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문집.고서.문헌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 李全仁 編

야촌(1) 2013. 8. 2. 23:29

■ 이전인(李全仁)

 

여과아자야(汝果我子也) :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니라.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은 젊은 시절에 정을 둔 기생(妓生)이 있었다.

그녀가 임신(姙娠)한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지사 『知事: 知中樞府事 등 정2품부터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종3품까지의 벼슬』로 있던 조윤손(曺潤孫)이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해산달이 되어 아들을 낳자, 조윤손은 이름을 '옥결(玉缺)'이라 지었고, 장성(長成)하자 후사(後嗣)로 삼고 집과 논밭, 노비(奴婢)들을 문서(文書)로 작성하여 주었다. 이언적이 조윤손에게 장난삼아 말했다.

"첩(妾)이야 공이 마음대로 가지지만, 아들놈은 어째서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조윤손은 그저 한 차례 웃을 뿐이었다.

 

조윤손이 죽자 조옥결(曺玉缺)은 장례를 치르고 시묘(廬墓) 살이를 하는데, 이언적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머니한테 물으니,

"너는 사실 회재선생의 아들이니라"고 했다.

 

"저는 조씨 댁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상례(喪禮)를 마치겠습니다."

옥결은 상례를 마치고 물려받은 문서를 조윤손의 자제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경주(慶州)에 가서 회재부인 박씨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부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언적의 유배지(流配地)에 가보라고 했다.

 

옥결이 강계(江界) 유배지로 회재를 찾았더니,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니라"

하고는 이름을 전인(全仁)으로 고쳐 주었다.

 

이전인『1516(중종 11)-1568(선조 1)』은 호를 잠계(潛溪)라 하였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도학자로 천거를 받아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 : 빈객에 대한 연향·宴享을 맡아보던 관아인 예빈시의 정3품 당하관·堂下官)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무잠계(無潛溪) 무회재(無晦齋) 즉 잠계가 없으면 회재가 없었다.

할 정도로 평생 아버지의 학문을 선양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자료문헌]

《기문총화(記聞叢話)》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