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박은 신도비명(朴訔 神道碑銘)/반남인

야촌(1) 2013. 4. 2. 18:46

평도공(平度公) 휘(諱) 은(訔) 신도비명

 

박세채(朴世采) 찬

 

우리 9대조 좌의정 금천부원군 평도공(左議政錦川府院君平度公)은 영락(永樂) 20년 세종 4년(1422)에 서거하시어 양주(楊州) 치소 남쪽 중량포(中良浦)에 장사지냈다. 75년 뒤인 홍치(弘治) 9년 병진년 연산군 때에 그 산이 나라의 쓰는 바가 되었기에 마침내 8월 임진일에 광주(廣州) 치소 북쪽 고다기리(高多岐里) 계좌(癸坐) 정향(丁向)의 언덕으로 묘를 옮겨 부인의 묘와 함께 쌍분(雙墳)이 되었다.

 

공의 휘(諱)는 은(訔)이요, 자(字)는 앙지(仰止)며 호(號)는 조은(釣隱)이다. 박씨의 세계(世系)는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에서 나왔다. 신라가 망한 뒤 후손들이 여러 읍에 흩어져살았는데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을 얻은 이가 공의 선조이다.

 

증조부 윤무(允武)는 양온령(良醞令)이요 조부 수(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며 선고(先考) 상충(尙衷)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세상에서 반남선생(潘南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반남선생은 젊어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사우(師友)가 되었으며 뒤에는 학관(學官)을 겸해서 유학을 함께 창도하였다.

 

신우(辛禑) 초년에 간신 이인임(李仁任)이 국정을 전단해서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할 것을 의논할 적에 선생이 두 번 상소를 올려 그의 잘못을 극언하고 잇달아 이인임의 죄를 청하니 여러 간신들이 모두 성을 내며 장형을 가하고 유배를 보냈는데 길에서 돌아가셨다.

 

본조 금상(今上) 7년 유사(有司)에게 명해서 ‘문정(文正)’이라고 시호를 내린 뒤 제사를 지내고 사당을 지어 기렸다. 선비(先妣)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 추증되었으니 한산 이씨(韓山李氏)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따님이다.

 

공은 명 홍무(洪武) 3년 공민왕 19년 경술년(1370년)에 태어나니 도량이 출중하였다. 6세에 부모를 모두 잃고 의지할 데 없이 홀로 고생하였다. 조금 커서 분발하여 스스로 독서할 줄 알자 외숙인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이 시로써 기쁨을 표시하였다. 9세에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가 되었고 1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9세에 병과(丙科)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하였는데, 그 때 대책(對策)의 문사(文辭)가 매우 뛰어나서 시험을 관장하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양촌(楊村) 권근(權近)이 다 그의 글을 취했다고 한다. 전례에 따라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에 임용되었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후덕부승통례문부사(厚德府承通禮門副使)가 되었다.

 

다음해 임신년에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으로 옮겼는데, 마침 태조대왕(太祖大王)이 개국해서 지방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 조금 뒤 치적이 뛰어나 좌보각 겸지제교(左輔閣兼知製敎)가 되었다.

 

얼마 뒤 다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을 때 태종이 잠저(潛邸)에 있었는데, 의기투합하여 큰 그릇으로 여겼다. 마침내 공이 상소해서 “합하(閤下)께서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시니 제가 어찌 보통 사람으로서 보답하겠습니까.

 

지금 합하께서는 임금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고 국가와 존망을 같이 하시니 이것이 합하께 생사(生死)를 의탁하는 소이요, 권신(權臣)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수년 뒤에 조정에 들어가 사헌시사(司憲侍史)가 되었는데 계림군(鷄林君) 유량(柳亮)이 일찍이 일 처리 때문에 공을 비난하였으나 공은 굴하지 않았다.

 

그때 조정에서는 유공(柳公)이 몰래 항복한 왜인과 결탁하였다고 생각하고 사헌부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집정자들은 공이 유공에게 숙원이 있으니 반드시 이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공이 대(臺)에 오르자 유공은 공을 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서리가 죄안을 들고 공에게 나아가니 공이 붓을 던지며 큰소리로 “허물 아닌 것으로 남을 모함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않아 유공이 무사하게 되었다.

