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김육 신도비명(金堉神道碑銘)

야촌(1) 2013. 3. 11. 10:27

↑영의정(領議政) 잠곡(潛谷) 김육선생 묘(金堉先生 墓)

 

↑영의정(領議政) 잠곡(潛谷) 김육선생 신도비(金堉先生 神道碑)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 산29-1 일원

 

↑잠곡(潛谷) 김육선생 영정


이곳은 청풍김씨문의공파(淸風金氏文毅公派) 묘역으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 1482(성종 13-1520(중종 15),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 1580(선조 13)-1658(효종 9),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좌명(金佐明,1616(광해군 8)-1671(현종 12).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성응(金聖應, 1699(숙종 25)-1764(영조 40).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시묵(金時默, 1722(경종 2)-1772(영조 48)의 묘역이다.

 

김식(金湜)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참여하였다. 김식의 묘는 부인 전주이씨와의 합장묘로 두 무덤이 나란히(쌍분) 있으며 최근에 새로 정비하였다.

 

묘 앞에 묘표, 상석, 향로석, 혼유석 각 1기, 망주석, 문인석 각 2기가 남아 있고,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와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묘정비는 김식이 경상도 선산으로 유배되었을 때 제자들이 따라가 배움을 계속하면서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기묘사화 때 땅에 묻혔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의 신도비 머리돌에는 이무기 두마리가 구름 속에서 서로 앞발을 들어 여의주를 움켜 잡고 다투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으며 푸른빛이 도는 청석 몸돌은 파도 무늬가 나타나고 있다.

 

김육(金堉)은 실학적 성향을 지닌 조선 후기 문신으로, 대동법의 시행 등 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김육의 묘는 부인 파평윤씨와의 합장묘로 묘역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혼유석 각 1기, 문인석 및 망주석 각 2기가 있다. 향로석은 6각의 향탁을 형상화하였고 현종 5년(1664)에 세운 신도비의 머리돌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형상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김좌명(金佐明)은 문신으로 김육의 아들이다. 조선 인조 때에 벼슬길에 나가 공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의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글씨에 능했다. 김좌명의 묘는 부인 평산신씨와의 합장묘로 묘 앞에 묘표, 상석, 혼유석, 향로석 각 1기, 문인석, 망주석 각 1쌍씩이 있고 김육의 신도비 옆에 김좌명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나 향로석 등은 아버지 김육의 그것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신도비는 숙종 5년(1679)에 세운 것이다. 김성응(金聖應)은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증손이며, 무신으로 20여 년간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번갈아 가며 지내고 성을 쌓아 정비하는 등 국방강화에 노력하였다.

 

김성응의 묘는 부인 남양홍씨와의 합장묘로 묘역에는 묘표, 상석, 혼유석, 향로석 각 1기, 망주석 및 문인석 각 1쌍이 있고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가 있다. 영조 42년(1766)에 세워진 묘표의 머릿돌에는 발가락이 4개인 두 마리의 이무기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김원행이 비문을 짓고 김시묵이 써서 정조 20년(1796)에 건립한 것이다.

 

김시묵(金時默)은 문신으로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의 아버지이다. 김시묵의 묘는 두 부인과의 합장묘로 석물은 묘표, 상석, 혼유석, 향로석 각 1기,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다. 청풍김씨묘역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조성되었다. 청풍김씨문의공파 묘역은 모셔진 인물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묘역에 있는 여러 석물들의 예술적 가치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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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정 시 문정 김공신도비명(領議政諡文貞金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증시문정(贈諡文貞) 김공신도비명(金公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이경석(李景奭)이 비문을 짓고,

 

아들인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동지경연 성균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同知經筵成均館事) 좌명은 삼가 글을 쓰다.

 

효종대왕께서 왕위에 즉위하신지 9년째 되는 무술(戊戌) 9월 4일에 원임(原任) 영의정 김공께서 회현동(會賢洞) 자택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춘추 79세이셨다. 내가 역명지장(易名之狀:묘지명)을 지었는데, 공의 아들이 또한 묘비에 새길 글을 부탁하는 얼굴이 수척하고 말이 간절하여 마침내 감히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공의 행장을 살펴 서차를 정하여 명문을 쓴다.

 

공의 휘는 육(堉)이며, 자는 백후(伯厚)이고, 호는 잠곡(潛谷)이다. 김씨는 신라에서 시작하였는데, 신라 말에 왕자가 청풍(淸風)으로 피신하여 거주하였고, 그 후손들이 계속하여 살아옴으로써 청풍군인이 되어,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왔다.

 

고조부는 휘가 식이다. 학행으로써 이름을 떨쳐 천거에 의해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에까지 이르렀으며, 조광조와 더불어 도의로써 교유하다가 기묘사화 때에 화를 입었다. 뒷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덕수인데, 세상과 담을 쌓고 살다가 일생을 마쳤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가 비(棐)인데, 세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선정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돌아가실 때의 관직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이었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는 흥우(興宇)인데, 약관의 나이에 사마시의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우계와 율곡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추천으로 재랑(齋郞)의 직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일찍이 세상을 떠나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배우자는 한양조씨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데 현감 희맹(希孟)의 딸이며,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영특하여 5세 때에 책을 받고서 문득 외울 정도였고, 6· 7세 무렵에 찬성공(贊成公)을 따라 강동(江東) 동각(東閣)에 갔다가 우연히 조효익(趙孝益)을 만나 거처를 옮겨 공의 스승으로 삼았다.

