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허균(許筠)

야촌(1) 2012. 10. 15. 01:30

■ 허균(許筠)

     [문과] 선조(宣祖) 27년(1594) 갑오(甲午) 정시(庭試) 을과(乙科) 2위(3/13)

     [문과]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丁酉) 중시(重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1/5)

     [생원시]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20위(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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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허엽[許曄: 1517년(중종 12)∼1580년(선조 13)]이며, 어머니는 허엽의 재취(再娶)로 예조판서김광철(金光轍)의 딸인 강릉김씨(江陵金氏)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 1548년(명종 3)∼1612년(광해군 4)]이 이복형이며, 허봉[許篈: 1551년(명종 6)∼1588년(선조 21)]과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이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 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이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달이 못 되어 불상을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명나라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으며 허균과 기준 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 쓴 시 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 실려 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함께 그의 시 비평 안목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 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删)》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古詩選)》‧《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한 년 참기(旱年讖記)〉등이 있다.

 

 

허균연보(許筠年報)

 

연도 나이 일 어 난 일
1569년(선조 2년)
11월 3일.
1세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당시 승지였던 허엽(許曄)의 3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남.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로서 허엽의 재취다.
1571년(선조 4년) 3세 11월 6일, 아버지 허엽이 병으로 대사간 자리를 사직하다.
1572년(선조 5년) 4세 9월 10일, 아버지 허엽이 대사성으로 제수되다. 10월 14일, 형 허봉이 문과에 급제해서 예문관 한림으로 사관 생활을 시작하다.
1573년(선조 6년) 5세 이매창[李(梅窓=1573년(선조 6)∼1610년(광해군 2), 기생출신의 여류시인]이 부안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부안현의 현리 이탕종이고 어머니는 관기(官妓)였다. 4월 29일, 허봉이 임금이 주최한 경회루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다.
1574년(선조 7년) 6세 5월 11일, 형 허봉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다. 11월 17일, 허봉이 이조좌랑으로 임명되다.
1575년(선조 8년) 7세 광해군이 태어나다.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이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다투다 동서로 사람들이 편이 갈렸다. 아버지 허엽이 동인의 영수가 되고 박순(朴淳)은 서인의 영수가 됐다.
1577년(선조 10년) 9세 9세때. 집이 건천동(乾川洞: 마른내골, 현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명례방(明禮坊: :서울 명동)으로 이사 가다. 이 무렵 허균이 시를 지어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누나 허난설헌이 안동김씨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했다. 5월 11일 허봉이 선조의 생부(生父)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1530 ∼1559) 의 묘는 시조묘(始祖墓)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임금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1578년(선조 11년) 10세 화가 나옹((懶翁) 이정(李楨) : 이 태어났다. 2월 28일, 허봉은 함경도 순무어사로 파견돼 아버지 친구 권벽을 탄핵 하다.
1579년(선조 12년) 11세 허균의 나이 11세인. 5월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허균이 아버지를 따라 상주에서 잠시 살았다.
1580년(선조 13년) 12세 2월 1일, 아버지 허엽이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허균의 나이 열두 살이고, 『논어』와 『통감』 같은 책들을 읽었다.
1581년(선조 14) 13세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11월 율곡 이이가 경연일기를 완성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14세 《당음(唐音》을 읽었다. 둘째형 허봉과 친구사이인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처음 만나 시를 배웠다. 허난설헌이 오빠 허봉이 구해준 《두율(杜律)》을 일으며 두보를 배우다. 허봉이 겨울에 원접사 율곡 이이의 종사관으로 의주에서 황태자의 탄생 조서를 가져온 황홍헌, 왕경민 등을 맞이하였다. 이들로 부터 글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이해 아버지 허엽의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1583년(선조 16년) 15세 4월 2일, 경기순무어사 허봉이 경기도 수원의 군기가 아주 허술하다고 부사 한옹(韓顒)의 파직을 요구하였다. 7월 16일, 형 허봉(許篈)이 창원부사로 제수되다. 이때 동서 당쟁이 심각하던 시기로, 허봉이 경기도 순무어사로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하자 임금이 화를 내고 창원부사로 좌천시켰다.