 

이 일로 집정자의 뜻을 거슬러 다시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유공이 후에 정승이 되어 공에게 감사해 하며 “나는 진실로 소인이다”라고 하였다.

 

무인년 사변이 있었을 때 태종은 오래전부터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공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니 태종이 머물러 의논에 참여해서 책략을 결정하게 하였다. 승진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에 임명되었다. 정종 원년 기묘년(1389)에 사수감(司水監), 지형조등사(知刑曹等事)를 거쳤다.

 

이듬해 역신 박포(朴苞)가 또 반란을 도모하자 공이 태종을 도와서 전략을 세우니 그 무리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그 후 인녕부 좌사윤 세자좌보덕(仁寧府左司尹世子左輔德)이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에 올랐다가 좌산기상시 보문각직제학사(左散騎常侍寶文閣直提學士)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태종이 즉위하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로 올라 형조전서 수문전직학사(刑曹典書修文殿直學士)가 되었다. 신사년 공의 나이 32세 때, 다시 호조, 병조, 이조 등 삼조 전서(三曹典書)를 거쳐서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으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의 위계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반성군(潘城君)이 되었다.

 

이듬해에 강원도관찰출척사(江原道觀察黜涉使)가 되었고 태종 3년 기미년에 한성윤(漢城尹)으로 옮겼으며 병술년에는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공은 고을 수령으로부터 관찰사에 이르기까지 임명된 곳마다 위엄과 은택이 있었다.

 

마침 명 황제가 환관 황엄(黃儼)을 보내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였는데 황엄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니 여러 도민들이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홀로 예의로서 접대하니 그의 위세를 거두고 감히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그가 돌아갈 때 태종에게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좌군도총제부 동지총제 집현전제학(左軍都摠制府同知摠制集賢殿提學)에 임명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그 후 명 황태후 진향사(進香使)로서 북경에 다녀와 복명하고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參知議政府事兼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다. 공이 누차 입각(入閣)된 이들을 쫓아내니 가장 기강을 세운 이로 이름이 났다.

 

이때 좌정승(左政丞) 하륜(河崙)이 국사를 전결하고 다른 재상들은 오직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공이 적절하지 않는 일을 보게 되면 문득 일어나 하공 앞에 나아가 힘껏 쟁론하고 듣지 않으면 공도 또한 서명하지 않았다. 하공이 매우 꺼려 형조판서로 전임되었다.

 

기축년에는 보문각제학 겸 의용순찰사사(寶文閣提學兼義勇巡察使事)에 임명되었다가 지방으로 나가 서북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西北都巡問察理使兼平壤府尹)이 되었다. 명을 받아 평양성을 쌓았는데 겨우 60일 만에 완공하였으되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태종이 조정의 신하를 보내어 궁중의 술과 겉옷과 속옷 일습(一襲)을 하사하였다. 공은 또 의주(義州)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유랑하니 그해 조세를 감해 달라고 말하여 태종이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호조판서로 옮겼고 주현(州縣)의 연혁으로 인해 금천군(錦川君)에 다시 봉해졌다. 또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하였는데, 송사를 판결할 때는 그 실정(實情)을 아는 데 힘쓰고 대중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곤장을 때리는 데 정수(定數)가 없음을 보고 “매질 아래 무엇을 구해 얻지 못 할까”라 하면서 바로 계를 올려 태형(笞刑)은 30대를 치는 것을 일차로 하자고 하니 길이 불변의 규정이 되어 지금까지 그에 의지한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전임되었다가 조금 뒤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겸하였다.

 

을미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위계에 올라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상소하여 옛 전장(典章)을 바꾸지 말라고 청하니 태종이 가납하였다. 옛 제도에 이조(吏曹)가 대간(臺諫)의 공적을 살펴보는 일이 있으니 공은 또 계를 올려 이를 실행하기를 청하였다.

