의 모양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품으로 이루어졌는데, 신라 금관은 대부분 이런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금관의 겉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반짝이도록 얇고 둥근 금판(달개장식)을 매달았고, 그 사이 사이에는 비취로 만든 곡옥(곱은옥)을 달았으며, 좌우 양쪽에는 금으로 호화롭게 꾸민 긴 수식(드리개)을 내렸는데 그 끝에는 역시 비취 곡옥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 모습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신라의 금관들은 대개 크고 작은 나무와 새, 사슴뿔, 달개장식과 곱은옥 등 각종 장식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요. 우리는 이 장식

물에서 아름다움과 당시 왕들의 힘과 재산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바램을 엿볼 수 있어요.

 

신라 금관의 기본 모양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라인들이 타고 다니며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나무(당산목)를 정해두고 보호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금관에 장식된 ‘새’는 금관의 주인공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주로 지도자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곡옥’은 비취색의 영롱한 빛을 띄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라 왕족의 자손이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장식품이라고 추측됩니다.

 

이처럼 신라의 금관은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답고 신라인들의 뛰어난 금세공 기술(금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꾸미는 기술)을 엿볼 수 있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죠. 또한 금관의 화려한 장식물들을 통해 신라인들의 생각과 생활모습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므로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신라의 금세공 기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거기에 달려 있는 장식품(국보 제

88호), 금제 교구(금으로 만든 허리띠고리, 국보 제89호), 금 귀걸이, 금제 뒤꽂이, 금제 관식 등이 있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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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 장식물의 의미 

 

↑서봉총 금관

 

금관 외관 구조의 골격인 ‘산’자 형태는 나무를 도안화한 것이며, 내관의 속내를 만든 자작나무는 흉노의 대표적 유물인 노인울라(외몽골, 기원전 1~기원후 1세기) 고분군이나 남러시아의 쿠르간에서도 발견되는 성스러운 나무이다.

 

지금도 매해 음력 4월에 열리는 대관령 서낭제에서 신수(신령스러운 나무)를 베는 대목이 있는데, 우리네 조상들도 아득한 옛날부터 나무는 땅과 하늘,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통로, 곧 우주수라고 믿어왔다.

 

우리의 우주수는 가지에 태양 10개를 걸 수 있으리만큼 큰 부상(扶桑)이다. 나무 일반이 그러하거니와, 특히 자작나무는 북방 민족들이 신성시 하는 나무다. 이렇게 보면 신라 금관은 우리와 북방민족들의 전통문화가 잘 어울린 융합물이다.

 

금관의 주요 장식의 하나인 곡옥의 경우, 이때까지는 신라 특유의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미에 관해서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의 상징이라느니, 초승달 모양이므로 월신사상에서 유래되었다느니 하는 등 의견이 구구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동부 알타이에 있는 기원전 5~3세기의 파지리크 고분군 5호분의 모전 벽걸이에 새겨진 기사도가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신좌에 앉아 있는 여인으로부터 신적 권위를 하사받는 서아시아 아르메니아 인종의 한 기사가 탄 말의 가슴과 콧등에 곡옥이 각각 한 개씩 달려 있다. 2500년 전 알타이 지방을 방문한 아르메니아 기사가 신라 곡옥의 비밀을 파헤쳐주고 있다.  

 

  

     ↑곡옥 

 

 

관에 달린 곡옥과 영락(달개)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 곡옥은 원래 생명의 상징으로서 다산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모양의 장식을 가지라고 부르면서 씨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가 고신라보다 편년상 더 이르니 신라의 곡옥 디자인은 그리스로부터 알타이 지방을 관통하는 초원로를 통해 전해졌다고 가정해 볼 만하다. 

 

금관총 금관의 장식으로 발견된 새 날개는 하늘을 받드는 신조(神鳥)사상과 유관한 것이다. 알타이 부근의 우코크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얼음공주’의 머리에 사뿐히 앉아 있는 금제 새는 오늘날까지도 우리네 솟대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연상케 한다.

 

인간들이 절대자를 향해 기복행위를 할 때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새에 대한 신조사상은 우리와 일본을 포함해 알타이계 민족의 보편적인 영혼관이다. 

  - 송수일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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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은 과연 샤먼(무당)이 쓰던 관이었을까?  