 

항상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고 가지런하며 엄히 스스로를 다스려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오두막집에서 거처하면서 닭소리를 들으면 일어나 우뚝하게 공부에만 힘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산골에 피난을 가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문사(文辭)가 아름다워 우계 선생께서 크게 칭찬하실 정도였다. 갑오년(甲午年)에 의정공께서 병이 위독해지자 공에게 일러, "네가 능히 뜻을 세운다면 내가 오히려 지하에서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병황(兵荒)을 만나서는 대부인을 모시고 호남과 경기지방을 떠돌아다녔는데, 보리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봉양하였다. 계조모(繼祖母) 김씨께서 해서(海西)에 머물러 계실 때에 공이 항상 걸어서 찾아뵙고 문안을 올리며 보살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계조모의 상을 당하였다.

 

경자년(庚子年)에 또 대부인을 여의자 운구를 받들어 선산의 의정공 묘소에 옮겨 합장하였다.

몸소 흙을 지고 묘소를 꾸미고 또한 애통함이 지극하여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마침내 몸을 상하여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하였다.

 

을사년에 비로소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는 5현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추천받아 수반이 되었다. 이에 상소문은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정인홍(鄭仁弘)이 방자하게 회재(晦齋:이언적)와 퇴계 두 선생을 비난하자, 공이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논의를 관장하여 인홍을 유가의 명부에서 삭탈하였다. 광해군이 노하여 그 수반을 가두려 하니 공이 스스로 나아가 그 모임의 우두머리임을 밝혔는데, 대신들이 간하여 무마되었다.

 

공은 정세가 날로 크게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가평으로 돌아가 몸소 골짜기에 숨어서 논과 밭을 경작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스스로 잠곡(潛谷)을 호로 삼고 시문을 지어 뜻을 드러냈다. 이러하기를 10년 동안 하다가, 계해년(癸亥年)의 인조반정이 있고 나서 처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금오랑(金吾郞)을 제수받았다.

 

갑자년(甲子年)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의 어가가 남쪽으로 행차하였는데, 공이 급히 행재소에 나아가 알현하자 임금께서 이끌어보시고 서품을 올려 음성현감에 제수하였다. 이에 소를 올려 뿌리깊은 폐단을 피력한 바,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뜻을 요체로 삼은 것으로서, 임금께서 크게 칭찬하셨다.

 

또 비가 오지 않아 근심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내려 봇물과 밭도랑을 고르게 하니 경계가 바르게 되었다. 일찍이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하고, 이 해 가을에 회시(會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또한 전시(殿試)에서는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10월에 정언으로 임명되어 조정으로 불러들이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로부터 을축년(乙丑年)에서 병인년(丙寅年)까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좌랑· 지평· 정언· 사서(司書)· 문학(文學)· 병조정랑· 지제교 겸 호패청랑(知制敎兼號牌廳郞)· 직강(直講)·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춘방(春坊:예부)· 미원(薇垣:사간원)· 백부(栢府:사헌부)에도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제수받아 나아간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법률로써 엄격하게 규찰할 것을 감히 말하니, 훈척들은 이를 꺼려 다투어 대간의 입을 빌려 탄핵하였다. 그러나 관대하게 처리되었는데, 교생(校生)들이 급하게 줄이어 올린 상소가 많은 때문이었다. 정묘년(丁卯年) 봄 문학에 제수된 때에 서쪽의 경계가 매우 급하여, 공이 호패를 없애고 백성들을 국경의 진(鎭)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갔다가 이미 강도에 들어가니 병조로 옮겨 임명되었고, 여름에 환도해서는 지평을 거쳐 직강이 되었다. 이홍주(李弘胄)는 빈호태감( 胡太監:도원수)으로 있었는데, 공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서쪽의 일을 자문하였다. 공은 이 일에 심히 익숙하여 민정의 향배(向背), 성곽을 지키는 어려움과 쉬운 점을 상소하여 아뢴 것이 수백 수천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체부(體府)의 김류(金瑬)의 추천으로 남쪽지방의 군사를 조열하는 일을 맡게 되자, 영남을 3로(三路)로 나누어 절도사로 하여금 관할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인조 무진년(戊辰年)에 수찬(修撰)· 교리(校理)· 헌납을 지내고, 가을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기사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제수되었다. 이 때에 김세렴(金世濂)이 전망(銓望:인사권)을 맡고 있었는데 조정의 여러 의견과 어긋나는 점이 많아, 공이 이를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내리침을 받아 출척당하고, 양근으로 돌아가 학문을 익히니, 관에서는 노고를 치하하여 고비(皐比:범의 가죽)를 내렸다. 이에 밭과 집을 사고 조용하고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임신년(壬申年)에 수찬· 교리를 제수받고, 다시 이조로 돌아가 응교에 승임되었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돌아가시자 산릉도청(山陵都廳)이 되었고, 검상(檢詳)· 사인(舍人)· 보덕(輔德)· 응교를 거쳐 사간에 제수되었다. 다시 산릉의 노고로 인하여 품계를 올려 군직에 나아갔다가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계유년(癸酉年)에는 병조참지로서 동부승지에 옮겼다가 우부승지가 되었고, 외직으로 나아가 안변부사가 되었다. 학문에 힘쓰고 군사를 독려하며 조세를 가볍게 하고 나이 많은 이들을 공양함으로 다스림의 최우선 과제로 삼으니,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겉옷과 속옷을 내리셨다.