곧이어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를 보냄. 큰 형 허성이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고 생원시 합격 뒤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 해 석봉 한호가 사헌부 대간들에게 옷차림이 불결하고 비루한 몸가짐이라며 와서별제(瓦署別提)라는 직책에서 탄핵을 받았다.
1584년(선조 17) 16세 1월에 율곡 이이가 사망했다.
1585년(선조 18년) 17세 허균이 봄에 한성부에서 치른 과거시험 초시에 급제하였다. 이때 친구 임현(林賢: 鎭川출신)도 함께 급제함. 5월에 안동 김씨(15세)와 결혼. 장인은 도사(都事)를 지낸 김대섭(金大涉)이다.
6월 26일, 영의정 노수신의 청으로 허봉이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도성 출입은 제한되자 경기도 일대와 강원도 일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누이 허난설헌이 ‘못난 사내에게 시집와’라는 시 한 구절로 가정불화를 겪으며 외삼촌댁에 머물러 있었다.
1586년(선조 19년) 18세 허균 나이 18세때. 처남 김확(金穫)과 함께 백운산(白雲山)으로 가서 둘째 형 허봉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웠다. 주로 한퇴지(韓退之: 중국 당나라의 문장가)와 소동파(蘇東坡)의 글을 익혔다.
1588년(선조 21년) 20세 허균 나이 스무 살 무렵, 아내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서울 기방 출입이 잦았다. 9월 16일, 둘째형 허봉(許篈)이 금강산에서 금화까지 오다 죽었다. 이매창은 부안현감 서우관(徐雨觀)에게 몸을 바친다. 나옹 이정은 이 무렵 금강산 장안사 벽화를 완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89년(선조 22년) 21세 허균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같은 날 이이첨(李爾瞻) 도 합격했다. 3월 19일, 누이 허난설헌이 죽었다. 당시 누이 나이는 고작 27세. 10월 2일 동인(東人)들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1천 명이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을 간 대규모 정치사화가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기축옥사다.
1590년(선조 23년) 22세 큰형 허성(許筬)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다.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을 수행했다. 허난설헌의 시를 정리해서 유고집을 만들었다. 그 해 11월 서애 유성룡에게서 책의 서문을 받았다.
이매창이 그 무렵 부안의 변산 월명암 한쪽 산자락에 객점(客店)을 차렸다. 정취 있는 술집이라 소문이 자자했고 호남의 문인들이 자주 찾는 술집이 됐다. 이매창의 시와 거문고 노래가 일품이란 것이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592년(선조 25년) 24세 4월 1일, 이매창과 유희경(劉希慶)이 부안에서 만났다.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허균은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딸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다. 7월 명나라 군대가 전쟁에 참전하다. 7월 7일 함경도 단천에서 아들을 낳고 3일 뒤 아내는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 죽었다. 한호는 8월 26일, 사헌부 감찰에 제수됐다.
1593년(선조 26년) 25세 1월, 평양성 탈환에 성공. 2월,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허균은 강릉이나 금강산 등지를 돌면서 두보 시를 공부하고 중들과 사귀었다. 그해 10월 『학산초담鶴山樵談』이란 책을 지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시인들의 시를 평한 시평집이다. 전쟁은 11월부터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594년(선조 27년) 26세 2월 29일, 허균은 정시(庭試) 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승문원(承文院)에서 일을 했고, 중국어 시험에 계속해서 1등을 차지하고, 5월 3일 요동에 다녀왔다.
이때부터 문장도 좋고 중국어도 잘한다는 평판이 돌아 외교관 일을 주로 보았다. 하지만 그 해 여름 소갈병(消渴病>갈증이 나는 병) 때문에 사표를 내고 강릉으로 갔다. 늦가을 다시 관직으로 복직, 예문관과 세자시강원 등에서 일을 했다.
1595년(선조 28년) 27세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사직을 하고 함경도로 갔다. 묘를 단천 근방에서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이장함.
1596년(선조 29년) 28세 강릉부사 정구(鄭逑)와 함께 『강릉지(江陵誌)』를 엮음. 책을 임금에게 바치자 허준을 불러 두 사람이 함께 조선 사람들에게 맞는 우리의 의학서를 지으라는 명을 받음. 그것이 『동의보감』의 시작이다.