 

              ↑금관의 외관(대관)                              ↑금관의 내관(모관)

 

벨기에 헨쩨 교수가 20세기초 ‘동아시아 시대지(Ostasiatische Zeitschrift)'에 ’한대까지 한국에서의 샤먼의 관(Die Schamankronen zur Han Zeit in Korea)'란 독일어 논문을 게재하면서 제기된 ‘신라금관이 샤먼이 쓰던 제의용 관’이란 주장은 오랫동안 신라금관과 관련된 정설의 자리를 지켜왔다.

 

헨쩨 교수는 금관 정면의 ‘出’자형 세움장식이 나뭇가지 모양을 단순화한 것이고 금관 외곽의 녹각(사슴뿔)형태 장식과 함께 “생명과 초인간적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 금관의 근원으로는 시베리아 일대의 샤먼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금관에 있는 나무모양은 시베리아 여러 원주민의 ‘세계수(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나무)’에 대응되며 세계수 꼭대기에는 한 두 마리 새(독수리)가 앉아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금관이 녹각 모양의

 

장식을 가지고 있듯이 예니세이강 유역의 무당이 쓰는 관도 녹각 장식이 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라금관의 샤먼관 주장의 방증으로는 중국 한나라 시대 중국 청동인형이 머리에 녹각형 장식을 가지고 있는 점을 꼽았다.

 

이어 헨쩨 교수는 이 유라시아대륙의 수목과 사슴뿔 모양이 언제 어디서 신라식 삼지관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선 “분명하지 않지만 만주와 몽고, 화북을 포함한 동아시아 어느 지방에서 장식의 도안화가 이뤄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어 그 기본형을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각각의 지역형식을 발전시킨 것이라는 기본 이론을 만들었다.

 

이같은 헨쩨 교수의 기본적 시각을 받아들인 삼불 김원룡 박사는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중심축 양쪽에 3개의 가지를 뻣은 것으로 볼 수있는 형태의 금관들이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신라과는 시베리아 샤먼관의 계통이면서 그 형식이 신라에서 정리 개발된 독특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지금 박물관에서 보는 모습은 윗부분이 벌어져 있지만 실제 출토당시에는 모두 위쪽이 오므라진 삼각형을 취하고 있는 등 지금은 알수 없는 독자적인 착용법이 있었으리라는 추론을 하며 해결되지 못한 많은 의문이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삼국사기 등은 물론 당대의 중국이나 일본 기록에서도 신라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 미스터리라는 것.이에 따라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장례용 특수관이라는 설도 제기되는 등 신라관의 성격과 기능에 관해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다는 설명이다.

 

국문학자 김열규 교수도 이같은 신라금관 샤먼관 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김 교수에 따르면 ‘出’자형은 나무모양 장식의 극단적도완화에 해당한다.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초기 금관은 윤대위에 세워진 세그루의 나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후대로 가면서 ‘出’자형으로 양식화됐다는 시각이다.

 

특히 김 교수는 이처럼 금관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나무의 의미에 주목한다.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환웅이 내렸다는 신단수와 같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존재라는 것.

 

“하늘이 내린 사람(환웅)이 나무아래(신단수 아래) 내렸다면, 그것은 나무를 타고 내렸다고 봐도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 이런식으로 파악하면 단군신화의 환웅은 물론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속에 발견된 김알지의 알도 하늘에서 나무를 거쳐 땅에 이른 것으로 해석된다.

 

김 교수는 이처럼 천신이 타고 내리는 나무가 있으면 타고 오르는 천신의 나무도 있다고 봤다. 바로 민속의 서낭나무와 상고대기록에 보이는 소도기둥이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시각이다.

 

이같은 천신이 의지해서 오르내리는 나무가 바로 ‘신성수(神聖樹)’이고 ‘샤먼트리’,‘세계수’가 된다는 것. 따라서 하늘을 오르는 새와 나무가 결합된 금관총 왕관의 이미지는 새의 날개와 하늘나무로 하늘의 관을 의미하는 천관(天冠)이 된다고 해석한다.

 

이같은 세계수,샤먼트리 이미지에 사슴은 세계수 위의 독수리 처럼 천상과 지상을 연결시켜주는 의미를 지닌 ‘우주사슴’의 의미를 지닌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박혁거새 탄생과 관련된 백마나 고주몽이 하늘에 오를때 탔다는 인마처럼 사슴도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상서로운 동물의 역할을 한다는 것. 이같은 보편적 이미지 때문에 시베리아 샤먼들은 실제로 사슴뿔 관을 쓰고 신과의 교통을 추구한다는 것.또 사슴이 우주동물이 되는 근거로는 “동명왕이 우연히 흰 빛깔의 사슴을 얻었다....<중략>..