 

병신년에 공이 47세로서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로 임명되었고 조금 뒤에 의정부 우의정 겸 수문관 대제학 영경연사 세자부 금천부원군(議政府右議政兼修文館大提學領經筵事世子傅錦川府院君)에 승진하였고 공신으로서 동덕(同德)의 호(號)를 더하였다. 겨울에 이조판서를 겸하고 세자사(世子師)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니 태상왕(太上王) 을 봉숭(封崇)하는 진책관(進策官)이 되었다. 이때 비로소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으며 항상 국가가 백성에게 절제 없이 취하는 것을 염려하여 당(唐)의 조용조(租庸調) 법에 의거하여 백성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채용하지 못하였다가 뒤에 정부(政府)에 글을 내려 한탄하였다. 신축년에 병으로 면직하고 부원군으로서 사제(私第)로 나왔다. 그때 태조에 배향할 공신을 논의하였는데 태상왕이 ‘남은(南誾), 이제(李濟)는 공이 크니 추배(追配)할 만하다’고 하니 유정현(柳廷顯), 허조(許稠) 등 군신(群臣)들이 모두 지지하였다.

 

태상왕이 김익정(金益精)을 시켜 공에게 가서 묻게 하니 “남은 등은 진실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으나 태상왕 전하께서 지극히 공정하시어 그의 공만 알고 죄는 용서하여 태조의 유지(遺志)를 시행하시니 신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해서 남은과 이제가 마침내 추배(追配)될 수 있었다.

 

다음해 임인년에 병이 더욱 심해지니 태상왕이 약을 하사하고 한편으로 궁궐음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궁중 요리사를 공의 사저로 보내어 “조석으로 나에게 내었던 음식으로 보살피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태상왕도 이미 병이 들었는데 오히려 내관을 보내어 문병하니 공이 태상왕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노신은 병으로 죽을 것이오나 성명(聖明)께서는 만년을 누리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5월 9일에 서거하니 향년 53세이다. 부음을 알리니 조정에서는 전례대로 조회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에 태상왕이 서거하였다.

 

공의 부인은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주씨(周氏)로서 전법판서(典法判書) 언방(彦邦)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규(葵)는 경상도관찰사요, 차남 강(薑)은 좌익공신 금천군(佐翼功臣錦川君)이며 막내아들 훤(萱)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이다.

 

딸들은 각각 부사(府使) 윤구(尹救), 상호군(上護軍) 김윤(金潤), 관찰사(觀察使) 이중(李重), 판중추(判中樞) 어효첨(魚孝瞻)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 증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뒤 인성(仁聖), 의인(懿仁) 두 왕후가 인종(仁宗) 선조(宣祖)의 성덕(聖德)과 짝하였으니 실로 태임(太任) 태사(太姒)의 성대한 가문이 된 것이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호쾌하고 기특하며 견식이 명확하고 투철하며 의론이 확실(確實)한데다 청렴과 신중,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어 조정 안팎을 출입함에 명성과 업적이 성대하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태종에게 지우를 받아 중간에 어려움도 겪었으나 충성과 계책이 더욱 드러나서 그때부터 유악(帷幄)에서 부지런히 애쓰며 특별한 우대를 받았다.

 

이에 군대를 다스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대계와 관련된 일이라면 반드시 참여하여 논의하게 하였으니 비록 동열(同列)의 제공(諸公)들은 듣지 못하였어도 공은 홀로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사심이 있는 것으로 의심받기도 했으나 그 원인을 조사해보면 확실히 다 그렇지 않았다.

 

장례 때 세종이 ‘평도(平度)’란 시호를 내렸으니 ‘평’은 기강을 다스린다는 뜻이고 ‘도’는 마음이 의로 제어한다는 뜻이다. 또한 제관(祭官)을 보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각컨대 경은 성품이 명민하고 도량이 크고 깊어 재예(才藝)로 일찍이 과장(科場)에서 합격하였고 명성은 이미 다른 관리들보다 뛰어났다. 재능은 세상을 경영하는 데 능하였고 총명하여 전장(典章)과 제도(制度)에 익숙하였으며 도(道)는 시의(時宜)를 통달한 것이고 유술(儒術)로 빛을 내었도다.

 

풍채는 고고하여 세속인과 합하기 어렵고 의론은 당당하여 스승이 될 만하다. 수령으로 등용하면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흠모하였고 조정에 임명하면 기강을 바로잡아 엄숙해졌도다.