1597년(선조 30년) 29세 1월, 정유재란 이 발발했다. 4월 2일, 허균은 문과 중시에 장원이 되었다. 정9품 예문관 검열 벼슬이 정6품 예조좌랑이란 직책을 맡게 됐다. 5월, 허균은 선산 김씨 김효원(金孝元)의 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았다. 장인 김효원은 7년 전 영흥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7월, 구원 군대를 청하는 사신 수행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0월, 병조좌랑이 되었다.
1598년(선조 31년) 30세 허균 나이 30세. 중국의 종군 문인 오명제가 오자 허균은 그에게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들 시를 구술 『조선시선』이란 책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10월 13일, 병조좌랑이 됐다. 그러나 며칠 뒤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으며 전쟁은 끝났다.
1599년(선조 32년) 31세 3월 1일, 다시 병조좌랑으로 임명됐다. 4월 8일, 사헌부의 상소를 갖고 틀린 문장을 지적하며 다시 반려시켜 사헌부 전체를 분노케 했다. 이때부터 사헌부의 집요한 탄핵이 계속 이어졌다. 5월 25일, 황해도사가 되었다. 12월 19일, 황해도사에서 파직됨. (서울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그들을 위해 관아를 더 넓혔으며, 무뢰배인 중방(中房) 지방 수령의 종자를 데리고 왔는데 아마 이재영과 심우영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 이유로 탄핵을 당함)
1600년(선조 33년) 32세 봄에 중국 사신으로 다녀옴. 오명제로부터 『조선시선』이란 책을 받음. 두 사람이 공저였음. 7월, 예조정랑이 됨.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비)가 죽자, 국상을 준비함. 낭청(郎廳)과 지제교(知製敎)를 겸함. 다시 병조좌랑이 됨.
1601년(선조 34년) 33세 허균은 봄에 호남지방 향시(鄕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남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4월 23일, 가평군수 한호 파직되다. 7월, 충청 전라도 해운판관 직을 맡음. 7월 23일 부안에서 이매창을 만나다. 7월 26일 영광 법성포에서 서울에서 알던 기생 낙빈 등 세 명의 기녀를 만나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놈. 8월 14일, 어머니가 전주에서 감을 먹다 체해 죽음. 그 무렵 큰 형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돼 두 사람이 함께 전라도를 순시하였음. 11월 17일, 원접사(遠接使) 이정구(李庭龜)의 종사관으로 발탁되면서 허균을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임금에게 추천, 허락을 받음. 11월 20일, 허균은 형조정랑으로 제수됐다.
1602년(선조 35년) 34세 2월 13일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으로 도성을 떠나 의주행 길을 나섬. 윤2월 13일 정5품 병조정랑이 됐다. 5월 17일, 국문장에서 죄인을 심문하던 허균은 판부사 심희수가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한 것에 발끈해서 큰 소리로 물러가라 소리쳐서 대간들의 탄핵을 받음. 7월 14일, 선조 인목왕후를 새로 맞아 대사면령을 내렸는데 그 문장을 허균이 썼다. 그 무렵 허균은 조정의 공식 문서들을 주로 작성했다. 8월 27일, 정4품 성균관사예가 됐다. 10월 1일, 정3품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됐다.
1603년(선조 36년) 35세 4월, 큰 형 허성의 딸이 선조의 8남 의창군(義昌君)과 혼인함. 여름, 춘추관 편수관 일과 지제교 일을 겸직하다.
8월, 다시 탄핵을 받음. 이유는 조카 결혼식에 이상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 너무 집요한 사헌부 대간들의 공세를 받고 모든 관직을 벗어버리고 그 길로 금강산을 향해 갔다.
1604년(선조 37년) 36세 1월 23일,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입적함. 그 무렵 허균은 강릉과 금강산을 오가며 파계승처럼 행동했다. 강릉부사 유인길(柳寅吉)과 사귐. 7월 27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발령, 같은 날 허성은 예조판서에 오름. 9월 6일 허균은 수안군수가 됐고 석봉 한호는 강원도 흡곡현감이 됐다. 그러나 허균은 5개월 만에 파직됐고 한호(韓濩: 한석봉)는 한 달 만에 파직이 됐다.