 

병자년(丙子年)에는 임기가 다하여 하지사(賀至使)로 파견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닷길 여정을 꺼려했지만, 공께서는 태연하게 길을 떠났다. 8월에 남환구(南 口)에 정박하였는데, 이 때에 청나라 병력의 황도(皇都) 침입이 임박해 있었다. 명나라 도독 진홍범(陳洪範)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관외에 있었는데, 공이 서찰을 보내 대의로써 북돋우니 홍범이 부끄러워 하며 그 군대를 11월에 서울로 이동시켰다.

 

바다의 방비는 허술하였는데, 공이 홀로 나아가 예부상서(禮部尙書) 강봉원(姜逢元)을 만나뵙고 위로하며 절목을 물어 함께 궁궐에 나아갈 것을 허락하니, 특별한 배려였다. 정축년(丁丑年) 2월에 사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려고 하니, 관례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자 하였다. 공께서는 국모(國母)의 상을 당했다는 이유로써 이를 사양하였고, 또한 절은(折銀:하사품)도 사양하였다.

 

본국이 병화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전후 10여 차례에 걸쳐 각부(閣部)에 글을 올려 우리나라의 사정을 아뢰니, 황제가 우리 조선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힘써 명나라에 따르는 것을 가상히 여겨 상을 더하여 내리고, 병부에 칙명을 내려 3000명의 군사로 바닷길을 호위하여 환송케 하였다.

 

돌아와서 병조참의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다시 예조를 거쳐 은대(銀臺: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임금의 교지를 보니 공평하지 못함이 있어 그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되돌려보내지자 사직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무인년(戊寅年)에 판결사(判決事)를 제수받고, 예조에 옮겨 괴원(槐院:승문원)의 부제조를 겸직하였으나 면직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풍(匪風)의 말을 인용하여 사직을 청하니 그 말이 심히 비통하고 간절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호서의 관찰사를 제수받으니 전란 이후라 농사가 흉년이고 백성들이 더욱 곤궁하였으므로, 균역 시행에 뜻을 간절히 하여 도내의 전안(田案)을 모두 살펴서 거둘 쌀과 포를 헤아려 무릇 모든 수요와 올릴 공물 및 저축에 당하게 하니, 백성들의 생활이 전에 비하여 넉넉해지고 부역이 태반이나 감소하였다.

 

이름하여 대동이라 하는데, 상소를 올려 이의 시행을 청하니 조정에서도 적절한 것으로 논의되었다.

기묘년(己卯年)에 임기를 마치자 서추(西樞)에 제수되었다가 승지로 고쳐 임명되었다.

 

경진년(庚辰年)에는 형조 겸 대사성(刑曹兼大司成)이 되었다가 병조를 거쳐 다시 승지로 돌이켜 임명되니 승지로 임명된 것이 무릇 다섯 차례였다. 후에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은대· 옥당(玉堂:홍문관)· 간원(諫院:사간원)· 기성(騎省:병조)· 지부(地部:호조)를 옮겨다녔다.

 

계미년(癸未年) 봄 옥당에 있을 때에 재이(災異)가 거듭되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덕을 닦는 요체를 밝혔는데, 그 말이 매우 적절하였다. 여름에는 또한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우윤으로 제수되고 품계를 올려 가선으로 승차하였다.

 

부제학·도승지를 옮겨다니다가, 가을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선발되었고, 제거(提擧)·서운(書雲)을 역임하였다. 겨울 10월에 병조참판 겸 우부빈객(兵曹參判兼右副賓客)에 제수되었고, 12월에는 원손을 모시고 심양에 갔는데, 갑신년(甲申年) 봄에 연경이 함락되자 가을에 원손을 모시고 동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민폐를 끼치지 않으니, 임금께서 공을 '장자(長者)'라 일컬으며, 소종백(小宗伯:예조참판)으로서 좨주(祭酒)로 삼으시고, 특별히 품계를 더하여 가의에 승차하였다.

 

공께서 사양하시니 이조참판 겸 부총관(吏曹參判兼副摠管)에 제수하시고 비국(備局:비변사)과 선혜청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겨울에는 판형조 겸 우빈객(判刑曹兼右賓客)에 발탁되었고, 을유년(乙酉年)에는 청나라 사신이 소현세자를 호위해 나가자, 공으로 하여금 인도하여 서쪽으로 가는 길을 배웅케 하였는데, 공께서는 먼저 번역하시되 저들 청나라의 서간을 꺼려 하셨다.

 

소현세자께서 돌아가시자 봉묘(封墓)의 일을 감독하고 애책(哀冊)을 찬술하니, 임금께서 구마( 馬)를 내렸다. 여러 차례에 걸쳐 우참찬(右參贊)·대사헌·예조판서 겸 내국제조(禮曹判書兼內局提調)를 옮겨다녔고, 예조를 거쳐 다시 우빈객을 제수받았다.

