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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주지 서문(咸州誌序文) - 함안군지

야촌(1) 2012. 8. 17. 02:31

함주지(咸州志, 경남함안군지)는 우리나라 군지(郡志)로서는 가장 오래돤 관지(官誌)로서, 1995년 1월 15일 함안문화원에서(咸安文化院)에서 간행한 국역 함주지(國譯 咸州誌)를 필자가 소장하고 있으나 구미 향토사학자만농(晩濃) 이택용(李澤容-韓山 李山海先生 後孫)선생의 국역(國譯)이 더 합당한것으로 여겨져 이곳에 소개 올립니다.

 

■ 함주지(咸州誌, : 경남함안군지)에 대한 서문

      우리나라 군지(郡誌)로서는 가장 오래돤 관지(官誌)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내가 병으로 기력이 쇠하여 서울로 올라가 벼슬살이를 하지 못함으로써 성은(聖恩)을 저버리고 집안에 들어앉아 두려운 가슴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성상께서 관용을 베풀어 제수하는 명이 자주 내려오고 또 이어 경남 함안(咸安)의 수령으로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그러니 병든 몸을 부축하고 서울로 달려가 사은 숙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이 여의치 않아 두 번에 걸쳐 사양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곧 내가 처음 함안에 부임하게 된 계기이다.

 

지닌 덕은 백성의 어른이 되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재주는 복잡한 직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어, 가까스로 지나온 반년 동안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혜택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미치지 못하고 허물은 나날이 불어나기만 하였다.

 

어디를 둘러 보든 후회되고 유감스러운 일이 산적하고, 게다가 고질병이 더 깊어져 스스로 감당할 힘이 없으니, 이 점이 또 내가 장차 함안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이다. 함안 고을은 땅은 넓지만 물산이 풍부하지 못하고 백성은 수수하지만 순후하지 못하다.

 

옛날의 상황을 얼추 훑어보면 유수한문사(文士)가 배출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그 자료를 찾아볼 때 근거로 삼을 만한 문헌이 없으니, 이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어찌 함안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나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이미 이 고을 수령으로 앉아 있는데, 만일 나의 후임으로 부임하는 자들이 또 어떤 문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이 고을에서 중국의 노(魯)나라 선보(單父) 고을의 복자천(宓子賤) 수령이 사귀었던 벗을 구하고 또 무성(武城) 고을의 자유(子游)수령이 만난 공명정대한 인물을 얻었다.

 

이칭(李稱, 字 汝宣)은 관대하고 온후한 군자이고, 박제인(朴齊仁, 字 仲思) 은덕을 지닌데다 지조가 있고, 이정(李瀞, 字 汝涵)은 재주와 행실이 다 높아 이들 모두 내가 경외하여 항상 만나고 서로 즐겁게 지내는 자들이다.

 

오운(吳澐, 字 太源)도 본 고을의 선배로서 지금 향교의 제독(提督)으로 있다.

공사 간에 서로 모여 자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던 중에 내가 수집한 산천과 백성들의 풍속에 관한 기록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가 이것들을 편찬하여 군지(郡志)로 만들어 보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곧 내가 원하던 뜻이었다.

 

서로의 의견이 일단 일치되자 수집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공동으로 수행하여 열흘 동안 손질한 끝에 작업이 끝났다.

 

만일 제군의 정성어린 마음으로 민첩하게 도와준 힘이 아니었다면 어찌 일이 이처럼 빨리 완성되고 그 과정이 이처럼 조리가 있을수 있었겠는가. 서울까지의 이수(里數)를 맨 먼저 표시하고 지역 범위의 원근을 그다음에 배열하였다.

 

지방관으로서 충성을 바쳐 임금을 보좌하는 일이 물론 으뜸가는 의리이기는 하지만 강토의 경계를 올바로 규명하는 것도 마땅히 우선해야 할 일이다. 제도의 연혁과 고을의 호칭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고 지형이며 풍속도 반드시 먼저 따져 알아야 할 일이므로 그다음에 배열하였는데, 각 마을의 풍토와 전결(田結)ㆍ호구(戶口)의 수효 및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농사에 관한 것 또한 어찌 소홀히 다룰 부분이겠는가!.