1605년(선조 38년) 37세 2월, 작은 형의 문집 『하곡집』 두 권을 출간했다. 4월,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포로 3천 명의 데리고 들어왔다.
조선과 일본이 평화협정을 맺었다. 5월, 수안군수에서 파직됨. 7월 1일, 새벽까지 술을 같이 마셨던 한호(韓濩) 는 술에 취해 나귀를 타고 집을 가다 나귀 등에서 떨어져 객사함.
1606년(선조 39년) 38세 중국 황제의 손자 탄생을 알리기 위해 중국에서 한림원 수찬(修撰) 주지번이 조선에 들어왔다. 3월 4일, 허균의 집에서 주지번을 접대했다. 3월 27일, 허난설헌 시집을 주지번에게 주었다. 12월, 아들 굉(宏)이 출생했다..
1607년(선조 40년) 39세 2월 6일, 허균은 정3품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임명됐다. 2월 어느 날, 나옹(懶翁)이정(李楨: 조선중기의 천재화가)이 평양 거리에서 객사하였다. 3월 24일, 삼척부사로 발령이 남. 4월, 고을에 도착한 지 13일 만에 탄핵을 받았다. 7월 19일, 내자시 정(內資寺 正)에 제수됨. 그 해 허균은 3번이나 문관들 상대로 한 시험에서 장원이 됨. 12월 9일, 공주목사로 임명됨. 형 허성은 예조판서가 됨.
1608년(선조 41년) 40세 허균의 나이 40세. 그 해 2월 1일 선조가 사망하다. 8월 21일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직됐다. 남궁두라는 도인을 만나 신선 흉내를 낸 것이 직접적인 탄핵 이유. 한양으로 올라오지 않고, 부안 우반골 정사암에 기거하였다. 그해 12월 승문원 판교(判校)가 됨. 허균과 이매창의 스캔들이 부안은 물론 한양까지 퍼짐. 그로 인해 승문원 판교라는 자리에서 다시 파직됨.
1609년(광해군 1년) 41세 1월, 명나라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내정됨. 2월 15일, 이재영과 함께 한양을 나섰다. 4월 29일,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서자)이 전라도 진도에서 목 졸려 죽었다. 조선 전체가 가뭄과 전염병으로 길거리에 죽은 사람들이 쌓였다. 5월 14일, 승문원 판교(判校)에 임명됐다. 6월 14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正三品무관벼슬)로 제수됐다. 9월 6일, 정3품 형조참의로 임명, 그의 첫째 부인도 숙부인(淑夫人) 직첩이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년) 42세 2월 19일. 허균이 천추사로 발탁되었다. 요동도사가 무역거래소를 혁파하려고 하니 이를 막기 위해 뇌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 4월 26일, 허균은 자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음해나 모함하는 말들이 나돌자, 병을 핑계로 대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은 신의가 없는 자라며 비난했고 사헌부에서는 4일 동안 허균을 잡아서 국문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남. 10월 22일 대궐이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그런데 임금은 갑자기 한 달 뒤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함. 야사에서는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사를 한 뒤 한동안 귀신들이 나타나 불길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들이 돌았음. 억울하게 죽은 인종의 혼도 돌아다녔다는 말도 있었음.
6월 어느 날, 부안에서 이매창이 병에 걸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피를 토하고 죽었음. 부안의 아전들이 매창의 시신을 거둬 부안읍 공덕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8월 26일, 사명대사가 해인사 홍제암에서 열반. 10월, 나주목사로 임명됐다가 곧바로 취소됨. 그 무렵 친구 권필은 강화도에서 한양 마포로 올라왔다. 11월 1일 별시 문과 전시 시험에 대독관으로 임명됐다. 11월 3일 과거합격자 발표했는데 다음 날 허균은 부정시험과 대리시험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함. 45일 동안 의금부에 갇혀 있다 12월 29일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감.
1611년(광해군 3년) 43세 1월 15일, 유배지 전라도 함열에 도착함. 3월 17일 임숙영 책문 사건이 일어남. 4개월 동안 성균관 유생과 삼사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 임숙영의 과거급제 취소를 철회해 달라는 요구. 결국 광해군은 이들 요구를 들어줌. 4월 23일 성소부부고 64권(지금은 26권만 남음)을 완성함. 11월 1일 유배지에서 풀려나 11월 12일 서울로 올라왔고, 다시 11월 24일 부안으로 내려감.