 

병술년(丙戌年) 봄에 임금께서 강씨의 죄를 논함에 있어서 빈청에 엄한 교지를 내려 다스릴 것을 명하였으나 공이 대신들을 따라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음으로 인하여, 임금께서 더욱 노하여 공의 관직을 옮겼으나, 다시 내국제조에 제수되어 연경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다음해에 송도의 유수로 임명되니, 다스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이해하며 많은 선비들을 가르치며 훈육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고, 새로이 학궁(學宮)의 양무(兩 )를 수리하였으며, 성현의 제사는 반드시 몸소 받들어 행하였고, 포은(圃隱)의 순절지에 성인비(成仁碑)를 세웠으며, 노론정문(魯論正文)과 효충전경(孝忠全經)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노인을 공경하고 선을 드러내게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모두 기뻐하였으며 공께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수레를 붙들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기축년(己丑年)에는 70세가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여름 5월에 인조께서 돌아가시니, 권판례(權判禮)가 되었다가 곧이어 판례의 정식 직분을 제수받아, 성왕의 장례를 모셨는데 예법에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8월에 도헌(都憲)을 제수받았고, 9월에 우의정을 제수받으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나아가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임금께서 돈독하게 뜻을 펴 허락하지 않으셨다.

 

겨울이 되자 선영을 찾아뵙고 이에 머물러, 경인년(庚寅年) 봄에 치사를 청하는 상소를 연이어 여덟 차례에 걸쳐 올렸다. 이에 임금께서 다시 승지를 보내어 "내가 경을 난세에 의지하는 지주(砥柱)와 같이 보거늘, 경이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이 마치 급류와 같습니다."라고 이르니, 공이 사양하여, "일개 늙고 병든 신하를 버려 성조의 물러나고 사양하는 풍조를 이루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까. 물러남을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물러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영중추(領中樞)에 제수하시니, 명을 받들어 다시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곧바로 시골로 내려가, 관직에서 물러나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청하고 또한 소장을 올려 재난을 물리치는 방도를 밝혔다.

 

그 대략을 살피보면, "재난을 만났을 때에 두려워하면 재난을 물리칠 수 있으며, 말을 구하여 쓰면 말이 또한 이를 것이며, 두려워하면서도 성실하지 아니하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고, 구하되 쓰지 않으면 이는 사람을 속이는 일입니다.

 

끝에 이르되 한나라는 지진이 있을 때에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 패업을 달성하였으니, 지금 하늘의 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여러 신하들에게 죄를 돌려 대신과 유신들이 허물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신묘년(辛卯年) 봄에 청나라 사신 4명이 나왔는데, 이 때의 영상 이경여(李敬輿)가 이들과 다툼으로 인하여 벼슬자리를 물러나자, 공으로서 이를 대신하고 훈련군자도제조(訓鍊軍資都提調)를 겸하게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임금이 소명을 계속 내리자 드디어 관직에 나아가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가을에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청나라 사신이 다시 나오자 억지로 나아가 응대하게 하였다. 겨울에는 원임 이경여를 수상으로 삼고 공을 좌의정에 제수하였다.

 

계사년(癸巳年) 여름에는 내국도제조를 겸하였는데, 임금께서 공이 오랫동안 물러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벼슬을 가진 채로 쉬다가 돌아오게 하니,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에는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고, 갑오년(甲午年)에는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물러났고, 을미년(乙未年)에는 다시 배수되었으나 사직하여 물러나, 세 번이나 상상(上相)이 되었지만, 결국 면직하였다.

 

후에 영돈녕사(領敦寧事)를 배수받아 물러나기를 더욱 간절히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실록청 총재가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을 총괄하고 선조(宣祖)의 역사를 추가하여 수정하는 일을 맡았다.

 

이에 신도사우감(新 社雨監)을 맡아 부묘와 책례를 행하였는데 일을 마치자 시약원(侍藥院)에 이르기까지 모두 안장과 말을 하사받는 은총을 입었다. 공은 일찍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동법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믿어, 큰 벼슬을 제수받고서는 이를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였으며, 이를 깊이 갈고 연구하여 책으로 펴내 모든 것을 갖추어 놓았다.

 

이에 임금께서 먼저 호서지방에 시행할 것을 명하시니, 호서의 백성들이 환호하며 손뼉을 치며 기뻐하여 서로 궁비(穹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바야흐로 공의 의논이 행해지려 할 때에 헐뜯고 비방하는 말이 일어났으나, 공은 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마침내 이루고 말았던 것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법이란 견고할수록 좋으며, 진실로 공과 같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를 호남지방에서도 시행할 것을 청하여 조정에 들어가 고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와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이에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힘써 학문에 힘써 성현을 본받을 것과 백성을 보존할 것을 아뢰고, 다시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여야 하는 뜻을 전하니, 말이 매우 간절하고 더욱이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정성이 더욱 돈독하였다.

 

임금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셨다. 상여를 내리시고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였고, 왕세자께서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관에서 상례를 주관하였으며, 여러 서원의 유생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통곡하였고, 호서·호남지방의 백성들은 더욱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다. 11월에 양주 선산 금촌리 동남향(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니,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리셨다.