 

관서(關西)에 성을 쌓은 성대한 공적은 신백(申伯)의 정성을 넘어서지 못하랴. 태형(笞刑)을 줄였던 어진 마음은 소공(蘇公)이 벌에 신중했던 일에 부끄러움 없으리라. 형관(刑官)이 되었을 땐 억울한 옥사가 저절로 다스려졌고 말고삐 잡고 수령으로 나갔을 땐 송덕의 노래가 누차 일어났도다.

 

근본이 마음에 뿌리내려 단단해 뽑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어찌 우아한 아름다움이 겉으로 나타나 찬연한 문채가 있겠는가. 처음에는 우리 집안을 걱정하더니 끝내 선왕의 창업을 도왔도다.

 

공신에게 내린 단서(丹書)는 임금의 맹서를 드러내니 흰 해처럼 그 충성은 빛났어라. 그의 작위를 조정에서 으뜸이 되게 하여 이조에서 인사권을 전담케 한 것은 당연하도다. 부덕한 내가 대업을 이어받아 탕왕과 문왕의 치적은 분산되어 잇기 어려우나 이윤(伊尹), 소공(召公)의 사업이야 거의 그대에 힘입어 이루어졌도다.

 

바야흐로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리기를 바랐는데 어찌 하늘이 원치 않을 줄 알았으랴. 경이 세상을 떠나던 날은 바로 내가 부왕의 상을 당하던 때라 갑자기 곤궁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무너지듯 하였으니 어찌 근심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난 행적을 뒤좇아 생각하니 애연히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다. 이미 시호로 이름을 내린 뒤에 간소한 제물로 끝을 장식하노라.” 이것은 대개 공의 출처(出處) 대체(大體)가 이미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임금과 신하가 제대로 만난 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성대하도다.

 

처음 공을 광주(廣州)로 이장(移葬)하였을 때 공의 손자인 숭질(崇質)이 호조판서로서 묘비와 묘갈 두 가지 글을 다 썼으나 오직 장사 지낼 때의 날짜와 자손의 관직과 품계만을 기록하였으며 공의 실제 자취에 대해서는 끝내 천발한 바가 없었다.

 

이제 부득이 삼가 공의 유장(遺狀)과 다른 책에서 한두 가지 본 것을 모아 묘비문을 만들어 신도(神道)의 동남쪽에 세우니 후일에 참배하러 온 후손이 이로 인해 그 대략을 알기를 바라노라. 오직 그 연대가 오래되어 견문이 미칠 수가 없지만 빠진 것은 있어도 과장한 바는 없을 것이니 이것이 내 자신의 역량을 다 바친 글이다. 이에 명(銘)을 붙이노니 다음과 같다.

 

아득한 홍가(鴻嘉) 연간에 백마가 자취를 드러내니,

이에 신인(神人)이 탄생하여 저 진한(辰韓)에 임금이 되었다네.

 

그 사이에 천년이 지나 그 후예들은 나뉘어져 살아가니,

비옥한 금성(錦城)은 남방에 으뜸일세.

 

아아 우리 선조 책을 읽고 실행하여,

덕을 쌓고 경사 심어 오랜 뒤에 일어났네.

 

탁월하신 문정공(文正公)은 고려 말에 태어나,

학문은 세상의 스승이 되었고 충성은 세상이 의지하는바 되었네.

 

원흉이 해쳐 후세가 탄식하였으니,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워 이로써 권면하였네.

 

오직 공이 이어 받음에 기린의 뿔이요 봉황의 부리니,

나라의 예악 문물 보게 되자 성대한 시대에 크게 울었다네.

 

이때 임금께서 백성을 편안히 하고 구제할 것을 생각하니,

어찌 영웅이 없으리오. 공에게 크게 의지했네.

 

마음으로 따라 친하였고 수족처럼 보았으니,

부지런히 힘써 계책을 세우자 여유롭게 치적이 이루어졌네.

 

그때 내란을 평정하여 공훈이 특별하며,

사헌부의 수장이 되어서는 해치(獬豸)처럼 신이(神異) 했네.

 

지방의 수령이 되어서는 따뜻한 봄이라고 칭송 받았고,

수상이 되어서 국정으로 나아갔네.

 

마침 사왕(嗣王)이 등극하여 왕위를 계승하니,

처음 경연을 열어 참된 뜻을 강론했네.