 

산천은 험난하고 평탄한 곳이 있고 토산품은 귀하고 흔한 것이 있으며, 나그네가 편히 쉴 수 있는 객사와 외부의 침입을 막는성곽, 그리고 신을 모시는 제단이며 사당과 선비를 양성하는 학교에 관한 사항들을 이미 각각 순서대로 배열하였는데, 여행객에 관한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되고 도적떼를 소홀히 다루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권장해야 할 밭갈이와 누에치기에서부터 심어 가꾸어야 할 과일 나무, 그리고 울적한 가슴을 트이게 하는 정자와 물을 편히 건널 수있는 다리에 관한 것들도 다 그다음 차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찰의 흥성과 퇴락이며 고적의 유래에 관한 것도 다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킬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전임 수령의 성명을 나열한 다음 그 뒤를 이어 이름난 관리를 드러내 밝혔는데, 이는 진정 관리가 된 자들이 무엇보다도 깊이알아야할 부분이다. 아울러 고을의 성씨와 그간 세상에 드러난 인물, 고을에 사는 백성이며 유배되어 온 사람들에 대해, 이미 지난 시대의 훌륭한 점과 현재의 행실들을 자세히 갖추어 신중히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이 고을 사람이 이 부분에 대해 그 느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90년을 살면 100세에 가까운 나이로 세상에서는 대로(大老)로 인정하고 국법에는 그 이름을 기록하게 되어 있다. 지금 현존하는 사람에 한하여 기록한 것은 이 책이 현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문과와 무과, 생원과 진사과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보고 들은 대로 모두 기록하였는데, 이 어찌 정치가 청명한 이 시대에 그만 둘수 없는 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무덤을 표시하여 거기에 누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고, 정문(旌門)을드러내어 실제 사적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책판(冊板)

 

또한 유가의 도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물건이며, 경물을 읊은 시 작품도 그것을 통하여 그 사람 생각의 잘잘못을 살펴보고 그시대운수가 성 했는가 쇠퇴했는가를 점칠 수 있는 것이다. 고을 안에서 전후 시대에 걸쳐 일어난 어떤 기록할 만한 일이거나 증명해 둘만한 유적에 관해서는 비록 굳이 후세에 전할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또 전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항간의 이야기와 속담은 오히려 세상의 교화에 관계될 수 있는 것이기에 감히 그것을 무시해 버리지 못하고 많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그 뒷부분에 보충해 넣었다. 이리하여 본 고을에 관한 것으로서 알아볼 만한 것, 기록할 만한 것, 거울로 삼아 따르거나 경계할 만한 모든 일들이 더 이상 미진한 점이 없게 되었으며, 제군이 군지를 만들자고 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유감스러운 점이 없을 수 없다. 본군에 관한 일로서 기록할 만한 것은 이미 다 기록하였다고는 하지만 이중에는 혹시 기록하면 안 될 것이거나 혹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백성이 가난한 이유가 비록 땅의 척박함과 자연 현상의 재해로 인한 것이기는 하나 부역이 많고 형벌과 정사가 혹독하여 관리들이 동서남북에서 종횡무진으로 떠들고 못살게 하니, 설사 백성이 기름진 땅에 산다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 보전할 자가 있겠는가.

 

풍속이 야박한 이유가 비록 오래된 나쁜 풍토로 인한 것이기는 하나 교화가 근본이 없고 예법이 일어나지 않아 오직 법령과 규제만엄할 뿐이니, 아무리 순박하고 수수한 선비가 이 속에 어울린다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 착해질 자가 있겠는가.

 

더구나 공문은 날로 쌓이고 국경의 경보는 날로 급하며 백성에게 징수하는 것은 많고 상부에서의 질책이 준엄하여 수령으로 있는 자가 항상 정해진 기간 안에 재물을 출납하거나 각종 문서를 처리하는 데에 시달리느라 제 한 몸도 돌아보지 못할까 우려하는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백성을 살리는 방도와 선비를 배양하는 일에 유념할 자가 있겠는가.