 

공은 본래 성품이 강직하고 지조와 행실이 단아하고 확고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에도 단정히 앉아 하루종일 나태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는 술을 극히 좋아하였는데, 한 번은 선친의 경계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크게 뉘우쳐 임금께서 내리시는 술이 아니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사당에 나아가 예를 올렸으며,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어린 동생들과 우애함에 있어서는 경애함이 지극하였고, 아울러 성색(聲色)을 멀리하였으며, 식사에 있어서는 맛있는 것을 겸하지 않았다.

 

친척간에는 화목하여 멀고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계를 맺어 자주 모였으며, 외가의 원조(遠祖)인 조양절공(趙良節公)을 위하여 사우(社宇)를 지었고, 조호익(曺好益)의 외로움을 위로하기를 오랫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금에게 통제사 이순신의 신도비를 그 묘에 세울 것을 아뢰고 스스로 비명을 쓰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에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태어난 선비로서 진실로 모든 사물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두었으며,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구제할 바가 있음을 깊이 느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생각하고, 배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행(知行)에 힘썼다.

 

벼슬에 나아간 이래로는 마음에 품은 바를 항상 건의하였는데, 어떤 때는 항소장을 올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그 품은 뜻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비록 준엄한 임금의 명이 있다 하더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안흥(安興)에 성을 쌓는 일이나 속오군에게 보(保)를 지급하는 일, 어영군(御營軍)의 번상(番上), 영장(營將)을 별도로 설치하는 일은, 백성들을 수고스럽게 한다고 여겨 아울러 정지하고 파할 것을 청한 것이다.

 

또한 흠경각(欽敬閣)의 옛터에 만수전(萬壽殿)을 지으려고 하니 그 불가함을 극렬하게 간청하기도 하였다. 공의 의견이 모두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임금께서 그 충정을 가상히 여기셨다.

 

중국 조정에 올리는 글이 잘못 되었다고 하여, 이시해(李時楷)가 비방하여 박장원(朴長遠)이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공께서 모자간에 서로 떨어져 있는 아픔을 아뢰어 비록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박장원을 북쪽 변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줄 것을 청하였고, 김홍욱(金弘郁)이 강씨의 옥사를 논함에 있어 잘못에 빠지자 그 죄를 용서해줄 것을 사뢰었으며, 능천(陵川) 구인후(具仁后)가 계속하여 품달하여 임금을 몰아세움으로써 파직되자 공께서는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관직에 있을 수 없다 하여 힘써 사직을 청하여 해직되었다.

 

전화(錢貨)의 유통과 수레의 사용 등은 모두 공께서 건의하여 청한 바이나, 시행되지 않자 일찍이 탄식하였으며, 사법(射法)이 옛 제도로 바뀌니 또한 근심하여 힘써 아뢰었다. 임금께서 그 충성스러운 마음을 회상하여 생각하시면서 경연에 임하여서는, "굳고 강하여 꺽이지 않음이 김영돈녕만한 이가 있겠는가."라며 탄식하셨다.

 

만년에는 집의 남쪽 아래에 당(堂)을 지어 '공극(拱極)'이라 이름하고, 정자를 지어 '구루( )'라고 하여, 마음을 붙이고 거처하였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큰 별이 떨어지자, 점 치는 사람이 공께서 돌아가실 것임을 미리 알았다. 병중에도 객을 만나고자 할 때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였다. 죽음에 닥쳐서도 정신이 변하지 않았으니, 평소에도 반드시 이와 같았다.

 

호서에 있을 때에는 {구황촬요(救荒撮要)}·{벽온방(酸瘟方)}을 간행하여 각 도에 나누어 배포할 것을 청하였고, 기묘년에 {팔현전(八賢傳)} 및 {당적내외세보(黨籍內外世譜)}·{기서박섭(嗜書博涉)} 등을 판각하였다.

 

비록 은대에 있으면서도 아침이나 밤중에 여가가 생기면 반드시 책을 가까이 하여 지지(地志)·병략(兵略)·복서(卜筮)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고, 일찍이 서양 역법(曆法)의 기원과 역대 역법을 고친 원류를 논함에 있어서는 마치 손바닥을 보듯 하였다.

 

늙어서도 정과(程課)를 그만두지 않고 책을 쓰는 것을 좋아하여, 연경에 가서도 [감개록(感慨錄)]·[집두시(集杜詩)] 등을 남겼고, 또한 {황명기략(皇明紀略)}·{유원총보(類苑叢寶)}·{종덕신편(種德新編)}·{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송도지(松都志)} 등의 책을 저술하여 간행하였으며, {고사증산(攷事增刪)}·{잠곡필담(潛谷筆譚)}과 시문 등 약간의 책을 집에 소장하고 있다.

 

배우자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는 고려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후손으로서, 성균진사로서 이조참의에 증직된 급(汲)의 딸이다. 부인은 천성이 곱고 맑으며, 어릴 때부터 (내훈(內訓)과 소학(小學)의 대의에 통하였고, 20세에 공에게 시집을 왔다.