1612년(광해군 4년) 44세 4월 2일, 가장 가까운 친구 권필이 풍자를 지었다고 국문을 받고 귀양이 결정됐는데, 동대문 밖 시장 주막에서 술을 너무 마시다 4월 7일 죽음. 허균 이때 『홍길동전』 집필함. 8월 9일 큰형 허성이 65세 나이로 죽음. 2년 전부터 풍으로 고생하다 죽었음. 12월 15일, 중국으로 가는 진주사(陳奏使)에 허균이 결정됨. 허균은 경비를 더 청구했고 이틀 뒤 대간들의 격렬한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함.
1613년(광해군 5년) 45세 허균의 나이 45세. 부안을 비롯해 호남지방을 두루 다님. 4월 25일 ‘칠서의 난’이 일어남. 이것이 계축옥사로 발전함. 6월 1일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사약을 먹고 죽음. 6월 17일 죄인들이 말한 것 중 허성과 김제남이 결탁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음. 불리한 허균은 이이첨에게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었다고 함. 12월 1일, 허균 예조참의에 제수됐다가 임명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예조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주장이 사간원에서 제기돼 임금은 곧바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
1614년(광해군 6년)
2월 10일,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 2월 15일, 호조참의로 임명돼. 6월,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갔음. 이 때 중국서적 가운데 선조는 일본과 내통했다는 것과 광해군이 집권 과정에 잘못된 역사가 기술된 것을 확인하고 임금에게 보고함.
1615년(광해군 7년) 47세 1월, 급한 일이니 빨리 서둘러 중국 역사책을 수정하라는 임금의 지시를 받고 허균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감. 2월 8일, 허균은 왜곡된 중국 역사책 4권을 임금에게 올렸음. 2월 14일, 승문원 부제조로 임명. 5월 15일, 문신들 상대한 백일장에 장원을 차지함. 5월 22일, 동부승지에 임명됨. 윤8월 5일, 문과정시에서 또 1등. 종2품 가정(嘉靖)대부 품계를 받음. 윤8월 8일, 광해군과 허균이 중국 황제에게 잘못 기술된 역사책 내용을 함께 검토하고 수정을 원하는 글 작성. 이것을 들고 허균 중국에 감.
1616년(광해군 8년) 48세 1월 6일, 중국에서 역사책 수정 성과를 비밀리 보고. 2월 29일, 황제의 칙서를 가져온 허균과 민형남의 공을 예조에서 치사함. 4월 12일, 황제의 칙서와 수정된 역사책을 갖고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냄. 5월 11일, 정2품 형조판서가 됐다. 5월 29일, 임금에게 녹피(鹿皮)를 하사받음. 8월 10일, 문과 10명과 무과 24명의 인재를 발탁했는데, 이때 허균과 이재영이 지은 글로 합격생 대부분을 선발.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도 이때 뽑힘. 10월 8일, 최기 역모 사건이 빌미가 돼 형조판서에서 파직. 10월 26일, 허균, 역사책을 수정한 공로로 노비 4명과 전田 20결을 하사받음.
1617년(광해군 9년) 49세 1월 14일, 당시 유행하던 흉서들이 허균의 사주로 이재영이 썼다는 민인길의 비밀상소가 임금에게 접수. 민인길은 오랫동안 허균의 측근 무사로 활동한 자. 그가 포상금에 눈이 멀어 배신을 함. 1월 26일 영의정 기자헌이 사임을 청함. 의심이 허균과 이재영, 그리고 이원형에게 쏠려 있었는데 서로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 이 사건 이후 허균과 이재영이 틈이 벌어진 듯. 2월 12일 허균 좌참찬에 임명, 광해군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표시. 3월 9일, 이이첨과 박승종, 유희분 ‘삼청동 결의’가 있었음. 허균이 다시 형조판서로 복귀. 4월 27일,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가 죽었음.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사위이고 정인홍과 친구사이다. 11월 5일, 대비에 대한 폐출 상소가 대대적으로 시작됨. 폐모 논의가 격렬히 일어남. 11월 30일, 폐모에 반대하는 기자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생원 이홍순의 상소가 접수. 12월 24일, 예조좌랑 기준격이 허균을 오랫동안 역모를 준비한 조선의 흉물이란 상소를 올림. 계축년에 일어난 ‘칠서 사건’ 이후로 꾸준히 준비하였다고 상세한 상소를 올림. 12월 26일, 내용을 추가해서 또 올림. 12월 27일, 사헌부 사간원 합계로 기준격ㆍ기자헌ㆍ허균 3인을 모두 국문 청해야 한다고 청함. 임금은 나중에 결정하겠다고 함. 임금은 5개월 동안 기준격의 상소를 갖고 있었음.