 

탐욕을 부리고 간사하며 잔인하고 포악한 아전과 교묘하게 외모를 꾸며 남들의 찬사를 구하는 선비는 정말 내가 귀로 듣고 싶은 자들이 아니지만 이들도 어찌 그사이에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겠는가. 그러나 이는 오늘 이 시점에서 말할 일이 아니다.

 

다만 오늘날 기대하는 것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앉은 자가 앞서 말한 점들을 깊이 경계하되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며 그 근본에 관해 한층 더 힘쓰되 백성을 편히 해 주고 풍속을 좋게 할 도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니, 그에 따라 나타나는 보람은 내가 감히 언급할 일이 아니고 또 내가 감히 측량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앞서의 그 말들을 하고 싶지 않더라도 어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고을에 호적을 두고 있는 백성들도 뒤로 물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농사에 힘을 기울이고 학문에 힘쓰되, 중단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위로는 나라에 내는 부세의 의무를 다하고 아래로는 몸가짐과 가정생활을 올바로 하는 법도를 잃지않은 바탕 위에서 친척과 이웃 간에 서로 화목하고 어린이와 어른 상호간의 서열을 어기지 말며 옳은 도리와 학문을 갈고닦아 깊은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우리 한 고을의 습속이 누구를 막론하고 다 인의 도덕의 위치로 올라가 우리 임금께서 펴시는 문명의 정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면, 이것이 곧 오늘날 내가 간곡히 기원하는 바이며 또 내가 한탄하는 깊은 뜻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587년(선조 20) 8월 임신일에 함안군수 청주인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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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서문은 1587년(선조 20) 가을에 지은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올 계획을 이미 정하고서 오늘내일 중에 벼슬을 그만둘 처지였다. 그러고서도 당장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다시 한 해를 더 머무른 뒤에 비로소 돌아왔다. 한 해를 더 머무는 동안에 허물은 더 많아지고 병세가 더 깊어진 가운데 근심 걱정이 더욱 심하여 쓰라린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함주지 내용 중에 여제단(厲祭壇)을 중수한 것이나 청직사(淸直祠)를 신축한 사항은 다 후일에 있었던 일로서 추가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성황단(城隍壇)은 과거에 군 북쪽에 있었던 것을 중간에 남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가 너무 비좁아 옛날 위치로 다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감사의 의견과 서로 맞지 않아 편지로 두세 번 서로 의견을 조율하였고 그러던 중에 나의 사직서가 받아들여져 결국 옮기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일은 정말 유감스럽다. 하지만 능히 신령을 받드는 장소에 정성을 다하고 훌륭한 정사를 이룩할 어진 후임 수령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을 극진히 받드는 그 마음으로 깊이 헤아려 보다 좋은 쪽을 택하여 따르면 될 것이고, 그 장소를 옮기느냐 옮기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거론할 것이 못 된다.

 

내가 함안군수직을 그만두고 돌아온 때는 마침 1588년(선조 21) 7월 15일 이었는데 낙동강에 배를 띄워 물길을 거슬러서 올라왔다.

하늘이 높고 물은 맑은데 단풍나무와 국화가 강기슭에 널려 있고 하얀 달이 빛을 뿌려 흥취가 진진하였다.

 

나는 고을 사람들에게 전송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평소에 상종하던 많은 사우(士友)들이 강가에 나와서 작별하였는데,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기도 하고 혹은 노래를 불러 석별의 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지리산 구경 길에 나선 이기춘(李起春, 字 季郁)과 박성(朴惺, 字 德凝)을 만났는데, 이들은 산으로 놀러가느라 그 행색이 나의 모습과는 서로 달랐지만 외적인 사물을 잊고 산천에 마음을 부쳐 그 속에서의 낙을 즐기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배를 함께 타고 중국의 후한(後漢) 때의 명사인 이응(李膺)과 곽태(郭太)가 남긴 기풍을 상상하였으니, 이 일이 후일에는 반드시 함주지의 고사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산중에서 문을 닫고 앉아 우연히 이 책을 뒤적이노라니 가슴에 일어나는 감회가 없지 않아 붓을 잡아 이 글을 써서 한 토막의 얘깃거리를 제공하는 바이다.

 

1589년(선조 22) 정월 대보름 하루 전날에 회연야인(檜淵野人) 정구(鄭逑)는 쓰다.

 

↑필자 소장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