 

윤씨에게는 시어머니와 두 누이가 있었는데, 시어머니를 섬김에는 법을 받드는 듯하였고, 두 누이를 사랑함에는 동기간처럼 하였다. 항상 손에는 바느질을 놓지 않았으며, 미리 누이의 혼수를 마련하고, 제사에 올릴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씩 궤에 넣어 대비하였다. 공에게는 조금도 심려를 끼치지 아니하였으며, 몸에는 비단을 걸치지 아니하였으나 그 귀한 빛을 조금도 잃지 아니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시자 비통해하며 곡기를 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궁중의 측근 사람이 내명(內命)으로써 잠시 찾아뵙고자 하여서야 애통해하는 소리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흐느꼈다. 기해년(己亥年) 2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5세로 4월 1일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2남 4녀를 두었으니, 첫째아들 좌명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병부판서이며, 둘째아들 우명은 임금의 장인으로서 청풍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고 영돈녕부사로 있다. 딸들은 사인(士人) 김숭문(金崇文), 첨정 황도명(黃道明), 함경감사 서원리(徐元履), 감역 윤자(尹 )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판서의 아들 석주(錫胄)는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으로 있으며, 딸은 생원 조현기(趙顯期)에게 시집을 갔다. 부원군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아들 만주(萬胄)는 어려서 죽었고, 다른 아들 석익(錫翼)· 석연(錫衍)· 석달(錫達)은 모두 어리며. 첫째딸은 왕비전하이고, 둘째딸은 어리다.

 

김숭문은 아들은 없고 딸만 3명을 두었는데, 첫째딸은 사인 유징(柳生)에게, 둘째딸은 감찰 이상연(李尙淵)에게, 셋째딸은 집의 오두인(吳斗寅)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아들이 없어서 유씨 소생의 만기(萬紀)를 아들로 삼았다.

 

그 다음으로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만영(萬榮)· 만성(萬成)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니 감찰의 소생이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을 정주(鼎周)라고 하니 집의의 소생이다. 또 남녀 각 2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아들은 일(鎰)과 집(鏶)이며, 첫째딸은 복창군(福昌君) 정(楨)에게, 둘째딸은 사인 이태(李邰)에게 시집을 갔는데 첨정의 자녀들이다.

 

또 문중(文重)이 있으니 감사의 계자(繼子)이다. 4남 4녀가 있는데 아들은 상린(商隣)· 상빈(商賓)· 상신(商紳)이고 첫째딸은 사인 정계주(鄭繼周)에게 시집을 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니 감역의 소생이다.

 

슬프도다, 이 세상에 태어나 선비가 되어 진실로 뜻을 세우는 자로서 누가 임금을 만나 세상을 구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그 때를 얻기란 어려우며, 때를 얻었다고 하여 능히 그 일에 힘쓰기도 어렵다. 공은 일찍이 책을 읽는 훌륭한 선비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어진 재상이었다.

 

두 임금을 만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정성으로 모셨으니, 비록 옛 사람들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부끄러울 바가 없음이라. 오호라, 이제는 다시 뵈올 수 없구나. 명(銘)하여 가로되,

 

궁구하고 또 궁구하여 그 끝까지 다다를 듯하고,

이치에 이르고 또 이르니 우리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도다.

 

모름지기 일을 만나 말할 때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오로지 임금께서 부족하심이 있을 때면 공께서는 이를 도우셨네.

 

나라의 근본이 굳건하기를 희망하셨으니,

뭇비방이 현혹시키기 어려움이라.

 

쓰일 데를 헤아려 단비를 내리니, 두루 나라 전체를 적시는구나.

오직 호서 한 지방을 다스렸으나, 밝은 태양으로 묽은 구름을 씻은 듯하네.

 

사람마다 입을 모아 비를 세우고, 비가 있으니 모두 우러르네.

그 은혜 장차 남쪽에 이르게 하여, 백성들을 균등히 기르려 하였네.

 

공께서 길을 멀리 떠나시니, 백성들이 그 행복함을 잃었도다.

 

후에 그 뜻이 이루어져 백성들을 아우르고 어루만져 주니,

공의 남기신 뜻을 미루어 나아가 그리됨이라.

 

성스럽고 밝으신 임금께서 등극하시었으나,

어진 이가 없으니 하늘의 이치가 얼마나 아득한가.

 

배우자 또한 곧고 맑으시니, 만복의 근원이라.

옥나무와 같이 재주 많은 자손들이 아울러 꽃피우고,

난꽃 자손들 또한 번창하였도다.

 

아름다운 기운이 문중에 가득 차니,

왕비 또한 그 자손이라.

 

공께서 돌아가시자 오히려 부인 또한 따르시는도다.

오호라, 공의 무덤이여. 내가 비문에 명(銘)하노라.

 

숭정기원 무진(戊辰)후 37년(1664) 갑진(甲辰) 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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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諡文貞金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諡文貞金公神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李景奭 撰


