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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이씨 가첩 발문(興陽李氏家牒跋文)

야촌(1) 2013. 4. 10. 02:22

■ 상주 청리(尙州靑里)의 흥양이씨가첩 발문(興陽李氏家牒跋文)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찬(撰)

 

나의 벗인 이준(李埈)이 자기 선대(先代)들의 계통을 죽 늘어 쓰기를 마치 사마천(司馬遷)의 세가(世家)의 예와 같이 하였는데, 더욱더 상세하게 쓰고는 이름을 붙이기를《흥양이씨가첩》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한 집안의 역사책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기 위한 것이다.

다 완성하고는 나에게 보였는데, 내가 그것을 받아 다 읽어 본 뒤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아, 우리 동방에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후인들에게 가르침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의 좋은 계책과 아름다운 행실을 한 사람이 있어도 대부분 민몰되어 전하지 않는다. 에 몇 세대만 지나가고 나면 그 자손들조차도 이미 아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 가첩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고 줄기를 따라가 가지를 찾아, 아래위로 15, 16대 선조들의 언행과 사적 및 혼인 관계와 자손들을 순서대로 남김없이 다 기록하여, 이를 보는 자손들로 하여금 갱장(羹墻)의 사모를 붙이면서 선조들의 뜻을 잘 이어받을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런즉 이준이 후손들을 위하여 계책을 남겨 주는 데 마음을 쓴 것이 대개 역시 부지런하다고 하겠다.

소자(蘇子)가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히 생겨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니 세교(世敎)에 도움을 주는 것이 어떻다고 하겠는가.

 

나는 이에 있어서 또 느끼는 바가 있다. 이 세상의 명문(名門) 망족(望族)으로서 한 시대를 울리고 빛을 발한 자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두 세대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혹 몰락하여 떨치지 못하고 강등되어 민오(民伍)가 됨을 면치 못해 드디어는 기구(箕裘)의 가업을 잃어버리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멸족이 되어 뒤를 잇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앞서 이른바 한 시대를 울리고 빛을 발하였다고 하는 것이 겨우 귓가를 스쳐가는 새소리 정도만이 되고 만다. 그런데 유독 흥양이씨들만은 발원(發源)이 길고 유파(流派)가 먼데도 대대로 의관(衣冠)을 갖춰 입는 갑족(甲族)이 됨을 잃지 않았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여기에서 그 말을 증험하였다.

 

로움을 취하는 데 용감하였던 위위공(衛尉公) 이양승(李陽升)이나 봉공(奉公)하는 데 충심을 다하였던 대헌공(大憲公) 이은(李垠)이나 청백(淸白)한 가풍을 집안에 전하였던 전주부윤공(全州府尹公) 이언(李堰)이나 관대하고 너그러워 다른 사람을 용납하였던 집의공(執義公) 이수천(李壽川)과 같은 분들을 보면, 흥양이씨들의 선행은 과연 쌓은 것이 두텁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하늘에서 도와주어 그 세대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 것은 다행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지금 이준이 또 능히 그의 맏형인 이전(李㙉)과 더불어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힘써 실천하여 효우(孝友)의 실제와 정성스러운 행실이 이미 온 나라 사람들로부터 미더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서로 더불어 권면하면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더 매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선행을 쌓는 일이다. 러니 지금 이후로 흥양이씨 집안의 경사스러움은 더욱더 아름답게 빛나서 흥양이씨의 가첩을 짓는 것이 장차 이 한 편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 성대하기도 하다.”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를 써서 이준으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동시에 그 자손들에게도 영원토록 끊임없이 힘쓰게 하는 바이다.

 

글 출처>이택용(李澤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