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류희림(柳希霖)/文化人

야촌(1) 2012. 8. 24. 23:22

●류희림柳希霖)

   [생졸년]  1520(중종 15)~1601(선조 34).

   [문과]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14/36)/합격연령 42歲

   [진사시]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3위(53등/1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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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오늘날의 황해도 신천). 자는 경열(景說).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인호(柳仁濠)의 손자요. 장수현감(長水縣監)을 지낸 복룡(伏龍)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 성균관유생으로서 유생 1,000여명을 대표하여 당시 재흥 추세에 있던 불교를 비판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폐지하도록 상소하였다.

 

그 다음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이 되었다. 이어서 검열(檢閱-正九品)· 박사(博士-正七品)· 정언(正言- 正三品 堂上)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70년(선조 3년) 지평(持平-司憲府의 正五品))이 되었다.

 

그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正四品)· 집의(執義-司憲府의 從三品)를 역임하였는데, 이 시기에 대제학 김귀영(金貴榮,尙州人/左議政을 지냄)의 천거를 받아 거듭 출사(出仕) 할 수 있었다.

 

1581년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가지고 간 방물(方物)중 면주(綿紬) 10필과 흑마포(黑麻布) 11필이 부족한 일의 처벌로, 파직되었다. 그뒤 재 기용되어 한직에 머물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中樞府의 正三品)로서 왕을 호종하여 좌승지(左承旨-承政院의 正三品)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中樞府의 從二品), 그 다음해에 예조참판(禮曹參判-從二品)이 되었고, 이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상소하여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하도록 청하였다.

 

1597년(선조 30)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敦寧府의 從二品)가 되었고,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3등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양(文陽)이다.

 

[가족사항]

[부(父)]  유복룡(柳伏龍)
[조부(祖父)]  유인호(柳仁濠)

[증조부(曾祖父)]  유효장(柳孝章)

[외조부(外祖父)]  채자심(蔡子深)
[처부(妻父)]  박언량(朴彦良)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

 

 

 

 

(하)아버지 류복룡선생(柳伏龍先生)과 (상)아들 류희림선생 묘(柳希霖先生 墓)는 역장(逆葬)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