男資憲大夫兵曹判書兼同知經筵成均館事 佐明 謹書


孝宗大王卽位之九年戊戌九月四日原任領議政金公易甥于會賢洞正寢春秋七十有九余爲撰易名之狀公之孤又屬以隧碑之刻容戚而辭懇終不敢以不才辭謹按其狀序而銘之公諱堉字伯厚號潛谷金出新羅季王子避住于淸風其後仍爲郡人自麗比我朝世有衣冠高祖諱湜以學行名魁薦科累官至成均館大司成與趙靜庵爲道義交禍于己卯贈吏曹 判曾祖諱德秀屛處而終贈吏曹判書祖諱 宰三邑著政聲卒官軍資監判官贈議政府左贊成考諱興宇弱冠中司馬兩試業于牛栗兩先生之門薦授齋郞不就蚤世贈議政府領議政配漢陽趙氏贈貞敬夫人縣監希孟之女生公于萬曆庚辰幼甚聰穎五歲受書輒能誦甫過 從贊成公于江東東閣適値曺公好益遷居公師之恒刻苦整飭不好戱侍議政公于廬居聞鷄而興兀然孜孜雖當壬辰之亂避地山谷手不去書文辭蔚然有致牛溪先生大贊之甲午議政公疾革謂公曰汝能樹立地下吾猶喜也公早孤且丁兵荒奉大夫人播流湖甸負麥以爲養繼祖母金氏留海西公常步往省外除未幾哭繼祖母庚子又哭大夫人奉遷議政公之墓于先山而合葬焉躬負土襄事徒行哀展鄕里莫不感歎卒喪毁久未復乙巳始中司馬冠科試名益彰館學請從祀五賢輒推公爲首文出公手多鄭仁弘肆 晦退兩先生公爲掌議與多士削仁弘儒籍光海怒錮其首公將自當會有大臣言事寢公見時事日非大歸加平躬耕潛谷因以自號作詩文以見志十年而爲癸亥改玉初擧遺逸拜金吾郞甲子春适賊叛大駕南幸 覲行在引見超 監陰城縣 陳宿弊其 以民安則國安爲要優奬之營人之悶雨禱而雨均溝 以正經界嘗魁增廣初試是年秋中會 高等又魁殿試十月徵以正言民樹頌德碑自是冬至乙丑丙寅以典籍遷歷兵曹左郞持平正言司書文學兵曹正郞知製敎兼號牌廳郞直講獻納而春坊薇垣栢府則暫 旋拜者數 敢言勳戚憚之爭臺官之被譴寬校生之急汰譚者多之丁卯春拜文學時西警甚急公請罷號牌以鎭民從世子南旣而陪入江都移兵曹夏還都爲持平直講李公弘胄 胡太監酸公從事傷西事甚熟 奏民情之向背城守之險易數百千言又爲體府金相 所酸視師南 請分嶺南三路以便節度爲圖上之戊辰爲修撰校理獻納自後來去兩職者數四秋拜吏曹左郞陞正郞己巳辭 旋授是時金世濂有銓望而郎議矛盾公欲調停反遭下理坐黜歸楊根以講官勞賜皐比買田 數椽蕭然自適壬申 拜修撰校理還吏曹陞應敎仁穆王后薨爲山陵都廳歷檢詳舍人輔德應敎改司諫用山陵勞進階拜軍職仍知製敎癸酉以兵曹 知移同副承旨轉右副 出安邊府使勸學勵兵蕩逋租養高年以治最聞賜表裏丙子官滿差賀至使衆憚海後而夷然就道八月泊南 口時淸兵已迫皇都都督陳洪範擁兵關外公移書激以大義洪範 其軍十一月趨京海宇震蕩公獨 聘禮部尙書姜逢元勞問節目俱許恭禮異數也禮部禁買書籍公力辨之丁丑二月竣事還例有宴禮公以喪國母辭焉又辭其折銀聞本國被兵東向痛哭華人感涕前後呈文閣部者十數爲白我國之情帝嘉本朝之誠悶其力 優加賞賚勅兵部以兵三千護出于海道拜兵曹 議復命辭 由禮曹入銀臺見上敎有不平封還已而辭 戊寅拜判決事移禮曹兼槐院副提調乞免而引匪風之語辭甚悲 無何觀察湖西亂後歲惡民益困志切均役通計道內田案量收米布以爲凡百需用上供及留儲視前有裕而賦役太半省焉名曰大同 請行之爲朝議所格己卯秩滿拜西樞改承旨庚辰 爲刑曹兼大司成由兵曹還承旨者凡五後復敎遷銀臺玉堂諫垣騎省地部癸未春在玉堂箚陳災異之重修德之要言甚 切夏又爲右承旨無何特授右尹陞嘉善遷副提學都承旨秋選爲元孫輔養官提擧書雲冬十月拜兵曹 判兼右副賓客十二月陪元孫入瀋甲申春燕京陷秋奉元孫而東沿路省弊上稱以長者以小宗伯爲祭酒尋特加嘉義辭免拜吏曹 判兼副摠管備局宣惠之任冬擢判刑曹兼右賓客乙酉淸使護昭顯世子出使公 西來首譯憚其簡昭顯卒監封墓撰哀冊賜廐馬累遷右 贊大司憲禮曹判書兼內局提調 禮曹復拜右賓客丙戌春上因論姜氏罪下嚴旨于賓廳公隨大臣胥命闕門外上益怒 公職及內局提調奉使之燕明年留守松都政先誘掖敎訓多士重新學宮之兩 釋菜必躬卽圃隱殉節地立成仁碑刊布魯論正文孝忠全經優老彰善群情咸悅及 有攀轅之慕己丑入耆老杜夏五月仁祖禮陟公權判禮曹俄眞拜造次措折無欠缺八月拜都憲九月進拜右議政辭未獲出又屢辭敦諭不許冬焚黃于先塋仍留庚寅春乞致仕連上八 