 

.동명왕이 ‘하늘이 비류땅에 비를 내려 그 서울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면 굳이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하자 사슴이 매우 슬프게 울었다. 그 소리가 하늘의 귀에 다다르자 드디어 일주일을 두고 비가 내렸다”라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한구절도 소개한다. 

 

 

 

신라금관은 일설에는 편두를 한 머리에만 쓸 수 있는 크기라고 한다.

   

편두 한 신라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마인물형 토기 

 

머리를 어릴 때부터 기형으로 한 두상에서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라는 신라금관과 관련해선 이같은 접근과 추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학계 주류의 신라금관 무관설에 대해 물론 반론도 없지 않다.

 

지난해 5월 발간된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의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지식산업사)란 저서와 박선희 상명대 사학과 교수의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지식산업사)라는 제목의 저서가 신라금관이 샤먼의 모자라는 ‘북방 기원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것.

 

이들은 “신라 금관은 북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민족 고유의 창작품”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아직 두 교수의 저술을 직접 읽어 보지 못한 상황이어서 무엇이라 평할 입장은 아니다.)

 

언론에 요약된 두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면 임 교수는 신라금관의 가지모양 세움장식이 사슴뿔 모양을 따라했다는 설에 대해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은 대부분 5개며 더러 3개인 것도 있으나 2개인 경우는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사슴뿔 한 쌍의 모양을 장식한시베리아 무관(巫冠)과는 모양부터 다르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또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끝부분이 ‘♤’ 모양으로 처리된 것도 ‘움(새순)’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사슴뿔이 아닌, 나무를 본뜬 것이란 해석을 하고 있다.(기존 샤먼설이 나무를 본떳다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닌 만큼 언론 기사만 가지고는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즉 “세움 장식을 사슴뿔 모양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모양과 사슴뿔의 연관성을 밝히지 못해 아예 해석을 하지 않는다”며  “신라 금관의 줄기 부분은 김알지가 최초로 발견된 계림(鷄林)의 신성한 나무(神樹)를 형상화했다”는 해석을 내놓은 것.(이 부분 역시 김열규 교수가 언급한 바 있다.)

 

금관의 세움장식이 신수(神樹)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면 나무의 새순인 움(♤) 모양 장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주장이다.(역시 헨쩨 부터 김 교수 주장의 일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임 교수는 이밖에 새 모양 장식이 붙은 신라 금관이 있고 태아 모양의 곡옥(曲玉)이 장식품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에 주목, “닭울음소리를 통해 황금궤 안에 있던 아기(김알지)가 발견됐다는 알지 신화와 연관지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반면 박선희 교수는 고조선시대 이후 나타난 관모(冠帽)의 형태를 비교 분석,신라금관의 원형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펼쳤다고 한다. 특히 관모의 한 형태인 절풍(折風)에 주목, 한민족은 고대부터 머리를 올려 상투를 트는 고유한 머리 양식을 해왔는데 절풍은 상투를 튼 머리에 알맞은 관모 양식으로서 북방 지역에는 이런 양식이 없다는 입장이다.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감히 용감하게 개인적인 판단을 내려보자면 신라금관의 외형을 고려할 때, 사슴뿔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긴 힘들 듯 싶다. 무덤양식이나 편두 풍습, 금이라는 귀금속의 사용 등 각종 측면에서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유목민과의 문화적 친연성도 부인하기 힘든 듯 하다는 생각이다.(일부 언론에선 수정주의를 소개하면서 기존설을 식민주의 사관이 영향 탓이라고 지적했다.

 

보통 기존 정설을 비판할 때 소위 정설에 대해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매도하는 경우가 많은 데, 개인적으로는 내용으로 승부해야지 식민사관 운운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상당히 ‘비겁한’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거서간,차차웅 등 초기 신라왕들의 칭호도 '제사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점도 신라금관 무관설의 한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각각의 이론이 저마다 근거가 있고, 또 아마도 신라금관의 정체는 단 하나의 정답이 영원히 도출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초기 신라의 왕들은 제사장의 지위를 겸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다.

 

<한국경제/국제부 김동욱기자의 블로그 '김동욱기자의 역사책 읽기"에서

 

출처>토함산 솔이파리ㅣ글쓴이>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