 

백성에게 고정된 부세(賦稅)인 조용조(租庸調)를 시험하니,

밝은 임금 훌륭한 신하는 천년에 한번 만날 뿐이라네.

 

공이 서거하고 태종도 바로 승하하였으니,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 공덕을 공경했네.

 

하물며 후손 중에 왕비 두 분 나왔으니,

우리 동성(同姓) 중에 누가 공의 위대함만 할까.

 

어느 해 이장 했나 이백 년이 다 되니,

또렷이 새긴 글자 이지러져 지나는 자 눈물짓네.

 

미천한 내가 이를 두려워해 감히 뒤쫓아 드러내니,

산과 물처럼 고결(高潔)한 선생의 유풍이여 전하여 후세를 비추리라.


신도비명(神道碑銘) 추기(追記)

 

아아, 우리 선조 평도공(平度公)의 덕업(德業)과 공훈은 위로 지극한 다스림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자손을 위하여 복을 만드는 데 이르렀다. 문순공(文純公) 신도비문이야 아마도 백세에까지 마멸되지 않은 것이나 끝내 그것이 묘도(墓道)를 영화롭게 드러내지 못하고 드디어 황량한 벌판 작은 비석으로 겨우 성명만 표기하여 오백년 뒤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대개 자손들이 깊이 부끄러워할 일이나 지금까지 머뭇거린 원인을 살펴보면 실로 재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금년 봄 종회(宗會) 자리에서 비로소 비석을 세울 논의를 내니 도유사(都有司)인 심서(尋緖) 군이 먼저 일부를 부담하고 이어서 승심(勝尋), 호서(好緖), 승서(承緖), 남서(南緖), 화서(驊緖), 명준(明雋) 등도 또한 그와 더불어 재계하고 정성을 기울이기를 원했다.

 

이 여섯 사람은 또한 상임유사(常任有司)이다. 드디어 법식에 따라 교룡으로 꾸민 머리, 거북이 형상의 받침을 갖추어 세우고 장차 이번 중양절에 제사 지낼 때 고하기로 하였다. 계획이 이루어지자 대략 위와 같이 사유를 기록한다.

 

단기 4304년(1971) 9월, 18대손 승정(勝貞)이 삼가 기록하고 20대손 찬하(贊夏)가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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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평반(平反) : 송사를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는 것. 또는 먼저보다 죄를 가볍게 하는 것을 말함.

2) 임사(任姒) :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주 무왕(周武王)의 어머니 태사(太姒)를 말함.

3) 소공(蘇公) :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부터 성왕(成王) 때에 걸쳐 사구(司寇;법관)를 지낸 소분생(蘇忿生).

4) 감당(甘棠)은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감당(甘棠)임. 주(周)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팔배

    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팔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였음. 후세에

    선정(善政)을 비유하는 고사(故事)로 쓰고 있음.

 

5) 한(漢)나라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B.C 69) 3월 1일에 여러 촌장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바위 위에

    모여 덕망 있는 군주를 찾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런데 양산 아래 나정의 주위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리어 있고 백마(白馬)가 무릎을 꿇고 절을는 모습을

    바라보고 찾아가 보니, 백마는 사람을 보고 울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붉은 알만 있었다. 그 알을 쪼개 보니, 사내아이

    가 있었으므로 경이(驚異)한 나머지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로 지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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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先祖議政府左議政錦川府院君諡平度公墓碑銘 十二月十二日

 