再遣承旨諭以予之視卿如砥柱卿之求退如急流公辭曰捨一箇老病之臣成聖朝退讓之風豈非美事乃許 不許退拜領中樞奉命再赴燕旣還卽出平丘乞骸益懇又上章陳 災之道末言漢以地震而釋勝覇今當天變而罪諸臣時相臣儒臣有被譴者故云辛卯春淸四使出是時領相李敬輿因 言去位公代之兼訓鍊軍資都提調固辭召命繼降遂入城接淸使秋乞 不許淸使又至强出以應冬有原任爲首相公以次拜左揆癸巳夏兼內局都提調上久不豫退輒宿朝堂復常始歸家冬兼世子傳甲午進首台旋解乙未復拜辭 三爲上相終免而後巳以領敦寧府事乞退益力而未遂焉其摠裁 仁祖實錄追修 宣廟朝史從親禱杜雨監 廟冊禮 侍藥院皆蒙鞍馬之賜公嘗以安民須先大同及大拜申陳必行之意 摩硏究書進備悉命行之湖西湖民歡 相與建穹碑以頌之方其議也 謗橫起山立不動終底于成君子謂法固良矣誠似公難矣且行於湖南入告眷眷退而寢疾乃上遺箚勉以典學保民而復致意於湖南大同語甚切益臨歿而誠益篤也訃聞震悼輟朝三日贈 有加承旨賜吊禮郞致祭王世子遣宮官尤襄事諸書院儒生相繼來哭湖民尤悲哀十一月葬于楊州先山金村里巽向之原賜謚文貞公資性剛勁操履端確燕居危坐終日不懈少喜劇飮一聞先公之戒 然悔改非有宣賜不復飮晨必禮廟奉寡姑友弱弟敬愛備至屛遠聲色食無兼味修睦親 嘗中表爲外遠祖趙良節公 祠于撫曺公好益孤久而不衰白 上爲李忠武公舜臣竪神道碑而自銘之幼時讀書至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於人必有所濟深有所感發窮居亦思濟世爲學必務知行立朝以來有懷輒達或抗章或造?傾倒底蘊雖被峻旨無所撓 如安興之築城束伍之給保御營軍之 上營將之別設慮其擾民 請停罷欽敬閣故基將造萬壽殿極陳其不可言雖不能盡行上嘉其忠 恐朝著之不靖則李時楷以諫長被斥陳母子之傷別則朴長遠自北塞而移配金弘郁因論姜獄陷大何白其可原具綾川仁 繼達而抵罪公乞同罪不得則力辭解職行錢用車皆所建請而未得施常以爲慨憂射法之變舊力建於登對志湖南之均後役始伸於歿後上追念其赤心臨筵嘆曰安得堅確不撓如金領敦寧者乎晩家終南下堂曰拱極亭曰 以寓意前卒之一月大星隕日者預爲公憂病欲見客必冠臨卒精神不變其素定如此在湖西刊救荒撮要酸瘟方請分布諸道 己卯八賢傳及黨籍內外世譜嗜書博涉雖在銀臺夙夜之暇輒親 素旁通地志兵 卜筮之方嘗論西洋曆法上溯歷代改曆源流如指掌年逾耆艾程課不輟好著書八燕有感慨錄集杜詩又著皇明紀 類苑叢寶種德新編海東名臣錄己卯錄松都志等書行于世攷事增刪潛谷筆譚詩文若干卷藏于家貞敬夫人坡平尹氏高麗三韓功臣莘達之後成均進士贈吏曹 議諱汲之女天性婉淑少通內訓小學大義二十歸公公有姑與兩妹事之如尊章愛之如同氣手執女紅資昏嫁供祀事撥 爲備不令公憂身不衣錦貴而無變及抱未亡之痛溢米絶不御禁中傍側人以內命來欲其少回見哀號不忍發口己亥二月二十日卒壽七十五四月一日 公墓生二男四女男長佐明重擢文科今判兵部季佑明國舅封淸風府院君領敦寧府事女適金崇文士人黃道明僉正徐元履咸鏡監司尹 士人判書一男錫胄魁文科典籍一女適趙顯期生員府院君四男二女男長萬胄夭次錫翼錫衍錫達皆幼元女卽王妃殿下次幼金崇文無男三女爲後者萬紀女長適士人柳生次監察李尙淵季執義吳斗寅四男三女男萬榮萬成餘幼者監察出也一男曰鼎周者執義出也男女各二曰鎰曰鏶長適福昌君楨季士人李邰者僉正出也曰文重者監司繼子也三男四女曰 隣曰 賓曰商紳長適士人鄭繼周餘幼者尹生出也噫生而爲士苟有志者孰不欲得君而濟世顧得其時難矣得其時能達務難矣公早爲讀書之善士晩爲澤民之賢相遭逢兩朝終始一誠若公雖方諸古人無所愧焉嗚呼今不可復見矣銘曰
窮而固窮若將終焉達爲達尊澤我顚連惟事可言公則吐之惟衰有闕公則補之邦本期固衆 難惑擬 甘霖遍霑邦國惟湖一路如熟先濯有口皆碑有碑皆仰將及于南赤子均養公徑長逝民失其祐後乃志成 歸摩撫推公之績由聖明主聖陟賢亡天何茫茫配有貞淑萬福之原玉樹齊芳蘭孫 蕃佳氣盈門王妃是孫公歿而寧夫人從之嗚呼公墓我銘于碑

 

崇禎紀元戊辰之後三十七年 甲辰 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