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김집(金集)

야촌(1) 2012. 8. 17. 22:03

■ 김집(金集)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생졸년] 1574(선조 7)~1656(효종 7)

 [시대] 조선중기

 [본관] 광산(光山)

 [진사시]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8위(23/100)/18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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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선조 7)∼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김장생(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여덟 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그뒤 전라도사‧ 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 하였다.

 

한편,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 등과 상례를 논하고, 또 아버지가 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폈다.

 

그 뒤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道)를 즐기고,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愼獨齋文集

 

[집필자] : 김용걸(金容傑)

 

 

↑신독재 김집선생 간찰