惟我九世祖左議政錦川府院君平度公以永樂二十年卒。禮葬于楊州治南中良浦。後七十五年弘治丙辰當燕山時。以其山備國用。遂以八月壬辰遷窆于廣州治北高多岐里癸坐丁向之原。與夫人葬爲雙墓焉。公諱訔字仰止。號釣隱。朴氏本出新羅國祖赫居世。羅亡子孫散居諸邑。其得羅州之潘南縣者是公先也。曾祖諱允茂。良醞令。祖諱秀。密直副使。考諱尙衷。判典校寺事。世稱潘南先生。少與李牧隱穡,鄭圃隱夢周爲師友。及後兼學官共倡儒學。辛禑初。奸臣李仁任擅國。議迎北元使。先生再上書極言其非。仍請仁任罪。群奸齊怒。杖流之。道歿。至本朝今上七年。命有司追諡文正。致祭建祠以褒之。妣贈辰韓國夫人韓山李氏。都僉議替成事文孝公穀之女。公以皇明洪武三年庚戌某月日生。器字出衆。六歲並失怙恃。零丁孤苦。稍長奮發。自知讀書。舅牧隱文靖公以詩志喜。九歲拜判崇福都監事。十六歲中進士試。十九歲及第丙科第二名。所對策辭甚俊拔。主試三峯鄭道傳,陽村權近皆取其文。例授權知典校寺校勘。累轉厚德府丞,通禮門副使。明年壬申遷開城府少尹。會値太祖大王開國。出爲知錦州事。尋以政最拜左輔闕兼知製敎。未幾復爲知永州事。時太宗在潛邸。志義相合。甚器之。公遂上書曰。閤下不以衆人待之。我豈以衆人酬之。今閤下同君之休戚共國之存亡。則所以寄死生於閤下。非媚竈也。數歲入拜司憲侍史。鷄林尹柳公亮嘗以事辱公。公不爲屈。至是朝廷以柳公潛結降倭。令憲司治之。執政意公有宿怨。必無平反。及公上臺。柳公視公輒俯首垂涕。吏執案詣公。公投筆曰非辜陷人。吾不爲也。遂不署。柳公得無他。公以此忤執政意。復出知春州事。戊寅之變。太宗久在危疑。公亦領兵而至。太宗留之。俾有參決。進拜司憲中丞。建文元年己卯。歷司水監知刑曹等事。明年逆臣朴苞又謀爲亂。公佐太宗運籌協謨。黨與悉伏其辜。拜仁寧府左司尹世子左輔德。陞通政階。拜左散騎常侍寶文閣直學士。未幾出爲忠州牧使。其冬太宗卽位。陞嘉善階。拜刑曹典書修文殿直學士。辛巳公年三十二歲。復歷戶兵吏三曹典書。策推忠翊戴佐命功臣。陞嘉靖階封潘南君。尋改封潘城。明年拜江原道觀察黜陟使。永樂建元癸未遷漢城尹。丙戌又拜全羅道觀察使。公自州牧至藩臬。所涖皆有威惠。會帝遣宦者黃儼求濟州銅佛。儼貪婪殘暴。諸道望風悚懼。公獨待之以禮。儼戢其威焰不敢肆。還白太宗曰。殿下忠臣惟朴某而已。未幾拜左軍都摠制府同知摠制集賢殿提學。陞資憲階。以皇太后進香使如京師。復命拜參知議政府事兼司憲府大司憲。公屢出入臺省。最以振肅綱維名。時左政丞河公崙事皆專決于己。他相只充位。公見有不便。輒起至何公前力爭。不聽則公亦不署。河公甚憚之。轉刑曹判書。己丑拜寶文閣提學兼義勇巡察司事。出爲西北都巡問察理使兼平壤府尹。受命築平壤城。堇六十日工告訖。不笞一人。太宗遣朝臣宣宮醞賜表裡一襲。公又言義州民失業奔走。請減今年租稅。太宗特從之。還拜大司憲。移戶曹判書。因州縣沿革改封錦川君。復兼判義勇巡禁司事。凡折獄務得其情。不曲循衆意。見訊杖無定數曰。箠楚之下。何求不得。乃啓訊杖三十爲一次。永定恒式。至今賴之。移參贊議政府事。俄兼集賢殿大提學。乙未陞崇政階拜吏曹判書。上疏請毋變舊章。太宗嘉納。舊制吏曹考功臺諫。公又啓請行之。丙申公年四十七歲。拜判中軍都摠制府事。尋進拜議政府右議政兼修文館大提學領經筵事世子傅錦川府院君。功臣加同德號。冬兼判吏曹。陞世子師。