1618년(광해 10년) 50세 월 4일, 우의정 한효순이 중심으로 모든 백관들을 대동하고 대궐 앞에서 폐모를 요구하며 연좌농성에 들어감. 왕실과 종친들도 참가했으며 성균관 유생들 뿐 아니라 각 지방의 유생들까지 폐모에 동참. 1월 7일, 양사가 3명(허균ㆍ기자헌ㆍ기준격)을 국문을 청해야 한다는 주장 같은 날 허균 자객의 습격을 받음.
1월 13일, 허균은 자기를 죽이려던 자객이 이이첨 측근이라며 두 사람 사이 반목이 일기 시작. 두 사람 사이 폐모에 대한 의견도 갈라짐. 이이첨은 먼저 중국에 알리고 허락을 얻자고 한발 뒤로 후퇴했지만 허균은 즉시 폐모하자는 강경 입장. 1월 19일, 유희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양사 대간들이 3명(허균ㆍ기자헌ㆍ기준격)의 국문을 거듭 요구. 대간들 상소가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전부 사표를 제출하겠다고 함.
임금은 기준격이 10년도 지난 옛일을 가지고 역모상소를 올린 것에 신뢰하지 않는다고 언급. 사실상 두 사람의 조사요구를 거부함. 이후로도 며칠 동안 집요한 국문요구 상소가 들어왔지만 임금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윤4월 6일, 풍기의 진사 곽영郭瓔이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이이첨과 허균 두 사람을 비난함. 윤4월 7일, 허균이 곽영과 신문을 받게 해달라고 청함. 윤4월 8일 곽영을 잡아 국문함. 윤4월 14일, 곽영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던 의금부에서 기준격의 상소를 보여 달라는 요청이 있었음. 허균과 삼사 긴장관계 형성되었고, 서로 비난하는 글들이 난무함. 임금 삼사의 뜻을 따라 기준격의 5개월 전 상소문을 내놓고 조사를 지시함. 이때부터 허균이 극도로 불리해짐. 윤4월 29일 삼사 합사하여 허균을 국문해야 한다고 청함.
5월 22일 임금이 판의금부사도 공석인데 어찌 추핵推覈하냐고 회의적인 말이 실록이 기록. 6월 들어 후금과의 전쟁 준비로 변방이 시끄러움. 백성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함. 6월 12일, 도성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비망기를 임금이 각 성문 앞에 내걸게 함. 7월 4일, 의정부 좌참찬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음. 8월 8일, 도원수 강홍립 두 번째 사표를 냈지만 수리되지 않음. 7월 20일부터 8월 5일까지 광해군은 비밀 서신으로 여러 정치세력을 탐색하고 견제하다 전격적으로 이이첨을 판의금부사로 임명함. 8월 10일, 남대문 흉서 사건이 일어남. 흉서를 보았다고 전한 허균의 심복 하인준이 오히려 잡혀 들어감.
8월 17일, 기준격과 허균을 의금부에 하옥. 이때부터 허균은 죄인의 신분. 8월 22일, 허균의 관직 몰수당함. 김윤황과 하인준이 흉서 사건 자백. 다음날에도 하인준을 고문하고 더 구체적인 자백을 받아냄. 8월 24일, 광해군이 인정전에 나아가 친히 허균의 심복들을 국문. 이이첨은 도성으로 허균을 따르는 무리들이 진격하고 있다는 광해군을 불안하게 한 뒤 허균 처형을 서둘러 시행할 것을 고집, 허균은 끝내 ‘할 말이 있다’고 외쳤지만 즉시 끌려가 서대문 공터에서 처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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