明年世宗卽位。爲封崇太上王進策官。時始開經筵。進講大學衍義。常慮國家取民無制。請依唐祖庸調法以均民役。世宗不能用。後下書政府追恨之。辛丑病免。以府院君就第。時議太祖配享功臣。太上以南誾,李濟功大可追配。而群臣柳廷顯,許稠等皆持之。太上使金益精就問公第。對曰誾等誠有不赦之罪。然太上殿下大公至正。念功釋罪。以體太祖之遺旨。臣以爲允當。誾濟遂得追配。明年壬寅疾益甚。太上賜醫藥。且分御廚。仍遣內饔人于公第。命曰朝夕視予所御。當疾革也。太上已不豫。猶遣中官問疾。公聞太上疾彌留。泣曰老臣病且亡矣。聖明宜享萬年。竟以五月九日卒。壽五十有三。訃聞輟朝如儀。翌曉太上薨。公配辰韓國夫人周氏。典法判書彥邦之女也。有三男四女。長葵慶尙道觀察使。次薑佐翼功臣錦川君。次萱慶州府尹。女適府使尹救,上護軍金潤,觀察使李重,判中樞魚孝瞻。孫曾以下甚繁不可記。惟後仁聖懿仁二后克配仁宣聖德。寔又爲任娰之門矣。公天資倜儻奇偉。見識明達。議論確實。濟以淸愼勤勞。出入中外。聲績甚茂。少已受知於太宗。中値危亂。忠猷益著。自是密勿帷幄。恩遇特達。凡係軍國大計。必使與議。雖同列諸公所未聞。而公獨得聞。一時疑其有私。而及考原委。實皆不然也。比葬。世宗命賜諡平度。布綱治紀曰平。心能制義曰度。又遣官致祭。若曰惟卿性天明敏。器宇宏深。藝早捷於文場。名已優於仕版。才長經濟。明習乎憲章。道達時宜。緣飾以儒雅。風儀落落乎難合。言論堂堂乎可師。用之州牧則吏畏而民懷。置諸臺閣則綱振而紀肅。城關西之茂績。蔑踰樊侯之遄歸。減箠令之仁心。無愧蘇公之愼罰。司刑而冤獄自理。攬轡而甘棠累歌。非根本之植中確乎不拔。何英秀之發外煥乎有文。始以乃心於我家。終以佐命於聖考。丹書著其盟誓。白日昭其忠誠。宜其位冠於廟堂。俾之任專於銓部。曰予不穀。纘此克艱。湯文之治功雖判渙而難繼。伊呂之事業猶庶幾而仰成。正有望於與國咸休。庸詎知夫逢天不慗。惟卿捐世之日。實子致憂之辰。事俄成於鞠凶。腸已摧其遑恤。追惟往行。惕然興哀。旣節惠而易名。爰飾終以薄奠。是蓋不惟公之出處大體已具。其亦可以觀君臣相得之際矣。猗歟盛哉。始公遷窆于廣州。孫崇質時爲戶曹判書。並述幽顯兩文。皆只錄葬時月日子孫官閥而已。於公實迹。終無所發揮。今不獲已謹以公遺狀及一二見於他書者。掇爲墓碑。豎于神道東南。庶幾後來雲仍之瞻拜者。因此得其崖略。惟其年代旣久。見聞靡逮。有所漏而無所侈。是爲自效之地。遂係之銘。銘曰。

逖矣鴻嘉。白馬啓迹。寔生神人。君彼辰國。間歷千祀。苗裔始析。膴膴錦城。冠于南紀。於惟我祖。載籍載履。蓄德毓慶。久而乃起。卓卓文正。生際麗季。學爲世師。忠爲世庇。元兇所㧻。異代興喟。錫諡建祠。式是風厲。公惟承之。麟角其瑞。洎觀國光。大鳴盛際。維時聖神。克思安濟。豈無英俊。繄公之倚。心腑其親。手足其視。密勿訏謨。從容喜起。載戡內難。勳庸絶群。入司憲綱。獬豸其神。出掌方面。有脚陽春。旣繇冢宰。進秉國鈞。適値嗣聖。光宅天位。首開法筵。乃講眞義。惟民常賦。租庸請試。君明臣良。千載一値。迨公易簀。太上俄陟。易名致酹。式功式德。矧及雲仍。二妃配極。凡我同姓。孰如公大。夫何遷兆。垂二百歲。而闕顯刻。過者含涕。眇余是懼。敢竊追揭。山高水長。俾昭來世。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